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보장왕, 그리고 그 이후의 고구려 부흥운동 기록까지
그리고 신당서 지리지를 다시 면밀히 읽었습니다
이 기록들은 압록강의 위치를 고찰하며 11 월 초에 살펴봤던 것들인데 이번에 서경의 위치를 탐구하면서 활용할수 있겠다 싶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612 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시에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습니다
내호아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들어서 설레발 치다가 실컷 털리고 찌글어지죠.
그 사이 수나라 육군이 압록강 서쪽에 총 집결합니다.
우문술은 압록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를 다시 건넙니다. 그런 뒤에 평양성에서 30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칩니다
학계 통설에서 패수는 대동강, 살수는 청천강에 비정돼 있습니다.
한번 지도를 펼쳐서 보세요
A
수나라 육군 ㅣ압록강 ㅣ살수 ㅣ 평양성
(서) --------------------------> (동)
우문술은 결국 살수에서 그 유명한 살수대첩의 희생양이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군사들이 그곳에서 압록강까지 450 리를 도주합니다
B
압록강-----------------살수
(서) -----450 리-----(동)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645 년 기사에는 당 태종이 군사들과 전략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두려워하고 있는 틈을 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방위는 알 수 없으나
C
오골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
으로 오골성이 평양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D
압록강 ㅣ 살수 ㅣ 평양성 ㅣ 패수
또 648 년 기록에는 "당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에게 우리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泊灼城)의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공격했다가 실패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 기록상으로도 박작성은 압록강의 북쪽에 있음을 알 우 있습니다
E
오골성과 박작성은 평양성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B에서 살수~압록강 거리가 450 리라 돼 있는 것만 빼면 압록강이 평양성과 멀지 않은 것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B의 기록에서는 우문술의 패잔병들이 하룻동안 뛰어서 450리를 도주했다고 돼 있습니다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신당서 지리지 가탐도리기의 기록을 볼 텐데요
이 기록은 사신, 상인 등의 실측 자료입니다
이 기록에서
안동도호부(요양)를 기준으로
F
평양은 동남쪽 800 리
G
박작성은 남쪽 700리
라 돼 있습니다
이 기록 대로라면
박작성과 평양성은 겨우 100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평양이 여러 곳이었다는 가정을 염두하더라도 당나라 시대의 평양은 박작성과 100리(당척 기준)밖에 안 되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압록강은, 또 평양은 어디였던 걸까요?
고구려 박작성이 지금 비정된 곳이 아닐 것이라는 기사를 접한 일이 있어서 다시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네요
아마튼 삼국사기와 신당서 지리지를 검토했을 때에 당시의 고구려 평양은 지금의 압록강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지금의 평양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압록강의 위치 역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닐 수 있다는 심증을 강화시켜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