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17세기경 추정. 윤관이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700리 밖에 세운 고려
지경 비문을 그린 조선시대 그림>
왜 조선은 유럽의 대항해 같은 걸 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투정어린 혹은
단선적 사고가 있어 한 글 올립니다.
우선 짧게나마 유럽의 중세 사회에 대한 구조와 상황에 대한 기초부터 인지
해야 하겠군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으로 로마제국이 무너지면서 천여년간 이어진 중
세 유럽은 과거 로마제국이 만들어 놓은 도로망과 물류,인적 교류같은 대
규모 상호 이동은 극히 제한되고 일부 원거리 무역과 귀족들의 일부 사치
품외에는 대다수 농노들의 문화나 삶,경제력이라는 건 그야말로 부실 그자
체였음(한마디로 지독히 가난). 그기에 한 국가 단위의 공간안에서 조차
도 각영주간의 물류,인적 교류는 극제한적이였단 말이죠.
그나마 중세 후기로 가면서 점차 도시의 면모도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흑사병의 유행(1347∼51), 백년전쟁(1337∼1453), 농민 반란(1388) 등
중세후기의 또다른 극심한 혼란상을 겪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동으로 통하던 국제무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동쪽루트가 막혀버린
유럽은 제대로된 큰 시장도 통합된 경제 체재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일부의 부와 명성등이 있겠지만 한마디로 제대로 잘먹고 살려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본격적 대항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죠(그기에 비잔틴제국의
우수한 학자들이 이런 오스만제국의 팽창으로 유럽으로 피신하면서
대항해 시대의 기술적,이념적 뒷받침을 점차 부채질)
그에 비해 유럽에서도 황금의 나라처럼 인식되던 서토같은 오늘날
미국에 견주는 단일최대소비시장 외에도 동북아는 우리 고조선 고구려
문명권(만주와 남북한 열도일대를 아우르는)의 자체 소비시장과
유라시아를 잇는 북방 유목민들이 만든
최소 3개 이상의 거대한 문화권과 소비시장을 가지고 일찍히 흉노제국과
한나라 혹은 고수,고당전쟁간은 문명대전으로까지 불리는 대규모
충돌뿐 아니라 다양한 무역교류를 해왔던 것이고. 그기에 조공무역 역시도
이런 국가간의 공무역의 독특한 형태로 이미 동아시아는 오늘날 국제자유무
역같은 네트워크를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돌아가고 있었다는 말임.
(그기에 원시기 몽골은 중동까지 이런 네트워크를 형성시키면서
고려의 금속활자가 이런 활자로드를 통해 이후 유럽의 변방 독일로
흘러들어갔다는 최근 주장이 괜히 나온게 아니죠.
독일의 경우도 근대국가의 면모로 그리고 유럽에서 강국으로 인식
될 수 있었던 실질적 배경은 다름 아닌 1818년에 프로이센에 의해
국내 관세폐지에 따른 소규모 지역간에 막혀 있던 물적, 인적 교류를
촉진시킨 관세동맹을 통해서 경제부흥과 더불어 유럽의 강국 중 하나
로 발도움하게 된 계기임)
이때문에 굳이 서토나 조선등은 유럽처럼 대항해를 할 필요도 없이
각자의 독자적 황제적 국제 외교와 정치,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고
는 이미 상호간에 무역 교류를 해오고 있었고 내부적으로 이미
왜국 외에는 단일 중앙집권적 통합 경제 체재를 두고 있었기에 딱히
유럽처럼 대항해를 위한 현실적 필요성 없이도 주변국만으로도
먹고 살기에 상당 부분이 커버 가능했던 상황이였습니다.
아래 어느 글의 지도를 보면 명이 마치 만주 지역 넘어 극동까지 다
지들 땅 마냥 색칠을 쳐해놓고 있던데 엄연히 동만주일대는 조선이
더 실질적 세력권과 영향력으로 여진족을 관리하에 두고 있었고
유구,왜국 외에 동남아 등에도
독자적 정치,외교,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해 놓고 실제 황제적
질서로 다스리고 있었음. 전국시대 왜의 지배층 사이에서
조선대국관(朝鮮大國観)으로 조선을 대국으로 그 문명을 흠모하든 사고가
실제 괜히 있었던게 아닙니다. 이런 건 임진왜란때 동래성
전투 바로 다음날 3천여명을 데리고 투항해서 같이 싸운 왜의 장수인
사야가(선조에게 사사받은 김충선 장군)장수등 항왜 세력의 투항 이유만
봐도 팍팍 느껴지는 대목임.(비록 임진이후 조선의 권위가 중기 이전만
못했다고 하더라도 조선은 후기에도 조,청,왜간의 삼각 무역의 중심
축으로 에도 막부에서는 한해 쌀 생산량의 12퍼센트를 소비하면서까지
조선의 선진 관료 문화와 막부의 자국내 지배 당위성을 인정받기 위한 교류
로 조선통신사로 이어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