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mbc 다큐 영상입니다.
아래는 시간 없으신 분들을 위한 캡쳐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314
블로그 출처:
http://blog.naver.com/kc6731/120208173874
나라가 망할 때도..
의병들이 신식소총이 없어서 빈 껍데기 화승총, 창 들고 일본군과 싸웠는데...
막상 나라가 없어진지 10년 지나고..
청산리 대첩의 무기는 만주, 연해주의 조선동포들이 모금해서 무장한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이었습니다.
청산리 대첩의 독립군이 대략 3천명쯤되니까, 3 천정 정도는 사왔겠죠.
이 모신나강 소총이 1891년도에 나온거니
고종이 나라 망하기전에 러시아랑 외교로 사올 수 있는 소총이었죠.
먹고 살기 막막해서 혹은 집안 재산 처분해서
독립운동하러 만주, 연해주로 흘러든 식민지 조선의 유민들이..
대한제국 정부보다 부유했을까요?
반면,
일본이 쓰던 총은 이 30식 소총, 38식 소총인데...
이게 의병들 상대로 쓰던 소총입니다.
어쨌든, 황당하게도..
일본군에게 군인의 가장 소중한 생명같은 총기와 탄약고를 제압당해서,
(아무리 그래도 외국군한테... 병영의 무기/탄약고를 뺏기고 강제해산이라..)
그 총기를 들고 의병에 합류한 대한제국군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예 총기를 못챙기고 합류한것인지..
일본군 토벌에 대응할 의병들의 무기가 대체로 빈약했고,
그 결과 압도적인 비율로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청산리대첩의 독립군보다,
대한제국군 규모가 최소 3배는 될터인데..
일본군을 많이 죽인건 청산리 쪽 독립군이지 싶네요.
즉, 고종의 친위대격인 시위대가 병력이 정원은 9천명, 실제론 5천명 정도 있었고..
지방군인 진위대는 정원은 2만명쯤 되는데, 실제론 5천명 정도 되니..
대략 1만명쯤 되겠네요.
자, 그럼 청산리 대첩을 지원해준
간도, 연해주의 조선 유민들 숫자를 확인해봅시다.
간도
1910년대에는 대략 13만명
1920년대에는 대략 45만명 (일본의 보복인 경신참변, 간도대토벌에 3만명 사망)
연해주
1914년 6만 3천명 이주.
1923년 23만명 거주
즉,
1910년대로 잡으면 간도,연해주 인구는 20만명정도.
1920년대로 잡으면 많게는 70만명 정도..
이들 20~70만 인구가
대한제국 시절 군대의 1/3 수준인 3천명의 독립군을 지원한 겁니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1300만 인구를 가졌거든요.
여기의 20배 정도의 군대를 가지는것도 가능했을 겁니다. 대략 6만명쯤 되네요.
세금거둘 권리도 없고, 일본군 눈치 보면서, 비밀리에 모금해서,
군대를 양성해서 민간인들이 3천명을 저렇게 키워냈는데..
그래도 주권이라도 가진 상태에서, 세금까지 거두고 있던 정식국가였던
대한제국이 모신나강 소총으로 무장한 6만명의 군대는 커녕, 1만명 정도의 군대를 가졌었다..
좀 문제가 있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정치가 중요한 겁니다.
애국심으로 불타는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국민들이,
애국심으로 뭉친 독립군에게 일본과 대등하게 싸워볼 수 있는 신식 소총을 쥐어줬습니다.
1910년대에 전국적으로 수만명 많게 10만 이상도 추정되던 의병들은 저런 무기가 거의 없었어요.
그러니 좋은 여건에서도 정치를 발로 하던 구한말 집권세력들이 욕쳐먹을 수 밖에 없는겁니다.
고종을 비롯한 구한말 집권세력을 까면,
일본 편드는것처럼 느끼는 분도 있으신데..
당시 일본은 쇼비니즘과 제국주의 야욕에 불타는 인간들이 장악한 나라였고,
일본 우익 지네들끼리도 국력에 있어서 전성기로 보는 시절입니다.
그런 리더쉽과 군사력을 갖춘 나라를 상대하는 조선이..
너무 집권세력이 안일하고 무능하고 타락했던거죠.
결국, 차라리 일개 떠돌이 신세였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해주, 간도의 조선이주민들이 더 큰 일을 해냈습니다.
나라 망친 인간들을 왜 쉴드를 치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지금도 비슷한 인간들이 정치권에 많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나라 또 다시 망쳐먹으면...
'그래도 그 사람들 할만큼 했어?' 쉴드를 쳐주실건지 의문입니다.
모름지기 나라가 발전하려면,
노답인 인간들이 나라를 잡고 있으면...쳐내야지 발전을 합니다..
집안에서 경제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엄한 짓하면요.. 집안이 망하죠.
하다못해 연간 수억원 이상 버는 연예인도 아내가 빚보증 잘못서서 집안 들어먹거나,
떼돈 버는 트로트 가수가 가족때문에 빚만 지고 사는거 보세요.
이게 나라를 운영하는 정치와 리더쉽의 중요성입니다.
묘하게.. 요즘 방산비리나 온갖 친인척 비리, 국내외 외교 안보 상황을 보면..
구한말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았죠. 제가 괜히 구한말 집권세력을 까는게 아닙니다.
지금도 비슷한 인간들이 정재계에 넘치는데,
그걸 또 미우나 고우나 한국인이랍시고. 감싸고 돌면.. 역사가 바로 서질 않아요.
결론 요약:
1907~10년 정미의병 때 전국적으로 수만명에서 십수만에 달하는 의병들이 있었으나,
일본군 2개 연대 4천여명에게 1만7천명이 전사하고 수천명이 포로로 잡히며 끝남.
근데, 청산리 대첩에선 불과 3천명의 독립군이 러시아제 신식소총 들고 일본군 1개연대 규모를 작살냄.
그 결과의 차이는 신식무기. 즉 볼트액션 소총..
왜? 10년전에도 그 무기가 없었던게 아닌데,
왜 1910년에는 그런 무기가 없어서, 의병항쟁이 대규모로 일어나도 실패했는가?
그런데 왜 1920년에는 그게 가능해져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는가?
이 문제의 해답을 고민해 봐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