‘강감찬’이지 ‘강한찬’이 아니다.
<강감찬전>을 번역하며 많은 부분에서 멈칫 거린다. 인터넷을 보니 ‘강감찬(姜邯贊)’을 ‘강한찬’으로 독음을 달아야 한다는 글들을 보았다. (‘강감찬’을 ‘강한찬’으로 알린 것은 아마도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최초의 민족 통일국가 고려』(한길사, 2007)부터가 아닌가 한다. ) 뜬금없이 '일제 치하와 연결하여 우리 정기를 말살하려하였다'는 것이 그 한 이유다. 또 한 이유는 ‘邯’의 음이 고을 이름 ‘감’ 고을 이름 ‘한’ 따위로 나오는 데 대부분 ‘한’을 쓴다며 ‘강한찬’으로 읽어야 한다는 참신한(?) 주장이다.
결론부터 말한다. 두 이유 모두 근거 없다. ‘강감찬’이 맞다. ‘姜邯贊’을 한글로 독음을 단 최초는 1446년 한글 반포 이후이다. 이후, 어느 문헌에도 일관되게 ‘강감찬’이다. 그 첫 기록은 조선 숙종 때 편찬된 조선시대 편년사(編年史) 『조야첨재(朝野僉載)』를 번역한 18세기 문헌 『조야첨ᄌᆡ』권9에 보이는 ‘강감찬’이다.
이후 서문중(徐文重,1634~1709)이 편찬한 『조야기문(朝野記聞)』을 19세기 어간에 한글로 번역한 『됴야긔문』2 「뎐녜고사(典禮故事)」이다. 역시 ‘강감찬’이다. 그 후 20세기로 넘어 와 1901년 <뎨국신문>(04.10.), 1904년 <대한매일신보>(01), 1907년 『유년필독』(2권, 37), 1907년 <애국부인전>(08), 1912년 <명월정>(1), 1913년 박건희가 편집한 <고려강시중전>에도 ‘강감찬’으로 표기하고 있다. 더욱이 대대로 구전되는 우리나라 구전설화집인 임석재의 『한국구전설화-경기도편』 ‘강감찬과 호랑이’(1942년 9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현암리에서 채록)에서도 ‘강감찬’으로 독음을 달고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언행록에 이런 말이 있다.
“안으로 공부가 없으면서 깊이 생각지 않고 다른 견해를 주장하면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니 이렇게 되면 스스로를 보전치 못한다(內無工夫 而遽然立異爲衆所怪 則無以自保矣)”
내 책상 옆에도 선생의 저 말을 붙여 놓았다. 글을 쓴다는 것, 학문을 한다는 것, 나아가 주장을 편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이다. 평생 내가 쓴 글, 학문, 주장을 곱씹고 곱씹어 봐야 하는 이유다.
팩트 : 세종대왕께서 한글반포 이후 역사서에서 줄곧 “강감찬”으로 기재되어 있다.
"강한찬" 은 근래의 찌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