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동진 (265년 ~ 420년) 義熙 9 미상, 양서의 찬, 諸夷伝 왜왕이 조공을 보내옴 진서, 安帝紀,
421 송 (420년 ~ 479년) 永初 2 찬 찬이 송에 조공을 보내옴. 무제가 "멀리서 온 정성이 크므로, 제수(除授)를 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함 송서, 倭国伝
425 송 元嘉 2 찬 왜왕 찬 사마 조달(曺達)을 사신으로 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침 송서, 倭国伝
430 송 元嘉 7 찬 1월에 왜왕이 조공을 보내옴 송서, 文帝紀
438 송 元嘉 15 진 왜왕 찬이 죽고 그의 동생 진이 계승하여 스스로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 자칭하며 정식으로 임명해주기를 요청함. 하지만, 진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문제는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는 관직만을 제수함. 문제는 왜왕 진의 신하들에겐 平西(평서)征虜(정로)冠軍(관군)輔國(보국)將軍(장군)이라는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달라는 요청을 허락함 송서, 文帝紀와 倭国伝
443 송 元嘉 20 제 왜왕 제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삼음 송서, 倭国伝
451 송 元嘉 28 제 왜왕 제가 安東將軍(안동장군)과 더불어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에도 임명됨. 7월에 아울러 23인의 신하들도 군(軍)과 군(郡)을 제수함 송서, 文帝紀와 倭国伝
462 송 大明 6 흥 3월 왜왕 제의 왕자 흥을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에 임명함 송서, 孝武帝紀와 倭国伝
477 송 昇明 1 무 11월에 왜왕이 조공을 보내옴
왜왕 흥이 죽고 그의 동생 무가 위를 이음. 무는 스스로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七國諸軍事(7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 자칭함 송서, 順帝紀와 倭国伝
478 송 昇明 2 무 무가 스스로 開府儀(개부의)同三司(동삼사)라는 문관1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당히 가수(假授)한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함. 순제가 무를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王(왜왕)에 제수함
[*]왜왕 무가 요청한 관직중에서 백제가 빠진 것은, 이미 425년 문제가 백제 19대 왕인 구이신왕에게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百濟諸軍事(백제제군사)鎭東大將軍(진동대장군)百濟王(백제왕)이라고 관직을 제수하였기 때문에 무의 요청중 일부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서, 順帝紀와 倭国伝
479 남제 (479년 ~ 502년) 建元 1 무 고제가 왜왕 무를 鎮東大將軍(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킴 제서, 倭国伝
502 양 (502년 ~ 557년) 天監 1 무 4월 무제가 왜왕 무를 征東大將軍(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킴
일본 역사책과의 비교[편집]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왜왕의 이름들은 일본서기의 천황의 이름들과 매우 달라 어느 천황이 어느 왜왕인지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이나리야마의 칼과 에다 후나야마 칼의 금석문을 근거로 왜 무왕이 유라쿠(웅략) 천황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나머지 왕들에 대해서는 중국 사기의 기록을 어림잡아 다른 천황에 비정하고 있다.
찬(贊) : 닌토쿠 천황 혹은 리추 천황
진(珍) : 한제이 천황 혹은 닌토쿠 천황
제(濟) : 인교 천황
흥(興) : 안코 천황
무(武) : 유랴쿠 천황
일부 학자들은 이들 왕이 5세기경 야마토 조정(현재의 일왕가의 조정)이 아닌 다른 왕조의 지배자들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 왕조들은 현재 일왕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조공 기록[편집]
찬(贊)[편집]
晉安帝時,有倭王贊 遣使 朝貢。[1]
진 안제때, 왜왕 찬이 사신을 보내 조공함
高祖永初二年,詔曰:「倭贊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2]
고조 영초2년, 조서에 이르길 : 왜찬이 만리먼길에서 (송에) 조공을 보내옴. (송나라 무제가) "멀리서 온 정성이 크므로, 마땅히 제수(除授)를 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함
太祖元嘉二年,贊又 遣司馬曹達 奉表 獻方物[2]
태조 원가2년, 왜왕 찬이 또 사마 조달(曺達)을 사신으로 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침
진(珍)[편집]
贊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왜왕 찬이 죽고 그의 동생 진이 계승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스스로 칭하길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 함.
表求除正,詔除安東將軍、倭國王。
정식으로 임명해주기를 요청함. 하지만, 진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송나라 문제는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는 관직만을 제수함.
珍又求除正 倭隋等 十三人 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詔並聽。[2]
송나라 문제는 왜수(倭隋)등 13인에게 平西(평서)征虜(정로)冠軍(관군)輔國(보국)將軍(장군)이라는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달라는 요청을 허락함
제(濟)[편집]
二十年,倭國王濟 遣使 奉獻,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2]
20년, 왜국왕 제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삼음
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並除所上 二十三人軍、郡。[2]
28년, 왜왕 제가 安東將軍(안동장군)과 더불어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에도 임명됨. 아울러 23인의 신하들도 군(軍)과 군(郡)을 제수함
흥(興)[편집]
濟死,世子興 遣使貢獻。[2]
왜왕 제가 죽고, 세자 흥이 사신을 보내 조공함.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籓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2]
세조 대명6년 조서에 이르길 : 왜왕세자흥 역시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에 임명함
무(武)[편집]
興死,弟武立,自稱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2]
왜왕 흥이 죽고 그의 동생 무가 위를 이음. 무는 스스로 칭하길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七國諸軍事(7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라 함
順帝升明二年,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
순제 승명 2년, 사신을 파견하여 왜왕 무가 표문을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구석지고 먼 곳에 봉 받아 밖의 번신이 되었습니다. 옛 조상 때부터 몸소 갑옷을 입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편히 쉬지 못하였습니다.
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於歲。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하여 왕도가 무륵익어 태평하고, 땅은 서울에서 멀리까지 넓혔으며, 해마다 세공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선대를 이어 나라를 평안하게 통솔하고 있으며, 천극으로 가는 길은 백제를 통해 가야하기에 배를 타고 가야합니다.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雖曰進路,或通或不。
비록 나아갈 길은 있지만 그 길이 혹은 통하기도 하고 혹은 통하지 않기도 합니다.
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
신의 죽은 아비 제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
신은 양암(빈소)에 거처하였기에,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과 싸우지 못했습니다.
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부형들의 뜻을 펴보고자 하옵는데, 의롭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문무를 가릴 것 없이, 공을 나타내려 합니다. 눈앞에 흰 칼날이 번쩍이는 다급함이 있더라도, 또다시 되돌아다볼 필요는 없사옵니다.
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
만일 황제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鹹各假授,以勸忠節。」
삼가 스스로 임시로 개부의동삼사의와 그 나머지 모두에게도 관작의 제수를 원하였다.」
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鹹各假授,以勸忠節。」
무가 스스로 開府儀(개부의)同三司(동삼사)라는 문관1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당히 가수(假授)한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함.
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2]
순제가 무를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王(왜왕)에 제수함
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鎮東大將軍。[3]
齊建元中,除武 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1]
고제가 왜왕 무를 鎮東大將軍(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킴
梁武帝即位,進武 號征東大將軍。[1]
무제가 왜왕 무를 征東大將軍(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킴
順帝升明二年,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於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鹹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왜왕 무(무령왕)가 송나라에 보낸 외교서신 내용.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雖曰進路,或通或不。
비록 나아갈 길은 있지만 그 길이 혹은 통하기도 하고 혹은 통하지 않기도 합니다.
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
신의 죽은 아비 제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
신은 양암(빈소)에 거처하였기에,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과 싸우지 못했습니다.
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부형들의 뜻을 펴보고자 하옵는데, 의롭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문무를 가릴 것 없이, 공을 나타내려 합니다. 눈앞에 흰 칼날이 번쩍이는 다급함이 있더라도, 또다시 되돌아다볼 필요는 없사옵니다.
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
만일 황제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13대 근초고왕(346~375)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 시킴
아직기,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를 쓰게함
14대 근수구왕(375~384) 근초고왕의 맏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데 공이 많음
15대 침류왕(384~385)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함
16대 진사왕(385~392)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 출정하다가 병사함
17대 아신왕(392~405)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패함.
18대 전지왕(405~420) 아신왕의 아들
19대 구이신왕(420~427) 전지왕의 맏아들
20대 비유왕(427∼454)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함
21대 개로왕(455~475)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22대 문주왕(475~477)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국방에 힘씀
23대 삼근왕(477~479) 문주왕의 맏아들
24대 동성왕(479~501) 삼근왕의 동생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25대 무령왕(501~523) 동성왕의 둘째아들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함
26대 성왕(523~554) 무령왕의 아들 도읍지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함
27대 위덕왕(554~598)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함
[출처] 백제왕계보|작성자 판타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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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일본 천황가의 개조, 개로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39> 개로왕을 위한 만사(輓詞)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57564
1.서기 413년 왜왕 찬(讚): 사신기록(晉書 안제기)
2.서기 421년 왜왕 찬(讚) : 유송(劉宋) 무제 안동장군왜국왕 제수(宋書)
3.서기 425년 왜왕 찬(讚): 유송 문제에게 사신과 공물(송서)
4.서기 430년 왜왕 찬(讚): 왜왕 공물(송서)
5.서기 438년 왜왕 진(珍): 왜왕 찬이 죽고 동생 진(珍)이 즉위하여 공물을 바치고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 진한 모한6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칭하다. 왜왕에게 안동장군왜국왕을 제수(송서)
6.서기 443년 왜왕 제(濟): 제가 공물을 보내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됨(송서)
7.서기 451년 왜왕 제(濟): 제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 제군사 겸 안동장군 제수(송서)
8.서기 460년 왜왕 제(濟): 공물기록(송서)
9.서기 462년 왜왕 흥(興): 제의 왕자 흥(興)을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송서)
10.서기 477년 왜왕 무(武): 왜왕 흥(興)이 죽고 그의 동생 무(武)가 즉위하여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 가라 진한 모한7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자칭(송서)
11.서기 478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 임명(송서)
12.서기 479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임명(濟書)
13.서기 502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정동장군으로 추증. 정동대장군의 오기인 듯 함(梁書)
지금까지 우리는 상기 5명 가운데 3명의 이름을 이미 거론하였다.
무(武)는 백제 무령왕이 일본에서 왜무왕이었고,
곤지왕이 왜흥왕,
개로왕이 일본에서 왜제왕으로 군림하였다.
중국에서 받은 왜왕의 작위가 왜백제신라임나가라 진한 모한6국 제군사왜국왕으로 왜가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을 보고 일본이 백제신라에 대하여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백제의 왕자들이 일본을 통치하다가 백제왕으로 부임했던 것은 모르쇄로 일관한다.
찬(讚)과 진(珍)은 좀 설명이 필요하지만 진은 광개토왕의 왕자 고진이며
5세기의 한 때 잠시 일본을 정복하여 고구려의 지배하에 두었다.
닌토쿠 천황은 전사했고 고진이 잉교(允恭)천황이 된다.
중국사서에는 찬이 죽자 동생 진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었지만
동생이 아니라 적국 고구려에게 나라가 점령된 것이다. .
http://kmaritime.org/blog/show/49
*(아직 이쪽은 알아보지 않아서 잘모르겠습니다만.. 대략.. 왜왕이 백제왕보다 끗발이 역전되는 시기란게 보입니다. 백제왕은 진동장군, 왜왕은 안동장군인데.. 백제왕이 품계가 더 높았지만, 왜왕이 백제 제군사와 진동장군, 정동장군 직위를 요구하며 떼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상 이 시기의 백제 본토왕은 고구려한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만큼 풍전등화의 위태위태한 상황이었기에 차라리 바다건너 왜 열도의 분국 왕이 팔자가 나았으리라 보여집니다.)
송서에 왜5왕이 책봉을 받은 시기는 대략.. 고구려 장수왕 재위기간입니다.
송서에 나타난 왜5왕 시기(413~502년), 고구려 장수왕(412~491)
재밌게도.. 그 바로 전 시기가 광개토대왕에 의해 백제가 망하다시피한 시절이었고..
왜와 가야도 빈사상태로 넉다운 된 시기였다는 점이죠.
그 후 백제가 찌그러지고, 한강이남의 백제,신라,가야 모두 고구려 영향권에 있던 시기였죠.
왜왕은 송나라에 조공을 바쳐가며,
왜,신라,백제,임라,가라,진한,모한 등의 6국, 7국 제군사를 자칭하는데..
이 시기는 북연이 송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에 저항하다,
송나라 지원군의 장군 왕백구가 고구려에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던 438년 무렵입니다..
왜는 이때다 싶어, 고구려랑 사이가 틀어진 틈을 이용해 송나라에 무리한 책봉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틈틈히 고구려를 씹어대며, 송나라의 지원과 공격을 요청하지요.
http://ko.wikipedia.org/wiki/%EC%99%9C5%EC%99%95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 신의 죽은 아비 제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 만일 황제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 재밌게도.. 왜왕이 고구려에 대한 원한이 아주 심하게 드러나며, 아주 열심히 자신의 책봉을 최대한 많이 받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처음엔 그런 요청이 송나라에 의해 씹히기도 했으나..
열심히 조공을 바쳐가며 매달려서인지 결국 원하는 책봉을 따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저 표문의 내용에서도 나타나듯이..
송나라에 최대한 의지해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발버둥이었던것이죠.
자..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백제는 고구려한테 와장창 깨진 시절이었고,
왜 열도는 고구려의 군대가 딱히 건너갔다고 보기 어려운데..
왜왕들이 고구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한반도 남부세력의 맹주라는 명목상의 지위를 확보하려 애쓰죠.
근데, 당시 백제는 거의 고구려한테 툭하면 얻어터지고 망하는 수준의 약소국이었습니다.
고로, 왜 열도의 백제 분국이 오히려 안정적인 시기였다 이거죠.
그래서 왜왕의 직위를 가진 백제왕이 한반도의 위태로운 백제 본국을 대신해..
필사적으로 고구려를 까고, 디스하면서 송나라한테 우리를 한반도의 맹주로 인정해달라,
그리고 고구려 좀 같이 공격해달라, 잘보이려 애쓰며 연합하려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엄연히 고구려가 자주 침략하고 집어삼키려 했던 나라는 왜가 아니라, 백제였거든요.
근데, 왜왕이 백제왕에 빙의된것처럼 고구려의 침략을 논하고 있다는 것이죠.
(근데, 왜 5왕 중 진은 고구려왕자 고진이라는 썰도 있고, 그래서 고구려가 왜열도를 정복했다는 썰도 있더군요)
한마디로 왜(백제 분국)왕이 고구려에 줘터지던 허약한 본국 백제왕보다
오히려 한끗발 높았던 시절의 상황을 나타낸 장면이랄까요..
이걸 일본 학자들이 필사적으로 한반도는 왜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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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태위태했던 백제 본국도 결국 신라와의 결혼동맹이나,
왜 분국의 지원과 송나라와의 관계강화등으로 필사적으로 버텨서
훗날 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 세력을 극복할 수 있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