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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머리로는 정리가 안되어
한서 지리지, 후한서 군국지 유주의 요서군, 요동군을 정리해봅니다.
지도에서 본다면 서쪽 => 동쪽 입니다.
어떤분은 지리지 표기방식이 중앙, 북남서동 이라고 하는데, 이해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한-후한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통해 동서 속현을 구분합니다.
이치라고 하는 이유는 경기도 송파 => 서울시 송파... 처럼 관할관청이 변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 난하 동쪽 요서군 속현의 이치 변화
전한 14개현에서 후한 5개현으로 변합니다. (이유는 ?)
그러면 9개현은 어떻게 되느냐 ? 난하 서쪽(우북평군)으로 넘어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9개현의 일부는 관할없이(?) 지내다가 안제 AD107~ 이후에 [요동속국]의 속현으로 부활합니다.
여기 요동속국은 전한의 요서군 속현과 요동군 속현을 각3현씩 끌어다가 완성합니다.
- 교려(창려), 도하, 빈종(빈도), 방현, 무려, 험독
눈에 띄는 지명은 위만조선의 수도 험독, 요서요동의 경계라는 의무려산을 보유한 무려현 입니다.
★ [요동속국]에 대한 개념설명이 희귀하여 썰을 푼다면...
AD49 건무 25년에 고구려 모본왕이 병주의 태원, 유주의 상곡-어양, 기주의 (중산)북평을 습격합니다.
이때 당대의 지략가 요동태수 제융(채동 蔡彤, 祭肜)이 나타나서 특이한 협상으로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어떤 특이한 협상일까요 ? 선비에게 적용한 협상과 유사하리라 봅니다.
매년 2억 7천만전의 돈으로 선비를 매수합니다. 돈줄께 그만 괴롭혀라~
신기하게도 그이후로 선비, 오환, 고구려의 후한 습격이 실종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각 변경의 주둔군을 불러들여 유래없는 변경의 평화기간을 50년 이상 유지합니다.
고구려도 돈을 받았는지는 알수없습니다.
AD 55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 蝗害穀 태조대왕
대신 요서 10성을 쌓는 시간을 벌고 요서를 고구려 영역으로 확보합니다. 요동군은 정지상태.
AD 97 긴시간이 흐른후에 선비족이 요서군의 비여를 습격합니다. 선비와의 평화협정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AD 104 12월 후한의 요동서부도위를 복치하면서 고구려와의 평화협정도 깨어집니다.
AD 105 1월 원흥원년에 고구려가 후한의 국경을 노략질하러 옵니다.
이후 태조대왕의 요서10성이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후한은 요동군, 현도군에 다시 주둔군을 배치합니다.
■ 요동군 속현의 이치 변화
전한 18개현에서 후한 11개현으로 변합니다. (왜?)
위의 도표에서 서쪽은 요서에 가깝고, 동쪽 배치지명은 고구려에 가깝습니다.
AD 121 요대현은 태조대왕이 선비족과 연합하여 침공합니다.
이때 후한은 신창에서 요동태수 채풍이 출동하지만 전사하고 패배합니다. (신창, 노룡산 있음)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것은 요동군의 속현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데... (서진의 요동군 8현)
고구려나 선비, 부여, 마한의 영향으로 점령 당하거나 폐기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현도군이 전한 3현에서 후한 6현으로 변하는데...
요동군의 요양, 고현, 후성을 끌어갑니다.
즉, 현도군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거나,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경우겠죠.
▶ 속현의 이치를 정리하는 이유
속현이 이치가 되면서 이동하는것을 보면 동서의 위치를 알수있습니다.
전한-후한의 속현을 비교하면 전한 보다 후한의 동북 지배력이 약하다는것을 알수있습니다.
그래서 한번쯤은 AD 37년 대무신왕의 낙랑군 파멸설이 나올법하다고 보여지고요.
모본왕부터 태조대왕까지 고구려의 기세가 정말 무섭습니다.
(단독으로 휘젇고, 선비/마한/양맥과 연합해서 휘젇고... )
요동요서의 구분법 ? 없습니다. 짬뽕입니다. 후대로가면 요동이 요서로 옵니다.
그런데 요서는 난하의 동쪽에 위치하면서 서쪽으로 가지 못합니다.
요서는 난하를 넘지 못한다. 이게 전한-후한-진서 지리지의 특징입니다.
(기자조선의 흔적은 난하의 서쪽: 병주 태원의 기(자)성, 운중의 기(자)릉... 난하의 동쪽: 낙랑 조선현 )
낙랑군과 고구려 서북 강역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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