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에 앞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낙랑국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후에 낙랑국은 고구려에 흡수되는 역사의 패자이다. 그렇기에 낙랑국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그나마《삼국사기》에 기록이 조금 보이는데, 이 역시 고구려,백제,신라 - 삼국과 관련이 있는 부분만 나올 뿐, 낙랑국의 건국시조의 이름이나 역대 왕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부족한 기록을 토대로 낙랑국의 역사를 최대한 복원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옳은 자세일 것이다.
앞서 1,2편의 내용을 대충 요약해보자. 낙랑국은 BC 1~3세기 경에 건국되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평안남도-황해도 일대로 스스로 고조선의 후예임을 자칭했다.
이후 낙랑국은 건국된지 100년이 넘도록 관련 기록이 없다가 BC 28년에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아래와 같다.
30년(기원전 28) 낙랑(樂浪)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그곳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며, 들에는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법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몰래 군대로 습격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이 기록은 신라 측의 것이기 때문에, 아마 신라의 과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기록의 사건은 전쟁 같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낙랑국의 노략질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낙랑국은 이미 BC 28년 이전에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낙랑국은 이후, 백제와도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온조왕 4년(기원전 15) 가을 8월,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어 우의를 다졌다.
당시, 백제는 북쪽으로 계속해서 침입해오는 말갈을 막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백제는 다른 국가들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고, 그 대상이 바로 낙랑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낙랑국과 백제와의 우호관계는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온조왕 8년 (기원전 11년)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이 기록을 보면 백제가 병산책을 쌓아 낙랑국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언뜻보면, 우호관계가 깨진 원인을 백제가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이 원인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온조왕 11년(기원전 8)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습격하여 부순 뒤 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여기서 낙랑국이 말갈을 시켜 백제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말갈은 낙랑국에 속해있었던 것으로 보아야한다. 즉, 이미 오래전부터 말갈은 낙랑국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백제가 낙랑국과 우호관계를 맺은 이유는 말갈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말갈이 낙랑국 아래에 있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아마 당시 낙랑국은 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백제가 위치했던 경기도 지역을 반드시 지나야한다. 이 때문에 낙랑국은 말갈을 시켜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말갈의 배후에 낙랑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낙랑국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이후, 백제가 말갈의 배후에 낙랑국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국경지대에 성과 목책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낙랑국은 이를 구실로 우호관계를 깨고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낙랑국이 백제를 대하는 방식이 매우 치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도의 전략으로 당시 낙랑국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위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간 것이다.
계속해서 기록을 살펴보자.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있고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낙랑국의 위치로는 쉽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일까?
일부 인간들은 이 기록이 잘못되었다거나 오기(誤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는 낙랑국이 강원도지역에 진출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즉, 당시 낙랑국은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기 위해 강원도 지역을 점령하고, 백제의 북쪽에 말갈인들을 거주시켜 백제를 공격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경기도에 위치해 있었던 백제의 입장에서는 북쪽에 말갈, 동쪽에 낙랑국이 위치하게 된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은 이후 《삼국사기》의 기록에 등장한다.
온조왕 18년 (기원전 1년)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우두산성의 위치는 어디일까? 같은 책 《삼국사기》<지리지>를 보면, 수(首)는 두(頭)라고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우두산성은 우수산성인 것이다. 참고로 우수주는 지금의 강원도 춘천에 비정된다.
다시 말해, 당시 낙랑국은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이다.
낙랑국이 강원도 지역을 점령한 기록은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전을 보면 동예의 특산물 중에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있다. 이는 동예가 특산물에 낙랑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동예가 위치했던 강원도 지역이 한 때 낙랑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이후 낙랑국은 백제를 넘어 신라까지 공격하게 이른다.
남해차차웅 원년(서기 4) 가을 7월, 낙랑(樂浪)의 병사가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남해차차웅 11년 (서기 14년) 낙랑이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여기고, 금성을 공격하여 쳐들어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아마 낙랑국은 점령지인 강원도 지역을 이용하여 신라의 경주를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지도를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기록을 보면, 신라측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위급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낙랑국의 국력이 강성했다는 것을 말한다.
결론
낙랑국은 서기전 1세기 경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낙랑국은 한반도 중북부를 장악하며 남쪽으로도 진출했는데, 아래로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였다. 특히, 낙랑국은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점령하여 한반도 남쪽으로의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다음은 낙랑국의 쇠퇴와 멸망에 대하여 살펴보자.
(결론적으로 낙랑국의 백제-신라 정복은 실패했고, 이후 고구려에 흡수 당한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도 등장한다. 우리는 다음 글에서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