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담화 -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대해
일본군이 강제 연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긴 담화.
무라야마 담화 - 일본 무라야마 총리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죄.
한일 관계가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를 통해 당시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가 현재의 아베의 우경화로
악화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착각을 합니다.
일찌기 일본은 근대 이후 지금까지 변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조금 우측과 좌측으로 한 걸음 디딘 것이지 일본이 서있는 본래의 위치는 현저한 우측입니다.
그 일면에는 친일파들의 노력 덕분입니다.
수 많은 역사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학자나 교수의 무능력 때문이거나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거나, 교과서는 최소한 어떤 내용을 기술해야 한다는 교육 지침을 참고하여 내용을
작성하기에 그 주제에만 집중한 탓도 있겠지요.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인물을 우리는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이 인물을 검색하면 일본의 현 지폐에서 가장 높은 1만엔의 주인공이고, 고액일수록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논리를 배제 하더라도 지폐라는 특수성을 통해 외국인에게도 가장 먼저 접하는
인물이고, 가장 친숙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후합니다.
일본 근대화의 최고 스승으로 사상가로 생각하고 그의 7훈이 블로그나 친목 단체의 글로도 많이
소개되고 있지요.
하지만 그는 실제로 적어도 우리 국민이라면, 나아가 중국에서도 가장 많은 지탄을 받아야 하는
원흉입니다. 그의 탈아론 주장으로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침략을 정당화 했으며, 지배를 하는게
당연하다는 억지 논리를 정당 방위로 우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의 핵심은 일본 국민들이 생각하는 '자신은 아시아인과는 다른 사람
이고, 백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심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당시 일본은 주변 다른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양의 문물을 자의든 타의든 받아 들였습니다.
자연히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통해 눈을 뜨게 된 것이죠.
일본은 서양 문물을 주로 영국의 영향을 받았기에, 영국의 예전 식민지 정책에 대한 내용들도
습득하고, 자신의 생활마저 철저히 서양화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을 뜨고 보니 다른 국가(한국과 중국 등)은 아직 예전의 형태로 뒤쳐져 있고
그들이 보기에는 미개인처럼 보입니다.
일본은 그런 주변 국가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고 주장한 것이 탈아론의 핵심이었죠.
결국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을 전쟁의 구실로 삼아 침략 전쟁을 시작하였던 일본이었는데
그런 인물이 일본의 가장 고액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버젓히 남아 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 이후 개방을 하면서 지폐의 주인공을 바꾸었는데, 그 가운데는 이토 히로부미
도 있었죠.
일본인 조차 후쿠자와 유키치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묻는다 해도 위와 같은 내용에 대하여
답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습니다.
가장 고액권의 인물이고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내세우면서도 그들도 가르치지 않으니까요.
일본 지폐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존재하는 동안 또 그 인물로 인해 현재의 일본이 전쟁국으로
오늘날 이어갈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고, 그가 주장한 탈아론을 적어도 일본 지배층에서 보면
여전히 유효한, 추구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에 일본은 변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최소한 한국인이라면 그는 우리가 가장 기억하고 알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원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