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6-08-31 17:08
[한국사] 정말로 삼국시대의 병력과 인구는 얼마나 됐을까요?
 글쓴이 : 아스카라스
조회 : 3,568  

고구려 백제 신라

각국의 역사에서 평균적인 인구와 병력,
그리고 전성기, 혹은 초기역사나 말기 때에 인구와 병력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전근대사의 병력이라함은 인구의 몇퍼센트를 차지하며,
그중에 진짜 군인이라고 불릴만한 숫자는 또 병력의 어느정도 비율인지...

그리고 훨씬 살기 각박한 유목민족, 이를테면 몽골 거란 말갈 여진 돌궐과 같은 북방오랑캐 기마민족들에게 평균적인 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각 기마민이 몇명의 보병을 상대할지.

제가알기로
기마무사 = 전차
라고 알고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병력과 인구는 전성기나 몰락기나, 혹은 전체 평균적으로 어느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정말로 백제나 신라가 현 대한민국 정도의 영토를 두개로 나누고도,
곡물이 조, 피, 수수따위였음에도 매번 전투마다 수천은 고사하고 수만의 병력으로 싸울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Centurion 16-08-31 17:50
   
전차 1 대가
보통 기병 10명에 육박하고,
기병 1명이 보병 10명을 당해낸다고들 하죠..

제가 예전 고딩때 열국지 읽던 시절에 나온 대목입니다.

그러나, 전차는 지형 영향을 많이 받고,
춘추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이었나 그 사람이 북방기마민족식 기병전술을 받아들여서..
전차가 아닌 기병 중심의 군대로 바뀌지요.

글고,, 고구려 망할 때  69만호, 백제 멸망할 때 76만호였다고 합니다.
신라는 백제랑 엇비슷하다고 잡고...

1 호라는 단위가.. 1 가족 단위를 의미하고..

산업화 경제성장 이전까지만 해도..
남녀 부부 한쌍 밑에 자녀가 적어도 3~5명, 많게는 8명 정도씩 낳곤 했습니다.
삼국시대 평균수명이 30대 중후반에 죽는다던걸로 아는데..(요즘 자료는 안찾아봐서 모르겠구요)

그래서 1호당 인구를 5명 잡고 곱하면..
대충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각각 350만 정도 x 3 = 1천만명이 되는데..

이게 너무 많다는 이유로.. 잘못 적힌거다..
고구려 69만명, 백제 76만명이다~ 이런 썰도 있었죠..

그런데..
최치원 같은 경우는 글을 남겼는데..
고구려, 백제가 백만대병을 거느린 강국이었다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근데... 본래.. 1 호당 병사 1명씩 차출하는 나라가 많았어요..
춘추전국시대 같은 시절에 보면.. 통일도 안했는데.. 각 나라에서 병력 10만~40만씩 막 튀어나오고,
죽고, 다시 또 튀어나오고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반면 삼국의 역사를 보면, 전쟁할 때 5만 병력 이상 등장하는 장면이 거의 없는데..
제가 봤을 땐 이 5만명 정도의 병력이 각국 왕들이 거느릴 수 있는 중앙군이고..

아마도...
나머지 병력들은 각 지방의 향토예비군처럼.. 존재했거나...
돌아가면서 교대로 투입되었다거나, 후방보급 수송, 축성 등 부역에 동원된게 아닐까 싶네요.

어쨌든.. 그건 그렇고.. 고구려 전성기 광개토대왕 때에도 5만 병력이 등장했는데..
나중에 고-수 전쟁, 고-당 전쟁 때가 되면.. 한 15만 대군도 등장합니다.

이 고-수 전쟁, 고-당 전쟁 시기
고구려군 규모를 30만명 정도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인구가 많은 백제는 병력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로 멸망하는데..
당시 의자왕과 귀족, 호족들이 사이가 별로 안좋았다는 썰도 있고, 나라 망하고 나서야..
슬슬 백제의 지방군들이 소식듣고 올라와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죠.
     
아스카라스 16-08-31 23:02
   
아 전차가 그 전차가 아니라 땡크를 말한겁니다 탱크 ㅋㅋㅋㅋㅋㅋ
현시대의 전차와 같은격이라던데요..
     
아스카라스 16-08-31 23:04
   
그렇군요. 정규군이라 불릴 병력이 있고
부역이나 졸개짓을 할 병력이 있고...
구름위하늘 16-08-31 19:09
   
전에 언급된 일이지만 1호 당 5명은 너무 작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도 5명, 10명, 20명 정도의 고민이 있더군요).

옛날 가구는 요새와 같은 한세대만 모여있는 소가족 형태가 아니라,
3세대 모여서 사는 대가족 형태가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통 병사 징집은 5호 당 1명입니다. (5호담당제 같은 것이 동작하는 이유와 비슷)
이 이상이면 비상사태인 것이죠.
     
아스카라스 16-08-31 23:04
   
그러면 한마을에 20호가 있다면
그 중에 무작위로 4가구만 징집되는건가요?
          
구름위하늘 16-09-02 12:50
   
5호담당제가 동작하는 방식은
5호의 책임자가 집징될 1명을 뽑아서 (자의던 타의던) 집징에 응하는 거죠.
참고로 옛날 마을은 기본적으로 집성촌이고,
촌장은 집안의 큰 어른,
5호 담당자는 집안의 어른이죠.
     
Marauder 16-09-01 01:31
   
저도 개인적으로... 1호당 5명이면 자식이 3명밖에안된다는 이야기잖아요. 자식이 평균 4명만 되도 호당 6명은 처야죠.
     
인왕 16-09-01 04:28
   
당시의 1호를  2~10명으로 봅니다.그래서 편하게 5라고 하는 것인데 오차범위가 엄청나죠? 평균이니까 1인 가구도 있고~ 20인 가구도 있고~ 아이는 금방 죽고~사람도 빨리 죽고~에라 귀챦아 조사안해! 뭐 그랬던 것 같습니다.
karin123 16-08-31 19:09
   
흠 정말 애매하네요.
백제의 경우 근초고대왕이 3만의 병력으로 남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백제 성왕이 신라 공격할때도 3만 정도였습니다. 아마 왕이 거느리는 중앙군이 백제는 3만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백제 멸망후 각지의 부흥군이 수만명까지 동원되는 거 보면 백제는 정말 예측할 수 없네요.
신라의 경우에는 백제 병합후 마지막 3차 여당전쟁때 20만이나 동원한 거보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네요..
다만 고구려 인구는 당나라측 기록으로 350만 정도로 되어있습니다.
밥밥c 16-09-01 00:21
   
정림사지 5층석탑의 기록을 본다면,

백제 31대 의자왕, 왕자 융, 왕자 효 등 13인과 대좌평 사타전복과 국변성 이하 700여명을 중국에 압송하였다라는 것과,
이후 당나라가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고 당시 백제 영토는 24만호에 인구 620만이었다고 적고 있다.
[출처] 충남 부여 (2)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정림사지오층석탑, 정림사지5층석탑)|작성자 DORA와 MINI


  백제 멸망시 인구 620만입니다. (네번째 문단)


http://blog.naver.com/shaman73/220151375040



 국보 제 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 ( 여기서는 첫문단)


http://roaltlf.blog.me/220326777635


 이 기록은 돌에 새겨진 금석문입니다.
     
두리네이터 16-09-01 02:43
   
백제보다 영토가 몇배로 넓은 고려 조선시대 인구도 620만이 안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상당히.신빙성이 떨어지죠.대륙백제설이 진짜라면 모를까...

인구 620만이라면 유사시 동원할 군대가 30만정도는 되어야됩니다.그런데 백제는 기록되어있는 최대병력수가 4~5만 정도죠.차라리 고구려가 그인구였다면 믿음이 가지만..
     
인왕 16-09-01 03:38
   
120만을 잘못 쓰신듯 하네요. 참고로 고구려 망국 당시 350만 정도 입니다. 게다가 신라까지 합치면 17세기 조선시대의 인구를 훌쩍 넘는 인구이니 이것도 상당히 많이 잡은 수치입니다. 고구려의 인구가 70만이 안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요.아! 참고로 당시 당의 인구는 5천만정도로 벌써부터 바퀴벌레적 인구생산성을 보이고 있습니다.그러니까 70만은 좀 오버네요.
그런데 또 문제가 이 호구조사가 천민이나 유랑민 영내의 이민족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인데다가 기록에 조예가 남다른 조선때에도 같은 시절에 조사한 결과로 인구가 152만인데 호패를 가진 성인 남성이 200만이 넘는다고 조사된 적도 있었으니 그걸 어떻게 다 믿겠습니까?
길게 썼습니다만 대답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입니다.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총량을 보는 것은 더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몇%! 쾅쾅쾅! 동원해~!할수있는 시스템이 우선 없어요.
중앙집권화 될수록 인구수에 따른 동원정도를 알수는 있습니다만  호족과 부족들이 난립해 있는 일종의 봉건제 형태인 삼국시대의 군대는 지역마다 다른 훨씬 다양한 비율과 장애요소를 가지고 있읍니다. 총동원령 자체를 내리기가 어려운 시절이죠.
쉽게 말하면 유목민의 경우 인구가 300이면 산적및 마적기능사 소지자가 80~120명으로 25%를 넘기겠죠.(여자도 전투 나가는 놈들은 서쪽에 있어서 다행입니다.)그러나 농경정착민의 경우 도시민의 경우는 2%도 엄청 무리한 동원량이죠. 전쟁의 위치도 중요할테고. 단순히 고구려는 350만이니까 전시동원령(이거 자체가 고도의 사회시스템이지만) 내리면 30만은 나오겠지 하는거 두번하면 고구려 망합니다. 백제는 더더욱 그렇고요.
영토의 크기와 가용동원 군대의 양이 동일하지 않은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두리네이터 16-09-01 02:39
   
삼국사기에 나오는 병력규모는 매우 사실적이죠.국왕이 직접 출병해도 1만이하의 규모가 과반수.  .뭐 근위병만 쳐서 기록한거라는 소리도 있던데..

그런데 중국이랑 엮이면 갑자기 병사수가 뻥튀기됨.고구려 주필산 전투에서 하급장교들이 15만명을 동원했다는거나 고구려 총병력이 줄잡아 30만정도 되었다는거나.,신라도 고구려멸망때 20만 고려도 광군 30만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생산력을 감안할때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있을지...짱깨들이 병력 뻥튀기하니 같이 뻥튀기하게 된게 아닐지...
     
인왕 16-09-01 04:22
   
근위병이 1만이면 그거 엄청 짱짱하지요. 오스만튀르크 황제쯤 돼야 근위예니체리 1만명 동원이 가능할테니까요. 신라 20만은 그냥 총력전인거죠. 김유신이 백제 정벌에 동원한 5만도 대단한 국력 소모인데...안그러면 백제의 곡창지대를 몽땅 빼앗길테니 산에서 풀뜯어먹고 살아야되는데 창잡을 수있는 사람은 다 나갔다고 보셔야될듯. 고려 광군은 좀 놀랍긴 합니다.발해유민이나 승군,말갈족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어마어마한 숫자죠? 그런데 구한말에 서류상으로는 조선군은 100만이 넘었답니다. 허허
TheCosm.. 16-09-01 04:51
   
생산력에 기반을 둔 추측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문제는 삼국 시대, 특히 혼란하던 삼국 말기의 생산력을 얼마만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부분부터 고려하면, 삼국 1000만은 다소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비교적 안정되고 기술적으로도 여건적으로도 매우 나은 조건의 조선도 1500~1600년경에서야 1000만을 넘었다고 하는데.

수시로 청야하면서 수나라랑 씨름하던 고구려도, 고구려에 이어 신라와 피튀기는 격전을 벌이던 백제도, 고구려 때리다 백제 엉덩이 걷어찬 신라도 오히려 양 사이드로 두들겨맞고 있었으니 결코 안정된 사회와는 거리가 멉니다. 인력 소모가 심하면 심했지 늘어날 수도 없고, 생산력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아주 단기간'에 각 국마다 10만 또는 여기에 10,20 단위 더한 것 또는 그 이상의 병력을 모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음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높은 기대에서는 몇 단계 기대를 낮추어 보는 것이 조금 더 사실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국가 흥망을 둔 삼국 말기라면 총력전도 감안할 수는 있겠어도... 음...
     
Marauder 16-09-01 15:14
   
대신 영토가 훨씬 넓잖아요. 그리고 조선의 경우만 봐도 누락되는 경우도 많구요.
     
아비요 16-09-02 16:21
   
조선은 애초에 사회적으로든 통치적으로든 심각한 문제가 있었죠. 봉건제만도 못한면이 몇개 있었는데 그 중 한개가 인구파악이었습니다. 조선 인구가 1500~600년에 1000만 넘겼니 어쨌니 하는건 전부 그냥 추론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인구파악 더럽게 안되던 국가가 조선이고요.

그에 반해서 삼국은 부족이나 호족이 월등히 많았음에도 빈번한 전쟁과 부역등의 동원을 위해서 오히려 인구나 재산 파악이 월등했습니다. 신라장적문서를 보더라도 알 수 있죠. 그리고 사실상 봉건제와 비슷하게 지역 책임자가 영주와 같은 권위를 누렸기에 알아서 자기 지역을 챙겼죠.

그리고 전쟁이 빈번하고 평균수명이 작다고 인구가 작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사실 과거엔 10대 초중반에도 아이를 낳고 길려서 30대쯤엔 대가족을 이루는 경우가 흔했죠. 일본의 경우도 전쟁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인구가 오히려 증가했죠. 조선은 전쟁을 안하면서도 인구가 줄어든 경우도 상당합니다. 애초에 조선을 다스리는 관료층은 자기것이 아니기에 국가에 무관심했고, 수탈만 했을뿐이고..  견제도 없었죠.
현시창 16-09-01 15:38
   
부정확할 수 밖에 없는 사서에서의 병력규모를 통한 역산보단 국토의 부양능력을 계산해 인구를 추정하는 쪽이 더 옳을 겁니다. 요즘엔 사서나 기록에서 인구를 역산하기보단 실제 토양과 당시의 자연환경, 농경기술을 가지고 부양가능한 인구를 역산하는 추세입니다.

실제 고려말 농지의 규모는 약 50만결입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은전과 사원전등 비수세토지를 뺀 결과물이며. 실제 고려말 토지의 면적은 약 100만결 내외로 추정하는 편입니다. 아무튼 이는 상대적으로 농경에 유리하던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국부의 원천이라 할만한 경상, 전라, 충청의 삼남토지가 더해진 결과물입니다. 물론 고구려의 핵심경제지역이던 황해도도 포함되었으므로, 고구려의 경우는 고려보다도 전체적 농업을 통한 인구부양능력이 뒤떨어진다고 평가해야 맞을 겁니다.

고구려의 농업중심지는 황해도와 대동강유역, 함흥평야와 수성평야. 그리고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핵심은 황해도와 대동강 유역, 그리고 송화강 유역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도 주요 대도시인 평양과 한성, 국내성이 이 세 지역의 핵심도시였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에 있어 이들 지역의 생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 모두를 다합칠 경우 아마 백제의 농업생산량과 비슷해질 겁니다.

암튼 고구려의 인구부양능력이 백제, 신라와 비슷하다고 가정하고.(농지생산성이 비슷하다라고 가정)
백제와 신라의 토지를 모두 보유한 고려의 경지면적이 약 100만결이므로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경지면적을 고려의 절반수준인 50만결로 가정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해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보이는게 고려의 절반쯤이라 할 백제와 고구려의 호구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거든요.(실제로 백제전성기 시절엔 인구도 비슷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인구부양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라고 평가한다면...
삼국-고려전기의 경우 평균적으로 토지 1결당 약 180㎏ 정도를 수확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고대시대와 고려전기 시절 농업생산성은 거의 비슷하므로 고구려의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여기에 조를 걷지 않는 토지에서 나오는 산출물(조, 수수, 귀리, 콩등)이 이의 약 3배 정도. 그리고 수산물과 야채(산나물, 야생과수)등으로 인구를 부양하게 되는데, 보통 수세토지 인구부양능력의 약 500%를 하면 얼추 지탱가능한 인구가 나오는데...고구려는 여기에 목축까지 하는 나라입니다.

거기에 또 하나 가정할 점은 시대가 지나도 목축으로 지탱가능한 인구의 수는 큰 증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주요 농업지대를 모두 확보한 조선시대당시 나머지 반농반목 지역을 점유하던 15세기 여진인구나 고대시대 동일지역을 지배한 고구려 지배하의 말갈족 인구나 큰 차이가 없었을 거란 소립니다. 평균적으로 여진족 인구는 약 200만 수준에서 증감을 기록했으므로. 고구려의 농업인구에 이 200만명 내외의 목축인구를 더한다면 고구려의 인구가 얼추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군요.

고구려의 수세경지면적을 50만결이라 가정할 경우 약 9만톤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1인당 일일 급양량을 곡식 480g이라 가정하면 약 51만명. 앞서 언급한 500%를 생각하면 고구려의 주요농경지대에서 부양가능한 인구는 약 250만입니다. 여기에 나머지 지역의 반농반목 인구 200만을 더하면 고구려의 인구가 얼추나오게 됩니다. 약 450만. 기후와 작황과 정치상황에 따라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는 인구이고, 고구려가 한강유역과 영동, 영서 지역을 확보했을 때는 이보다 기준선이 더 늘어났을 겁니다.

강동6주를 차지한 고려전기 부양가능 인구가 약 600~700만 수준이란 걸 생각하면 얼추 맞아떨어지는 가정이죠.
(고려전기 수세면적이 약 100만결이고, 부양가능 인구는 약 500만. 강동육주 확보와 천리장성 축조로 안정적 후방이 된 대동강 유역과 황해도 일대의 대대적인 양전작업. 휴전법과 시비법 발달, 심경법 도입으로 농업생산성이 약 2~3할 발달했으므로 산술적으론 얼추 맞아떨어지는 가정입니다.)

나머지 신라와 백제의 경우 이런 고구려의 절반정도 인구를 보유한 것이 진흥황시기 신라. 3분의 2수준 인구를 보유한 것이 의자왕 시기 백제입니다. 따라서 말갈(여진)인구를 빼고 서로간의 공통분모를 제외한다면 삼국시대 한민족의 총인구는 약 600만명 정도일 것입니다.

통일신라의 인구는 약 500만으로 추정되고, 여기에 통합되지 않은 고구려 유민 100여만명이 여진과 연합해 발해를 건국했다고 보면 되겠지요.
타샤 16-09-01 19:11
   
고대에서 병력은 대부분 뻥튀기 됩니다.
요즘처럼 트럭으로 병참물자를 나를 수 있는게 아니라서..
우마차를 쓰거나 사람이 직접 옮겼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마차면 좀 낫겠지만 사람이 직접 옮기는경우 군량미를 얼마나 나르겠습니까?
그래서 병참 병력이 전투병력보다 많습니다.

황산벌을 논해 보죠.

김유신의 5만 대군과 계백의 3천... 게임이 안되요.
아무리 계백이 무슨 신이 내린 장수라고 해도(그랬으면 백제가 통일해야죠) 이건 게임이 안되는 수치에요.
왜냐하면 계백은 어디로 이동할 자유가 없거든요.
이동할 자유라도 있으면 전략, 전술을 다재 다능하게 사용가능하지만, 황산벌에서 물러설 수가 없는 병사들입니다.
고로 전략 전술은 전부 없고, 그냥 육탄 박치기로 버티는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10배가 넘는 적을 감당합니까?

아마도 김유신은 서라벌에서 사비까지의 원정길... 바로 병참 병력이 상당수 였고..
계백은 사비에서 겨우 황산벌까지.. 병참 병력이 거의 필요 없는 병력이었을겁니다.

게다가 김유신은 말 그대로 병참 병력 뿐이었을 수도 있어요.
사비 함락 직전에, 당나라 장수(이름을 까먹었는데...)가 김유신을 베어 버리겠다고 하죠.
왜? 너무 늦게 왔다 이겁니다. 왜 늦게 온게 문제냐 하면...
당나라 부대는 병참 병력이 없었어요. 김유신이 장비와 군량미를 갖고 와야 하는데 그게 늦은 겁니다.


고로 실제 전투 병력은 2~3천 정도에 불과했을거라고 봐요.
김유신은 자신의 군량미도 날라야 햇지만, 15만 당나라 군대를 위해서도 군량미를 날라야 했던 겁니다.
계백은 그런 김유신을 저지하여 당나라 부대를 물리치려고 했어요.

군량미만 없으면 당나라 부대도 돌아가야 하니까요.
 
 
Total 20,02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92005
6201 [중국] 중국은 대국이고 미래가밝은데 왜 조선족들과 화교… (13) 바람의점심 02-15 3573
6200 [중국] 손도끼를 휘두르는 중국 어선 (5) 적색츄리닝 05-13 3573
6199 [기타] 동남아 한족 쉐리들에 언어 (1) 이스탄벌 08-01 3573
6198 [다문화] 좃족들또 살인범죄 일으킨듯~~~~! (5) 쿠리하늘 09-07 3573
6197 [기타] 빠퀴스탄이 아프간 불체자와 난민 추방하고 살던 집 … (4) 슈퍼파리약 12-18 3574
6196 [기타] 여기는 무조건 국제결혼 자체를 반대하나요? (18) 대한사나이 10-08 3574
6195 [한국사] 환웅족, 공공족, 韓人...그리고 고조선 (19) 윈도우폰 11-26 3574
6194 [다문화] 다른 인종은 한국인이 될 수 없습니다. (29) 盧운지랑께 12-25 3575
6193 [다문화] 파퀴떡녀 통곡 - 4촌누나가 남편 마누라 (14) 내셔널헬쓰 05-03 3575
6192 [일본] 2차세계대전 일본언론들의 인터뷰기사 (1) 서민진보 08-22 3575
6191 [일본] 일본군은 얼마나 강했는가(장문) (13) aghl 02-03 3575
6190 [일본] 아베정부여..이제 그만합시다. (스캐핀 667호문서) (11) 열심히공부 04-10 3575
6189 [일본] "돌아가" 혐한시위 현장서 빛난 일본 양심 (11) doysglmetp 07-01 3576
6188 [일본] 일본 화폐에 근대 위인만 그려져있고 중세나 그 이전… (20) 엄빠주의 01-08 3576
6187 [중국] 독일의 산둥(칭다오)조차지와 칭다오 맥주 (1) 보스턴2 09-04 3576
6186 [기타] 연산군과연폭군이였나? (6) 백전백패 10-27 3577
6185 [한국사] 산동반도 등주에서 고구려 가는 코스 고찰 (28) 감방친구 12-12 3577
6184 [일본] ˝일본 구석기 유적 날조 20곳 이상˝ (6) 햄돌 11-08 3577
6183 왜구우익들의 자금의 왜란사태와 그의도 (4) 총통 07-29 3578
6182 [다문화] 외국인노동자, 일자리 정책의 가장 핵심을 짚은 칼럼 (20) 구르미그린 01-14 3578
6181 중국조선족은 (3) 박사 01-13 3579
6180 [중국] 중국인 들에게 원나라 몽골인들이 한짓 ㅎㄷㄷ (21) 몽키다이 09-23 3579
6179 [한국사] 고조선에 대해 이해가지 않는 점. (19) 북창 02-10 3580
6178 [일본] 일본간첩과 7광구 (8) 갈매기 06-15 3581
6177 [북한] 나라를 좀먹는 종북세력 (29) 적색츄리닝 03-26 3581
6176 [기타] 이주노동자들,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노동허가제 도… (17) doysglmetp 09-10 3581
6175 [기타] 오유 역사 게시판의 몰락 (1) (28) 풍림화산투 06-13 3581
 <  511  512  513  514  515  516  517  518  519  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