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본왕 2년(서기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주) 북평(우북평)과 어양은 하북성 중부인 석가장시 부근으로 추정되면
상곡은 산서성 중부인 양천시, 태원은 산서성 중서부인 진중시로 추정됩니다
■ 고구려가 산서성 중부나 하북성을 공격할 수 있는가?
--> 한나라를 공격해서 고구려가 하북성 중부와 산서성 중부를 차지했다
1) 인하대 박성용 국제 정치학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보병은 하루 삼십리(약 15KM), 기병은 하루 60리(30KM) 정도 진군 가능하다고 합니다
(인하대 박성용 교수는 안보, 군사전략 전문가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하북성 중부나 산서성 중부 근처에 있어야
하북성 중부인 북평과 어양과 산서성 중부인 상곡과 태원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2) 사마천 사기 평준서와 한서 무제기에 따르면 예는 하북성 창주시로 추정되며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열전에 예 북쪽이 고구려고 고구려 서쪽이 속민인 오환이 있다고 했으니
고구려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고, 오환의 위치는 산서성 흔주시가 됩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오환을 거느리고 하북성의 북평과 어양, 산서성의 상곡과 태원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고구려의 하북성 산서성 중부 침략은 중국측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는 명확한 사실입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
"후한 광무제 건무[建武] 25년(A.D.49; 고구려 모본왕高句麗 慕本王 2년) 봄에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
상곡上谷·태원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遼東太守 채융祭肜이 은혜恩義와 신의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 고구려는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왜 공격했는가?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범하여 낙랑을 다시 설치하였고 흉노가 오환이 점유하고 있던 산서성을 약탈했기에
한나라와 흉노의 잘못을 바로 잡은 것이다
첫째) 1) AD 37년 고구려가 하북성 중부의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낙랑땅을 확보했는데.., 2) AD 44년 후한 광무제가 하북성 중부의 낙랑땅을 공격하여 낙랑군을 다시 설치하고 고구려와 하북성 중부 형수시 부근의 패수를 경계로 삼았고 3) 동시에 AD 44년에 북흉노의 좌현왕이 산서성의 상당군과 상산군을 침범하였다
(이때 산서성는 고구려 속민인 오환이 점유하고 있었다
※주)후한서오한(烏桓)조에'烏桓者, 本東胡也. 오환(烏桓)은 본래 동호(東胡)이다.' 라고 했으니
오한(烏桓)은환웅(桓雄) 부족인 부여족의 후손으로 삼족오(三足烏)를 숭배하는 의미이니
오환이 동호이고 동호가 북부여이니 오환은 북부여를 세운 부족이다)
둘째) 광무제가 낙랑땅을 빼았아 갔고, 북흉노 좌현왕이 산서성을 침범했기에 1) AD 46 고구려가 남흉노 호한야 선우의 도움을 받아서 오환을 시켜서 북흉노 좌현왕을 공격하게 하여 섬서성 동부의 북흉노 좌현왕을 수천리 밖으로 쫓아냈고 2) AD 49년에 고구려가 하북성 중부의 우북평, 어양과 산서성의 상곡, 태원을 공격하여 확보하고 오한족을 요동, 요서,우북평, 어양, 상곡에 위치시키고 선비족을 태원에 위치 시켯다고 봅니다
삼국 초기인 1세기에 한반도에는 말조선의 후예로
1)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최씨 낙랑국
2)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씨조선(중마한)
3) 경상도 동해안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서라벌(신라)
4) 경상도 내륙 및 경상남도 및 전라도를 지역에는
김해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제국이 있었습니다
※주) 가야제국은 일본 규슈, 일본열도, 중국 동해안(강소성 임나 가야 포함), 대만등
수많은 소국을 거느린 가야 해상제국이었습니다
또한 가야 해상제국은 서기 1세기경의 세계최고의 철기기술을 보유한 문명국가였고요
1) 한서지리지 한지 韓地(한서지리지下) - 연(燕)나라 지역
현토군(玄菟郡)과 낙랑군(樂浪郡)은, 한 무제 때 설치했는데,
모두 조선(朝鮮)과 예맥(濊貉)과 구려(句驪)등 오랑캐의 땅이었다.
은(殷)나라에서 도(道)가 쇠퇴하자,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예의로써 교화시키고, 농사와 양잠과 직물 짜기를 가르쳤다.
낙랑(樂浪)의 조선(朝鮮) 백성들에게는 범해서는 안 될 8가지의 금법(禁法)이 있었다.
2) 후한서 동이열전
옛날 箕子가 쇠망하는 殷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朝鮮 땅에 피난하였다. 처음엔 그 나라의 풍속이 알려진 바 없었으나, 八條의 法을 시행하여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게 하니,
-. 사마천 사기에는 기자를 조선 후에 봉했다고 했는데
-. 한서지리지에서 기자가 조선으로 갔는데 조선에는 기자가 오기전에 이미 팔조법금이 있었다
1) BC 80년 한나라가 흉노에게 오환이 갓 패전한 [상황을] 틈타서 앞으로 나아가 오환을 격파하여 오환군의 머리 6천여 급을 참하고, 세 명의 오환 왕(王)의 수급을 얻은 후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오환은 다시 유주(幽州)를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으나,...
2) AD 25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초에 오환과 흉노는 연합하여 [군대를 보내]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니, 대군 동쪽은 더욱 그 피해를 입었다.
3) AD 45년 건무(建武) 21년(45)에 한나라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에게 3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오환을 불시에 습격하도록 하였다. 오환은 미리 이 사실을 알고 모두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오환은 군대를 되돌려서 마원 군대의 후진(後陣)을 공격하니, 마원은....새내(塞內)로 들어갈 즈음에 죽은 말이 천여 필(匹)이었다.
4) AD 46년 [건무] 22년(46)에 흉노의 국내가 어지러워지자 오환은 [흉노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흉노를 공격하여 격파하자 흉노는 북쪽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였고, 막남(漠南)의 땅은 비게 되었다
5) AD 109년 안제(安帝) 영초(永初) 3년(109)에 어양오환(漁陽烏桓)과 우북평호(右北平胡) 천여 [기(騎)]가 대군과 상곡[군]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 가을에 안문오환(鴈門烏桓)의 솔중왕(率衆王) 무하(無何)가 선비의 대인 구륜(丘倫) 등, 남흉노(南匈奴) 골도후(骨都侯)와 함께 모두 합하여 7천 기를 이끌고 오원[군](五原郡)을 침입하여 약탈하였으며, [오원]태수(五原太守)와 구원[현](九原縣)의 고거곡(高渠谷)에서 싸웠다. 한나라 병사들이 크게 패하였고 무하는 군의 장리(長吏)들을 살해하였다.
6) AD 135년 순제(順帝) 양가(陽嘉) 4년(135) 겨울에 오환이 운중[군](雲中郡)을 침입하여...
7) AD 140년 영화(永和) 5년(140)에 오환의 대인 아견(阿堅)과 강거(羌渠) 등이 남흉노(南匈奴) 좌부(左部)의 구룡[왕](句龍王)오사(吾斯)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8) AD 155년 환제(桓帝)영수(永壽)년간(155~157)에 삭방오환(朔方烏桓)과 휴저도각(休著屠各)이 반란을 일으키자...
9) AD 166년 연희(延熹) 9년(166) 여름에 오환은 다시 선비 및 남흉노와 함께 변방의 9개 군을 침입하여...
10) AD 170년 경 영제(靈帝) 초기에 상곡[군]에 있던 오환대인(烏桓大人) 난루(難樓)라는 자가 무리 9천여 락(落)을 거느렸고, 요서[군]에는 구력거(丘力居)라는 자가 무리 5천여 락을 이끌었는데, [두 사람] 모두 왕(王)이라고 자칭하였다. 또, 요동[군]에 있던 소복연(蘇僕延)은 무리 1천여 락을 거느리고 스스로 초왕(峭王)이라 칭하였다. 우북평[군]에 있던 오연(烏延)은 무리 8백여 락을 이끌면서 한노왕(汗魯王)이라 자칭하였다.
11) AD 187년 중평(中平) 4년(187)에 전직 중산 태수(中山太守) 장순(張純)이 배반하여 구력거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 칭하며 마침내 여러 군에 있던 오환 무리들의 우두머리[元帥]가 되었고,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 기[주](冀州) 4주(州)를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