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삼국유사”에 인용한 “古記(고기)”에 의하면 고조선은 평양성. 백악산아사달. 장당경. 아사달 등에 도읍하였는데 마지막 도읍지였던 아사달은 그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도읍지는 세 곳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고조선이 백악산아사달로부터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중국 商王室(상왕실)의 후예인 箕子(기자)가 조선 지역으로 이동해 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문헌에서는 고조선이 위치했던 지역에 고조선 또는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險瀆(험독)과 王險城(왕험성)이 있었음을 전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필자는 이들의 위치를 고증하고 그 위치의 상호관계를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 하였다. 즉 험독은 지금의 요하 동부연안인 심양의 동남지역, 대능하 중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북진, 하북성 창려 부근 등 세 곳에 존재하였는데 이곳들이 고조선의 도읍지였다. 심양의 동남에 있었던 험독은 “삼국유사”에서 말한 고조선의 첫 번째와 마지막 도읍지였던 평양성과 아사달이었으며, 창려 부근의 험독은 두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 이었고, 북진의 험독은 세 번째 도읍지였던 장당경 이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을 가진 지역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는 기자국 말기의 도읍지였다가 후에 위만조선의 도읍이 된 왕험성이 있었다.
원래 중국의 동북부 변경(지금의 난하 서부연안)에 있었던 기자국이 秦(진)시대에 중국의 통일세력에 밀려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 위치한 조선지역으로 이주하여 왕험성에 도읍을 하게되자 고조선은 당시의 도읍인 백악산아사달이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어 기자국과 인접하게 되었으므로 그보다 동쪽인 장당경으로 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위만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고 세력을 키워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잠식하여 지금의 요하 부근까지 차지하게 되자 요하의 동부에 위치한 아사달로 다시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은 고조선의 첫 번째 도읍지였던 평양성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조선이 백악산아사달로부터 장당경으로 천도한 시기는 秦國(진국)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경이 될 것이며, 장당경으로부터 아사달로 다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위만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기원전 194년경보다 조금 늦을 것이다.
고조선의 첫 번째 도읍지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었고, 두 번째 도읍지가 그보다 훨씬 서쪽인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조선족은 원래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진출하였을 가능성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고기)”의 내용을 보면 첫 번째 도읍지인 평양성으로부터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아사달로 옮긴 것을 “또 옮겼다”(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우이도어백악산아사달)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조선족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朝鮮(조선)”이라고 정하기 이전에는 평양성 즉 심양의 동남이 아닌 다른 곳에 거주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이상과 같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확인됨으로써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가 전하는 고조선의 천도에 관한 내용이 매우 정확한 것임도 입증되었다.
그리고 고조선과 기자국의 관계가 한층 분명해짐으로써 기자국을 한국고대사의 주변 맥락 위에서 인식하지 않았던 일연의 견해가 매우 옳은 것임도 확인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제후국으로써 서족 변경에 있었던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후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잠식하여 성립되었으므로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일시에 교체된 정치세력이 될수 없음도 알 수 있다.
PS. 지도는 차후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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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윤내현교수의 단군조선 도읍 천이고를 소개하였습니다. 흔한 착각중 하나가 유적과 유물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다. 무령왕릉 묘지석처럼 명백한 명문이 나오지 않는한 사료분석을 통한 위치비정이 우선입니다.
윤교수는 중국사 전문가답게 중국사료 전부를 동원하여 세밀하게 단군조선의 수도를 비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정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순없겠지만 그건 학계에서 논의할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고대역사학계는 그런 논의 대신 정치적 재단으로 윤교수의 학설을 매장시키려는 비열한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윤교수의 논문수준을 따라오지도 못하면서도 매도해왔죠.
아무튼 지금은 복기대교수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 고고학을 동원해 한층 더 가다듬어진 윤교수의 가설을 검증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부디 이런 정상적인 과학하는 태도가 우리 고대역사학계에도 보편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