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알다시피 668년 당나라 신라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된뒤 자그만치 20만명에 달하는 고구려 유민들
특히 평양성 거주 귀족들이 많이 당나라로 끌려갔다가
다시 고구려로 송환됬다가 다시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쓸쓸히 생을 마친
고구려 귀족출신들의 묘비석이 중공에서 여러차례 발굴되고 있는데
이들의 묘비석이 중요한 이유는
금석문적으로다가
묘비에는 그 주인공의 정체성 뿌리관념 가치관 등을
고스란히 생생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묘비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이
이렇다고 하면 가타부타할것 없이
'아 그당시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구나' 하면 됩니다.
그런데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귀족들의 묘비 비문들을 보면
일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고현(高玄)의 묘비에는 자신이 '遼東 三韓人’이라 했고
연남생(泉男生)은 ‘遼東郡 平壤城人’,
고자(高慈)는 ‘朝鮮人’,
연헌성(泉獻誠)은 ‘其先高句驪國人’,
연남산(泉男産)은 ‘遼東 朝鮮人’,
연비(泉毖)는 ‘京兆 萬年人’,
고진(高震)은 ‘渤海人’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비록 몇개의 묘비석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묘비석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고구려 귀족들은 자신들의 뿌리 내지 정체성을
요동의 삼한사람, 평양성사람, 조선인, 발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디 발해란 명칭은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때 비로소 생겨난게 아니라
이미 고구려시대때부터 오랫동안 쓰여오던 지명으로서
장수왕때 북위로 망명한 고구려 귀족들이 자신들을 발해인이라 했는데
이는 고구려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삼한이니 조선이이니 하는 말은 모두 다 같은 뿌리,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죠.
참고로, 645년 주필산 전투 서막에서 당군에게 포로가 된 남부 북부욕살
고연수 고혜진을 '마한의 추장'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 백제의 부여융의 묘지석 서문(序文)에 “그의 기개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에
드날렸다”고 하면서, 명문(銘文)에는 고구려와 관련된 ‘河孫[하백(河伯)의 자손]’, ‘?水(淹?水)’, ‘桂婁’,
‘遼川(遼河)’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백제의 뿌리인 부여사람들이 만주벌판에서 한강 지역으로 이동해온지가 600년이나 지난 시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과 고구려 및 신라 가야를 아우르는 삼한 의식이 고구려인이나 백제인들 사이에
퍼져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로보건대,
백제나 신라 가야사람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인까지 삼한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수 있고
특히 자신들의 뿌리를 옛 조선에 두고 있음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얼마전 역사스페셜에서도 방송했다시피
가야 신라가 라마동 내지 만주 어느 지역에서 경상도지역으로 남하한
부여인 부족에서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사실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두에 서라벌 6부가 고조선 유민이라는 기록에서
신라 가야또한 고조선 부여 계통에서 갈라져 나간 세력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고조선( 그리고 고조선에서 송화강 유역으로 갈라져 나간
부여계통 세력)에서 갈라진 갈래들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수이남의 삼한 특히 신라와 뿌리가 다른 계통의
나라라든가 하는 주장을 펼치는 신라정통론에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