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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 고구려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漢書志云 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菟郡 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 高句麗是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本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 高句麗是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自朱蒙立都紇升骨城 歷四十年
孺留王二十二年 移都國內城[或云尉那巖城 或云不而城]
『통전(通典)』에는 “주몽(朱蒙)이 한(漢)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동남방으로 나와서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고(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古記)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 듯하다.
『한서지(漢書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과의 거리가 3천6백 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써
무려(無慮)현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 때는 그 아래쪽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 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아마도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한서지』에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으로써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대요(요나라)가 멸망하기 이전에 요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계(燕薊)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孺留王) 22년(서기 3)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혹은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하고
혹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로 옮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高句麗]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요사지리지 (동경도)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북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낸곳이 평양성이요. 요나라 동경이다
> 신당서 동이 고려(고구려) => 고구려와 전쟁을 치룬 당의 군사지리정보 : 국내성, 안시성, 평양성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
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
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水有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曆安市城;
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
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曆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於海。
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爲塹。
고구려의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고구려왕은 평양성에 거하는데, 장안성이라 하며 전한의 낙랑군 자리이다.
산의 골짜기를 구비구비 돌아 외성이 된다. 남쪽은 패수이며 왕궁을 패수의 좌측에 축궁했다.
또 국내성, 한성이 별도로 불린다.
고구려 하천으로는 대요수, 소요수가 있다.
대요수는 말갈의 서남산에서 출발하여 안시성의 남쪽을 지나간다.
소요수는 (고구려)요산의 서쪽에서 출발하여 남으로 흐르는데 서쪽으로 흐르는 양수와 합한다.
또 말갈의 백산에서 마자수가 흐르는데 물색이 압두와 같다. 압록수라 부른다.
압록수는 국내성 서쪽을 지나다가 염난수와 합쳐지고 흘러 안시성의 서남에 이르며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수의 동남쪽에 있다. 이 때문에 배로 건너는 사람이 많고 (군사용) 참호의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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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비난하는 분들은 고대국가의 강역 때문인가요 ?
제가볼때는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기록할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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