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율곡이이의 10만 양병설이 나왔길래 써봅니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에는 논란이 좀 있습니다.
- 10만 양병설은 조작되었거나, 후대에 미화되었다.-라는 것이 주요 쟁점이죠.
율곡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선조에게 시무6조 상소를 올린 일은 있습니다.
=율곡이 각 지방 군현에 병사를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단, 알아야 할 것이.상소에 쓰인 양병(養兵)이란 단어는
율곡 이이만 했던게 아니라
조선시대때 다른 중신들도 흔히 즐겨 쓰던 단어라는 것입니다.
임금은
<안으로는 덕치(德治)를 베풀고, 밖으로는 외적을 방비해야 합니다>라는 아주 원론적인 말입니다.
율곡이이 이전의 병조판서들은 그런 말을 안 썼냐? 아니죠. 그분들도 의레 다들 했던 말입니다.
어쨎거나,, 율곡이이가 남긴 문서들을 통털어, 양병이란 단어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10만'이란 숫자가 등장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즉, 후대에 숫자적으로 뻥튀기가 있다는 것이죠.
그럼? 여기서 10만이란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이가 죽고(1584년), 10여년이 지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이 편찬한 ‘율곡행장’(1597년) 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이 선조 수정실록에 적힙니다.
**수정실록이란 뭔가?
광해군과 북인정권때 선조실록이 나왔지만,
인조반정후 선조실록의 내용이 부실하다며, 서인이 주도해 편찬한 수정실록이 나오게 됩니다.
***당쟁이 심했던 조선후기에는 가끔식 실록+ 다른 이견(異見)을 적은 수정실록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같은 사건을 두고서도, 당파에 따라 논조가 다르기 때문에..
두 실록을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야 합니다.)
선조 수정실록은 인조때 작업에 들어가, 최종적으로 효종 임금때인 1657년에 완성됩니다.
여기서 나온 10만 양병설의 내용은,
[율곡이 10만의 병사를 양성하자 했으나, 류성용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김장생의 율곡행장은, 오늘날까지 율곡을 평가하는 주요자료로 쓰입니다.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도 이에 영향을 받아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수정실록에는 1582년에 주장,
송시열의 문집에선 1583년에 주장했다는 등.
시기적으로 약간식 다르긴 합니다.
여튼, 조선후기엔 정치적으로 서인이 집권 세력으로 오래 영향력을 떨치게 됨에 따라,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그냥 자연적으로 하나의 통설(익히 알려진 논리)가 됩니다.
** 10만양병설은 왜적이 아니라, 원래 여진족 방어를 뜻한다?
민덕기 청주대 교수는 연구논문 <이율곡의 십만 양병설에 대한 재검토>에서
이같이 주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민 교수는 "십만 양병설은 임진왜란과 연결할 수 없다"면서
이이가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제기했다면
그것은 남쪽의 왜적이 아니라 북쪽의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시 시대적 배경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 당시 일본은 전국 통일을 눈앞에 뒀던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직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직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던 때였다.
반면 조선의 동북방 지역에서는 여진족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위기가 고조됐다.
조선 조정은 각 도에서 정예 병사를 뽑아 동북방 지역에 파견했으며, 선조가 사찰의 종까지 거둬들여 무기인 총통을 만들라고 지시했을 정도로 니탕개의 난은 조선 조정에 큰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민 교수는 "당시 조선의 국방차원에서 주로 논의된 지역은 '남왜(南倭·남쪽 왜적)'가 아니라
동북방의 '북로(北虜·북쪽 오랑캐)'였다"고 지적했다.
또 당시 일본은 "누가 주도권을 쥘 수 있을지 일본 내에서조차 오리무중이었던 때였다"면서
"그런 때 율곡이 히데요시의 침략을 예상했다면 하느님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민 교수는 "율곡이 그토록 고심하던 동북방 문제는, 임진왜란의 발발로
뜬금없이 일본방비를 위한 십만 양병설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