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Carr라는 사람이 쓴 What is History라는 책을 권했으면 합니다. 이 책의 핵심은 역사는 고증학이나 금석학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역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사실(fact)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관(史觀)이지요. 랑케의 독일식 실증주의 사관 내지 일본의 식민사학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실증을 빌미로 한 작위적인 목적성에 있는 것입니다.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은 폐기하고 목적에 부합하는 것만으로 기술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가장 잘 이용한 족속이 바로 고대는 물론 근대 왜인들이지요.
역사해석의 근거로 제시되는 사서를 신빙성 갖춘 고서가 아닌지는 그 시대에 가 살아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지요. 모자이크처럼 단편적인 사실을 짜 맞추어볼 때 어느 정도 그림이 될 경우 정론이 되는 것인데, 좀 더 지나 보면 그 그림이 호랑이가 아니고 고양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경우도 많지요. 그럴 경우 그 이론은 폐기되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현실이지요.
예를 들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국내 강단사학이라고 하여 비판하는 쪽의 역사 관점을 보면 폐기되어야 하는 이론을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유지하려고 하고 있고, 그들이 잘 하는 것이 검증된 단편적 사실을 다수가 싫어하는 목적 속에서 전체 그림을 계속적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보는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미 선점한 프레임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해석에 태클을 건다고들 보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역사논쟁을 다수가 지지하는 목적보다는 그들만이 잘 아는 방법론 쪽으로 몰아간다고 보기도 하는 거지요. 그게 소위 말하는 학술적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학술적이냐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익도 합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요. 극우나 극좌 모두 통하는 것은 바로 과도한 목적성 때문이지요. 우리 나라는 일본이라는 극우와 북한이라는 극좌에 둘러 쌓여있지요. 그리고 과거 극좌에 속했던 중국이 극우 쪽으로 방향으로 돌고자 하면서 과거의 이념논쟁이 역사논쟁으로 변해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몇몇 분이 극우적 역사관을 부정하시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환빠, 환쟁라고 불리는 분들이 일본이나 중국 만큼 극우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들이 새롭게 정립되었으면 하는 역사 또한 일본이나 중국처럼 패권주의 추구하는 것이 아니지요. 극우가 나쁘다는 것은 일반론이고 어느 정도 우파적 시각을 역사에 투영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것이고, 우리 나라의 환빠나 환쟁이들의 정도가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더 심한 일본과 중국의 패권주의적 극우 사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이를 학술적 방법론 상의 문제점을 기준으로 전면 부정할 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국의 사서에서 나오는 기록들은 단편에 불과합니다. 그 조각이 틀리다는게 아니고 그 조각을 맞춘 그림이 잘못되었다는게 다소 국수주의적 역사 해석이지요. 그러나 이는 역사실증주의 기반에서 기존 일본 위주, 중국 위주로 편제해 본 역사관을 부정하려는 측면이 아닐까 하네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그 조각으로 자신이 생각한 그림을 맞추고자 하는데, 그 그림은 역사를 전공한 사람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학술적 영역에 한정시키는 것도 적절치 않습니다. 역사가 학문을 위해서 존재하는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환빠라고 보는 분들 역시 그들만의 관점으로 그림을 맞추고 있지요. 그러면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조각만 모아서 그림을 그려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였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역사학자들이 짜맞추어 제시한 고양이 그림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래 논제를 보면 한반도 남부에 왜라고 하는 집단이 살았는데 그게 국가적 수준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마한이나 백제, 가야에 연결되거나 현재의 일본과 연계되는지는 누구도 자신있게 얘기하기 어렵지요. 여기있는 분들이 좋은 것만 수용하는 태도가 유치한 것은 많지만 그게 사람 사는 곳이지 않겠습니까?
직소퍼즐과 같은 그림 맞추기를 하는 목적이 뭐겠어요? 귀퉁이가 잘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림을 맞추는게 아니지요. 맞추고자 하는 그림은 바로 보고자 하는 목적에 있는 것이고, 그 목적은 여기 있는 분들이 학자가 아닌 이상 학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보고 싶은대로 보고자 하는 사관이 핵심이지요.
보고 싶은대로 보고자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적절치 않습니다. 더욱이 보고싶은 것을 다른 사람이 보는 시각에 안 맞추고 있다고 뭐라고 하는 것은 더 큰 문제지요. 역사는 인문학인 동시에 사회과학입니다. 역사는 학문인 동시에 정치이기도 하지요. 목적성을 배제한 학문으로 남을 경우 그건 역사가 아닌 고증학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바로 현재 싯점과 과거의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자 하는지 명확히 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학문은 단순한 방법론에 불과한 것이고 그러한 학문은 인문학적 목적이나 정치적 목적 등이 반영되는 것입니다. 학술적 방법론을 따르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는 없지요. 사람들간의 관계에 있어목적성을 배제한 학문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이 되지요. 과연 역사가 고증학이나 아니면 자연과학에 속하는 학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