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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1 17:51
[한국사] 6) 환단고기에서 밝혀주는 역사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656  










은나라 27대 무을왕 때 고조선은 은나라를 초토화시킨다.


<단군세기>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23세 아흘단군 2년(BCE 1236년) 람국(藍國)왕 금달이 청구(靑邱)국왕, 구려(句麗)국왕과 더불어 주개에서 만나 몽고리의 군대와 합세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 성책을 부수고 오지로 깊숙이 들어갔다. 아흘단군께서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고 포고씨를 엄(淹)에, 영고씨를 서(徐)에, 방고씨를 회(淮)에 봉하시니 은나라 사람이 이것을 보고 겁내어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은나라는 단군조선에 의해 거의 멸망 직전이었다. 이러한 <단군세기>의 기록은 중국의 <후한서>에도 거의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후한서> “무을이 포악하니 견융이 변방을 침략하였다. (武乙暴虐 犬戎寇邊)”


<동이전> “은나라 무을이 쇠폐하자 동이가 점차 강성해져 마침내 회대 땅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토에 머무르게 되었다.(武乙衰弊 東夷寢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



은나라의 무을이 퇴락의 길로 빠지가 강성한 동이들이 쳐들어와 회대땅을 점거했다는 이  기록은 앞에서본 23세 아흘단군 때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또한 사마천은 <사기>에서 “은나라 27대 무을은 황음무도한 짓을 좋아해 천신(天神)을 모독하고 농락하는 것을 즐기며 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황하와 위수로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을이 벼락을 맞고 죽었다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교묘히 왜곡한 것이며 실상은 고조선의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가 농락했다는 천신은 상국인 고조선을 의미한다.







천문학 검증으로 식민사학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도 깨다.

 

국사 교과서』에 반영된 식민사학논리『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
 
현행 중ㆍ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고대 부분은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을 모르면 그 개념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로 서술되어 있다.


일제 식민사학의 주요 논리 중 하나가 『삼국사기』 앞부분은 김부식(金富軾)이 창작한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스다 소키치(津田左右吉)(사진)는 1913년에 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비판(三國史記 高句麗紀の批判』에서 “역사적 사실로서는 궁(宮:태조왕) 이전의 국왕의 세계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태조왕 이전의 기록을 모두 부인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건국된 B.C 27년을 전후해 신라와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전하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2002년부터 적용되는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국사교과서>는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도 삭제했었다.(위)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한술 더 떠서 제17대 내물왕(356~402)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7차 교육과정의 『국사 교과서』'백제 왕조 계보'.

 

제7차 교육과정부터는 그 부록의 왕계에 국왕들의 재위연대를 넣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초기 국왕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도 천문학으로 검증한 박창범 교수


금성이 낮에 보였다는 '태백주현(太白晝見)'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8회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는 혜성, 오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별똥별, 일식 등의 '천변'기록과 화재, 기상이변, 지진 등을 포함하는 930여 회의 천재지변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등과학원의 박창범(천체물리학) 교수는 <삼국사기>의 태백주현 기록에서 중국과 일본에 없는 우리만의 독자적인 기록 일곱 가지 사례(서기 394년 백제 아신왕, 서기 555년 고구려 양원왕)를 연구하여 당시 금성이 낮에도 보일 수 있는 밝기였음을 보였으며, 이를 응용하여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천문 관측은 7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밝혔다.



 

박창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는 2012년 6월 29일에 있었던‘톡톡! 과학콘서트’ 강연 중에서도 태백주현에 대해서 설명했다.



<아래는 2012-06-29 동아일보>


“태백주현(太白晝見), 낮에 금성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고려 때 편찬한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이 구절이 모두 여덟 번 등장하는데 현대과학으로 계산하면 이 기록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지요.”

 

삼국사기에는 서기 224년인 백제 구수왕 11년 10월 낮에 금성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박 교수는 과거 금성의 위치와 밝기를 계산해 이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별은 등급이 낮을수록 밝은데 평소 밝기가 ―3.9등급에 해당하던 금성이 당시에는 ―4.67등급에 이르렀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낮에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는 얘기다.



박 교수는 “이는 삼국사기에 나온 구수왕 11년 때의 기록이 믿을 만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고대사 기록은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서와 비교해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346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백제 근초고왕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백제 초기 역사 기록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추가적인 사료가 필요했다. 구수왕 때의 기록은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 역사에 대한 하나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이를 과학적으로 검증한 것은 중요한 문제다.

 



-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관련 기사 http://dok.do/WSJGi4 (한겨레)



 

이런 천문학적 검증으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것이 잘못된 식민사학의 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식민논리는 지금도 국사 교과서에 그대로 들어 있다.




대진국 (발해)의 황제 연호는 환단고기에서만 보여준다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대진국의 전신인 후고구려와 대진국의 건국과정이 상세히 나와 있으며, 대진국 황제들의 묘호, 년호, 시호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당서에서도 연호가 나오지만 대조영부터 연호를 기록하고 있다. <당회요>의 기록에 의해 김육불과 황유한의 책에는 13대 대현석(명종)과 15대 대인선(애제) 사이에 위해라는 이름의 왕이 13년간 다스린 것으로 나온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서기 668년 9월 21일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서압록하(지금의 요하)를 지키던 진국장군 대중상은 패망한 고구려 유민을 모아 동쪽 동모산에 이르렀다.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고구려의 영광을 거듭한다’는 뜻으로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 회복을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던 대중상이 699년 5월 붕어한 뒤, 태자였던 대조영이 뒤를 잇게 된다. 기존 사서에서는 대중상의 붕어 전 해인 698년에 대진국이 건국된 것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그 해 대중상이 대진국의 전신인 후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제위에 오른 대조영은 홀한성(지금의 상경 용천부)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는 대진(大震), 연호를 천통(天統,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이라 하였다.








환단고기에서 밝힌 대진국 황제 연호, 발해공주묘를 통해 입증되다.


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8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환단고기가 그 연호를 기록한 것은 진서임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만주 동쪽 길림성에서 발견된 정혜공주(1949년)와 정효공주(1980년)의 비석


 

대진국은 세조(대중상)로부터 15세 259년간 존속한 나라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보면 대진국 황제들의 묘호, 년호, 시호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위의 년호는 <신당서>에 기록된 년호와 일치하고 있으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이라 한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안시성과 요서 10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환단고기


하북성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다. 조선시대 실학사상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이른바 옛 안시성은 개평현 동북 7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 개평현을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는 개평으로 아는 것은 잘못이다. 개평현은 바로 요서에 있는 개평부이다. 지금 하북성 개평부 동북쪽으로 70리를 가면 천령 또는 천산이라 불리는 언저리에 탕지보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안시성이다.

 

탕지보는 일명 안촌홀 변한성이라 하는데 변한성은 단군조선 시대 삼한의 하나인 번한의 수도로 곧 신지비사에 나오는 오덕지이다. 안시성의 남쪽으로는 당산 준봉이 있고 서쪽으로는 어양, 북평 보정 등지가 넘겨다 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산해관 평원이 훤히 바라다보이고 ,북녘으로는 만리장성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유립총서 천 535~536)






 안시성은 하북성에서 찾아야 한다.

 

(1) 강단사학의 추정은 추정일 뿐이다.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




(2) 중국 정사의 기록 → 하북성 북경일대라 기록하고 있다.

- 한서 : 요동군, 하북성 북경

- 위서 : 안락군, 정주, 하북 북경, 밀운

- 독사방여기요 : 안시폐현, 북경현 동북 50리, 한요동속현



(3) 환단고기 → 정확히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안시성은 하북성 개평의 동북쪽 70리에 있다.”






연개소문의 중국 정벌과 당시 고구려 영토의 경계



연개소문이 당태종의 침략을 격퇴한 뒤에 중원을 경략한 이 역사적 사실이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이외의 기록에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 지금 북경 조양문 밖 7리땅에 황량대를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는 지명이 십여 곳인데 전설에는 황량대가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저라고 속여서 고구려군이 내습하면 복병으로 요격한 곳’이라 하였으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다.



또 산동과 직례 등에 띄엄띄엄 ‘고려" 두 자로 시작되는 지명이 있고, 이곳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고려진‘과 ’고려성‘이다”라고 기록하였다(신채호 조선상고사) 환단고기 완역본(상생출판)



“양만춘 등이 당 태종을 추격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러 허다한 당의 장사를 목 베고 사로잡으니, 요택(遼澤: 지금의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러 당태종은 말을 몰아 수렁에 처넣어 다리를 삼아서 밟고 건너갔다.


10월에 임유관(臨 關)에 이르러서는 연개소문이 당군의 돌아갈 길을 끊고, 뒤에서는 양만춘이 몹시 급히 추격하니 당태종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마침 눈바람이 크게 일어 천지가 아득해져서 지척을 분별할 수없이 되어 양편 사람과 말이 서로 엎드러지고 자빠지고 하여 크게 혼란해지니, 당 태종은 이 기회에 도망하여 돌아갔다.” - 조선상고사 -



 



북경 동북쪽 순의구(順義區)에 고려영(高麗營)이란 곳이 있다. 고려영(高麗營)은 구체적인 유적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려영’은 ‘고려의 군영‘이란 뜻이다. 하지만 ’고려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려영에 대해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安市城)에서 막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내몽고를 우회하여 지금의 북경지역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고려영은 이때 세운 군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사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지만,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호소력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적은 내용이 주목을 끈다. 박지원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일찍이 북경의 동악묘(東岳廟)에서 5리 정도 위치한 황량대(謊糧臺)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짓으로 곡식 창고를 만들어서 적을 속이려고 했다고 기록하였다. 청나라 때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라는 지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고려 윤관의 9성의 위치는  환단고기가 맞다.

 

1107년(예종 2)은 고구려 이래의 우리 민족의 영토가 다시 두만강 이북 만주까지 확장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해다. 윤관(尹瓘)이 동북면의 여진을 물리치고 9성을 설치한 때문이다.

이때 윤관은 여진 정벌 후 선춘령에 고려의 영토 확장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이 비는 ‘윤관비(尹瓘碑)’ ‘선춘령비(先春嶺碑)’라고 불렸다.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실린 윤관의 9성은 북청이남설(北靑以南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북청이남설은 일본인 이케우치(池內宏)의 견해이다. 이 설은 현재 정설로 되어 있고, 역사 교과서도 이 설에 근거하고 있다.

 

즉, 윤관이 개척한 범위는 함흥평야에 해당되며, 그 구성은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는 함흥, 영주성은 함경남도 신흥군 동흥리에 있는 산성, 길주성은 함경남도 함흥군 산대리에 있는 산성, 복주성은 함흥군 탑동리에 있는 산성, 웅주성은 함흥군 퇴조면 신동리에 있는 산성, 공험진성은 함흥군 대덕리에 있는 산성, 통태진은 함흥군 운성리에 있는 산성, 숭녕진은 함흥군 운흥리에 있는 중봉 산성, 진양진은 함흥군 오로리에 있는 금반산성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를 기록하는데 어찌하여 왜놈의 학설을 그대로 인용하는가? 이케우치(池內宏)의 학설은 어디에 근거를 두는 것인가?



윤관 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쌓은 9성의 영역에 대해 [고려사 지리지]에는 “ 두망강 밖 7백리 선춘령에 ‘이곳에 이르러 고려의 국경을 삼는다”는 7자의 글자를 새긴 윤관의 비가 있다“라고 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백리 선춘령이 두만강 동북 7백리“라고 하여 고려 9성이 두만강을 넘어 만주 깊숙이 있다는 [태백일사]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동북 9성을 식민사학자들이 함흥 일대로 대폭 축소해 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윤관'의 9성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현 역사계는 이케우치(池內宏) 설만 믿고,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옛 사서에는 “ 두 장군이 선춘령에 비를 세우고 ‘至此爲高麗之境 이곳이 고려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선춘령은 두만강에서 700여리 밖의 송화강 근처 땅에 있다”라고 하였다. 환단고기[태백일사 고려국본기]





 



발해 5경 서경압록부의 위치도 잘못되어 있다.
 
대진국(발해) 때 오경의 하나인 서경압록부는 지금의 요하 상류 임황臨潢에 있었다. 고구려와 대진국(발해) 당시에 지금의 요하가 압록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현재의 파림좌기)는 본래 한나라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땅이다”라고 하여 거란의 요나라 수도인 상경임황부가 본래 한나라 때의 요동군 서안평현이 있던 곳임을 밝히고 있다. 바로 이곳에 대진국(발해)의 서경압록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후에 대진국(발해)을 멸망시킨 요나라가 상경임황부를 도읍으로 삼았다.



종래에 사대 식민주의 사학은 서경압록부의 위치를 지금의 압록강 중류 지역으로 왜곡하여 대진국(발해)의 방대한 영토를 크게 축소시켜 놓았음은 물론 대진국(발해)을 당나라에 예속된 일개 지방정권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 환단고기 완역본(상생출판 ) 1224p


그간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후예들은 서안평을 압록강 대안의 단동(丹東)이라고 우겨왔다. 그래야 한사군(漢四郡)의 중심지인 낙랑군(樂浪郡)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식민사학 논리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외교관 2012-04-25 중앙일보 )







대진국(발해) 남경남해부의 위치는 환단고기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남경남해부 [南京南海府]  발해 행정구역인 5경 중 하나. 


발해의 5경(五京) 가운데 유일하게 한반도에 둔 행정구역으로 학자간에는 함경북도의 종성(鐘城), 함경남도의 북청(北靑)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었으나 함경남도의 함흥지역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속주에는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의 3주가 있었다. [출처] 남경남해부 [南京南海府 ] | 네이버 백과사전

 


 

과연 그러한가?


중국의 정사인 요사에 명확하게 기록되어있다. 요사 자리지에 “해주는 남해군이며 절도사가 있다. 본래는 옥저국의 영토이다. 고구려 때는 사비성을 쌓았는데 당나라 이세적이 이곳을 공격한 적이 있다. 발행서는 남경남해부라고 불렀다. 海州,南海軍,節度.本沃沮國地.高麗為沙卑城,唐李世勣嘗攻焉.渤海號南京南海府”라고 하여 요나라 때의 해주는 곧 지금의 해성이 본래 옥저국(남옥저를 말함) 땅이고 고구려의 사비성이 있던 곳이며 대진국(발해)의 남경 남해부가 자리잡고 있던 곳임을 명백히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현제 통용되는 대진국(발해) 지도들은 남해부를 함경도에 붙여 왜곡해놓았다.  환단고기 완역본(상생출판)

 

교과서의 발해 행정구역은 오류가 많다.




고조선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 근거 사료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燑傳) 신지비사 언급]

 

<고려사>에 이르기를 제 23세 고종(1213~1259) 때, 김위제(金謂燑, 고려 숙종‧예종 때의 인물)가 평양으로의 천도를 주장하며 올린 상소문에서 이 신지의 '서효사'를 인용하며, 그 출처가 <신지비사>라는 책의 서문이라고 밝혔다.

 

如秤錘極器 秤幹扶蘇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여칭추극기 칭간소밀랑 추자오덕지 극기백아강 조항칠십국

賴德護神精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

뇌덕호신정 수미균평위 흥방보태평 약폐삼유지 왕업유흥륭


또 신지비사에 말하기를 저울추는 오덕지, 저울 그릇은 백아강이라. 70국이 조공하고 항복하리라.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고 머리와 꼬리가 균형이 잡혀 나란히 있고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보전하리라. 만약 삼유의 땅을 폐하면 왕업이 쇠하고 기울 것이니라 (하였으니 이는 저울로써 삼경(三京)을 비유함이라. 저울 그릇은 머리요 추는 꼬리요 저울대는 제강(提綱)의 곳이라......)




 



고려사 김위제 상소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첫째) 신지비사의 본문 내용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와 있으며 환단고기 태백일사를 통해서 신지비사의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다. 이것만으로도 환단고기는 위서로 절대 치부할 수 없는 사료가치가 높은 사서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이를 통해서 고조선이 삼한관경(三韓管境)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류사학계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단재신채호 선생의 이론을 베낀 것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를 통해서 보면 고려 고종 때(13세기) 김위제가 [신지비사]를 인용하며 이미 고조선 삼경((三京, 세 수도)을 언급하고 있다.



고조선은 삼경(三京)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세 수도가 하나의 저울이 되는 것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삼한관경 내용을 다룬 서효사의 내용을 그대로 얘기하고 있다.


* 오덕지는 다른 말로 ‘안덕향安德鄕’이다. 오제설에 의하면 황제黃帝 왕검이 계신 곳을 일러 안덕천安德天이라 하였다.







고려사의 신지비사는 신지발리의 서효사(誓效訶,단군세기 內)를 말한다.

달문단군의 재위 35년 임자(BCE 2049)년에 여러 왕을 상춘에 모아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지내실 때 신지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하시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한민족의 뿌리를 노래한 대서사시 <서효사誓效訶>]


무인원년(戊寅元年) 임자삼십오년(壬子三十五年) 회제한우상춘(會諸汗于常春)하시고 제삼신우구월산(祭三神于九月山)하실새 사신지발리(使神誌發理)로 작서효사(作誓效訶)하시니 기사(其訶)에 왈曰


조광선수지(朝光先受地)에 삼신혁세림(三神赫世臨)이로다.

환인출상선(桓因出象先)하사 수덕굉차심(樹德宏且深)이로다.

제신의견웅(諸神議遣雄)하사 승조시개천(承詔始開天)이로다.


치우기청구(蚩尤起靑邱)하시니 만고진무성(萬古振武聲)이로다.

회대개귀왕(淮岱皆歸王)하니 천하막능침(天下莫能侵)이로다.

왕검수대명(王儉受大命)하시니 환성동구환(懽聲動九桓)이로다.


 

어수민기소(魚水民其蘇)오 초풍덕화신(草風德化新)이로다.

원자선해원(怨者先解怨)이오 병자선거병(病者先去病)이로다.

일심존인효(一心存仁孝)하시니 사해진광명(四海盡光明)이로다.


진한진국중(眞韓鎭國中)하니 치도함유신(治道咸維新)이로다.

모한보기좌(慕韓保其左)하고 번한공기남(番韓控其南)이로다.

참암위사벽(巉岩圍四壁)하니 성주행신경(聖主幸新京)이로다.


 

여칭추극기(如秤錘極器)하니 극기백아강(極器白牙岡)이오, 칭간소밀랑(秤榦蘇密浪)이오, 추자안덕향(錘者安德鄕)이로다.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야 뇌덕호신정(賴德護神精)이로다.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하야 조항칠십국(朝降七十國)이로다.


 

영보삼한의(永保三韓義)라야 왕업유흥륭(王業有興隆)이로다.

흥폐막위설(興廢莫爲說)하라 성재사천신(誠在事天神)이로다.



달문단군의 재위 원년은 무인(戊寅, 환기 5115, 신시개천 1815, 단기 251, BCE 2083)년이다.

재위 35년 임자(단기 285, BCE 2049)년 여러 왕을 상춘에 모아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지낼 때, 신지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시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아침 햇빛 먼저 받는 이땅에 삼신께서 밝게 세상에 임하셨고, 환인천제 먼저 법을 내셔서 덕을 심음에 크고도 깊사옵니다. 덕이 높은 모든 이들이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셔서 환인천제 조칙 받들어 처음으로 나라 여셨습니다.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회수 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사옵니다.


단군왕검 하늘의 명을 받드시니 기쁨의 소리 구환九桓에 울려 퍼졌사옵니다.
물고기 물 만난 듯 백성들이 소생하고, 풀잎에 부는 바람처럼 덕화가 새로워졌사옵니다.

원한 맺힌 자 원한 먼저 풀어주고 병든 자 먼저 낫게 하셨사옵니다.



일심으로 인과 효를 행하시니 사해에 광명이 넘치옵니다.
진한眞韓이 나라 안을 진정시키니 정치의 도는 모두 새로워졌사옵니다.

모한慕韓(註: 馬韓,幕漢)은 왼쪽을 지키고 번한番韓은 남쪽을 제압하옵니다.



깎아지른 바위가 사방 벽으로 둘러쌌는데 거룩하신 임금께서 새서울에 행차하셨사옵니다.

삼한형세 저울대 저울판같으니 저울판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요, 저울추는 안덕향이라
머리와 꼬리가 서로 균형이루니 그덕에 힘입어 삼신정기 보호하옵니다.


나라를 흥성케하여 태평세월 보전하니 일흔나라 조공하며 복종하였사옵니다.
길이 삼한관경제 보전해야 왕업이 흥하고 번성할 것이옵니다.

나라의 흥망을 말하지 말지니 천신(삼신상제)님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겠사옵니다.<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 117쪽)>

 


* 진한의 위치에서 보면 마한은 왼쪽에 번한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진한을 보필하였다.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전래와 내용 (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달문達門 단군(재위 BCE 2083~ BCE 2048)때 사람인 신지 발리(神誌發理)가 지은 것이다. 이것은 본래 옛적 삼신 상제님께 제사를 지낼 때 서원하던 글이다. 무릇 상고시대에 하늘에 제사 지낸 근본 뜻은 백성을 위해 복을 빌고 나라가 잘 되도록 신에게 축원하는 것이었다.



신지비사(神誌秘詞)의 기원: 제사의 참뜻

 

神誌秘詞는 檀君達門時人神誌發理의 所作也니 本三神古祭誓願之文也라


신지비사    단군달문시인신지발리   소작야    본삼신고제서원지문야


夫上古祭天之義는 要在爲民祈福하고 祝神興邦也어늘
부상고제천지의     요재위민기복      축신흥방야



『신지비사』는 (6세) 달문단군때 사람인 신지 발리(發理)가 지은 것이다. 이것은 본래 옛적에 삼신께 제사 지낼 때 서원하던 글이다. 무릇 상고 사대에 하늘에 제사 지낸 근본 뜻은 백성을 위해 복을 빌고 나라가 잘 되도록 신에게 축원하는 것이었다.




삼한의 지세: 삼한의 수도 이름과 위치


其曰秤幹扶蘇樑者는 是謂辰韓古都니 亦卽檀君朝鮮所都阿斯達이 是也오. 亦卽今松花江哈爾濱也라.
기왈칭간부소량자    시위진한고도   역즉단군조선소도아사달    시야     역즉금송화강합이빈야



『신지비사(神誌秘詞)』에서 저울대 부소량이라 한 것은 진한의 옛 수도를 말한다. 그곳은 바로 단군조선이 도읍한 아사달이며, 지금의 송화강 하얼빈이다.





其曰錘者五德地者는 是謂番韓古都니 今開平府東北七十里所在의 湯池堡가 是也며

기왈추자오덕지자    시위번한고도    금개평부동북칠십리소재    탕지보    시야




其曰極器白牙岡者는 是謂馬韓古都로 今大同江也니 乃馬韓熊伯多의 祭天馬韓山이 卽此라.
기왈극기백아강자    시위마한고도    금대동강야    내마한웅백다    제천마한산     즉차


窃以三韓地勢로 譬諸衡石則扶蘇樑은 如國之秤幹하고 五德地는 如國之錘者하고 白牙岡은 如國之極器하니

절이삼한지세    비제형석즉부소량    여국지칭간      오덕지 여국지추자          백아강    여국지극기



三者缺一하면 衡不稱物하고 國不保民也니라.
삼자결일       형불칭물      국불보민야


저울추 오덕지(五德地)라 한 것은 번한의 옛 수도를 말한다. 지금의 개평부(開平府) 동북쪽 70리에 있는 탕지보(湯池堡)이다. 저울판 백아강(白牙岡)이라 한 것은 마한의 옛 수도를 말한다. 지금의 대동강으로, 마한의 웅백다(熊伯多)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마한산(馬韓山)이 바로 그곳이 삼한의 지세를 저울에 비유해 보면 부소량(扶蘇樑)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五德地는 ‘나라의 저울추’와 같고, 백아강白牙岡은 ‘나라의 저울판’과 같다.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저울이 물건을 달 수 없듯이 나라가 백성을 보호할 수 없다.








제사는 오직 참되고 올바르게
 

三神古祭之誓願이 惟在三韓管境과 允悅民衆之義也니 神誌秘詞所傳이 亦不外乎是焉이오
삼신고제지서원    유재삼한관경    윤열민중지의야   신지비사소전    역불외호시언




옛날 삼신상제님께 제사 지낼 때 서원한 곳은 오직 삼한(三韓)으로 나눈 영토를 잘 다스리는 것과 백성을 진실로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신지비사(神誌秘詞)』가 전하는 바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則爲國一念이 幷獎忠義하야 祭以悅神하며 願以受福하면 神必降衷하시며 福必興邦하리니 直實以行이니라.

즉위국일념     병장충의     제이열신       원이수복       신필강충         복필흥방         직실이행


나라를 위하는 일념으로 충忠과 의義를 함께 장려하고, 제사를 지내 신을 기쁘게 하고 복을 내려 주기를 기원하면, 신은 반드시 ‘참된 마음[衷]’을 내려 주시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올바르고 참되게 행해야 한다.

 


事不徵實하고 行不求是하면 則所徵所求者從何得功乎아.
사불징실       행불구시      즉소징소구자종하득공호


만일 삼신상제님을 섬기되, 진실되게 행하지 아니하고, 실천하되 바른 길을 구하지 않는다면,
행동하고 구하는 바가 무엇을 좇아 공덕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함화 11년 발해 중대성첩


함화 11년 발해 중대성첩(咸和 11年 渤海 中臺省牒) 사본(寫本)

일본(日本) 궁내청(宮內廳) 서릉부(書陵部) 소장


중대성첩 사본



일본 궁내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로 841년에 발해 중대성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의 필사본이다. 발해와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문서의 원본은 일본에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이 문서는 복제품이다. 長29cm、幅48.8cm 楷書



840년에 발해의 중대성(中臺省)에서 일본 태정관(太政官)에게 보낸 외교문서이다. 사신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원문서는 전하지 않고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임생가문서(壬生家文書)』에 수록된 내용이 전한다. 이 책은 헤이안시대 말기에 오래된 문서를 보관 정리하기 위하여 원문서의 형태를 살려 필사한 것이다.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한 황제국임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아울러 모든 발해 황제의 연호는 환단고기에 기록되어있다.








함화 4년 석불비상(石佛碑像) 


함화 4년명 발해 비상(咸和 四年銘 渤海 碑像)은 높이 64cm에 사암(砂岩)으로 만들어졌으며 전면에 있는 5존상은 가운데에 아미타불이 좌상으로 표현되어 있고, 양 옆에 성문(聲聞)이 서 있으며, 그 옆에 다시 관음 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입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앞면 5존상의 오른쪽 측면에는 문수 사리 보살이, 왼쪽 측면에는 지장 보살이 새겨져 있다.  5존상 위에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물 두 마리가 있고, 5존상과 명문 사이에는 사자 두 마리, 좌상 2좌가 있다. 명문 양 옆에는 인왕상이 있다.



이 비상은 발해 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일본 오하라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발해 함화 4년 연대의 불감으로 소개, 전시되어 있다. 출토지는 알 수 없는데 일본에 있는 것으로 보아 발해와 일본의 교류 시기에 발해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비상 앞면 아랫 부분에 명문이 있는데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부분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다른 부분은 불법(佛法)을 찬양하는 문구로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는 관련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咸和四年閏五月八日, 前許王府參軍騎都尉趙文休母李氏, 敬造阿彌陀佛及觀音勢至等菩薩尊像.



함화 4년 윤오월 팔일, 예전 허왕부의 참군과 기도위를 지냈던 조문휴의 어머니 이씨는 삼가 아미타불과 관음 보살, 대세지 보살 등의 보살 존상을 만들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함화라는 연호는 환단고기에 의하면 역사상 발해 12세 화황제의 연호다. 이 비상은 834년에 발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이 된다. 또한 조상에 있어서 나타나는 문수 사리 보살과 지장 보살의 동시 출현이라는 특이한 양식은 오직 이 비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발해만의 특유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황제국이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이다.



다음은 "許王府"라는 문구인데 허왕부라는 조직이 있었다면 이는 "허왕"으로 책봉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발해 황제 밑에 제후왕이 존재하였다는 증거로 함화라는 연호와 함께 발해의 군주는 바로 황제적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저 허왕부라는 조직이 과연 발해의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으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비상이 발해에서 만들어진 발해 특유의 양식으로, 사용된 연호가 발해의 것임이 분명한 이상 이 조직도 발해의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비상 명문에는 이미 은퇴한 것으로 보이는 전직 관리 조문휴를 위해서 그 어머니가 조성한 것으로 나타나므로 허왕부를 다른 나라의 조직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적절하지가 않다. 



또한 발해의 뒤를 이은 요나 금에서도 허왕이라는 존재가 사료상 확인되므로 발해에도 허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결국 이 비상에서는 발해의 연호뿐만 아니라 허왕부라는 후왕 조직까지 확인되므로 당시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뿐만 아니라 발해 황제 밑에 제후왕까지 두었던 명실상부한 황제국임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대진국(발해) 오경제도의 연원은 환단고기 속에 있다.


대진국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오경 15부 62주라는 행정조직을 운영하엿다. 오경 중에서 상경과 중경, 동경은 수도가 될 정도로 중요하다. 오경제도의 연원에 대해서는 오경의 도성 제도가 당나라 이전일 수 없다는 의견과 당의 사경 제도가 발해 오경의 기원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대진국의 오경제는 고구려의 오부제와 신라의 오소경제 및 백제의 오방제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동북아 역사재단의 [발해 오경과 영역변천]에서는 대진국과 당의 문화는 근원이 다르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건축학적 계승관계에서도 발해는 당과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 여러군데 제기되고 있다. 또한 발해의 상경성은 160여년간 존속했던 도성이고 당나라의 오경제는 불과 4년 정도에 불과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발해 오경제가 단순히 당으로부터 연원한다는 주장을 수용할 수 없다. 발해 유적에서 당 왕조의 유적에는 없는 고구려식 온돌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한 발해의 오경제와 요와 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점은 널리 알려진 사항이다”

 


 

지난 해(2010년) 8월 한국과 러시아 공동 조사단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 조사한 발해 최대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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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isent 18-03-01 17:53
   
연나라.기나라 가 혹시 고조선 이였나요?
     
스리랑 18-03-01 18:16
   
아닙니다.
스리랑 18-03-01 18:20
   
지난 해(2010년) 8월 한국과 러시아 공동 조사단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 조사한 발해 최대 규모의 온돌시설. 이곳은 발해 시기 수도 중의 하나였던 동경용원부였다.

 

그렇다면 대진국(발해)의 오경제도의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환단고기 삼신오제본기에 기록된 삼신사상과 오제 사상에서 유래한다. 이강식교수는 [신시조직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고유한 조직적 전통을 보면 한민족의 삼신오제 사상이 고려때까지도 유구한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환국의 5가 조직. 신시의 3백 5사 5가 조직, 고조선의 3한 5가 3백 6사조직이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3경 5부 조직, 백제의 5부 조직, 신라의 5소경 조직, 대진(발해)의 5경 조직, 고려의 3경 5도 양계 조직 등으로 이어져 왔는데 이것은 모두 5분할의 지역조직이다 ”환단고기 완역본 상생출판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택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황하유역을 화족에게 물려주고 난하를 건너 갈석산에 처음 도읍을 정하고, 그후 장춘-하얼빈 일대, 다음에 한반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그래서 세개이다. 도읍지의 이동에 따라 강역도 바뀌고 있다.

 

또 한가지, 고대에는 요동이 요수(현 난하) 이동을 말한다. 그러니까 난하와 요하 사이가 요동이다.

요동이란 멀 遼자 동녁東 자이다. 장안(서안)에서 먼 동쪽 나라라는 뜻이다. 그러니 요동은 요하(현 난하)의 이동을 말한다. 난하의 서쪽이 요서지역이다.




오늘날처럼 요하 이동이 아니다. 그리고 요수 즉 난하가 요하이고, 현재의 요하는 압록수이다. 고대사를 바로 보는 방법은 현재의 지표나 지역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 돌아가서 보는 방법이다.

 

중국의 한족은 고대에는 현재의 난하(구 요하)를 건너 통치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하 이동은 순수한 동이(청구)의 나라이다.















한민족사 왜곡의 원흉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금서룡今西龍)는 1929년에 <단군고>를 쓰면서 단군을 부정했다.





그는 고려시대에 ‘고조선기’와 유사한 구전(口傳)과 고기(古記)가 많았다고 하고 그 당시 서운관(書雲觀)에 있던 서적들을 소개 하였는데 ‘표훈삼성밀기’도 있다. 즉 ‘조대기’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 수찬기소100여권' ‘’도선한도참기’ (이하 생략) 등이다라고 하였다. 이마니시는 이미 안함로의 삼성기까지 다 알고 있었다.

 










이마니시(금서룡今西龍)조차 자신의 저서著書인 <朝鮮古史の硏究>의 <단군고檀君考>에서

 

태종太宗 왕조실록 12년 條에 열기列記된 신비집(神秘集),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安含老 元董仲 삼성기(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智異聖母), 하사량훈(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 왕거인王居仁 설업薛業 등 삼인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 일백여권(一百餘卷),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虱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서적들이 왕씨 고려시대에 서운관書雲觀을 중심으로 하여 많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서적들이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初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연유하여 도가(道家-선가仙家)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스스로 피력하고 있다.<이마니시 류의 단군고 61쪽 >

   







이마니시 류가 <단군고>에서 인용한 내용은 태종 12년기록과 세조7년 수서령의 기록이다.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8월 7일(기미) 2번째기사




사관 김상직에게 충주 사고의 책을 바치도록 명하다.

사관(史官) 김상직(金尙直)에게 명하여 충주(忠州) 사고(史庫)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 《소아소씨병원후론(小兒巢氏病源候論)》·《대광익회옥편(大廣益會玉篇)》·《귀곡자(鬼谷子)》·《오장육부도(五臟六腑圖)》·《신조보동비요(新彫保童秘要)》·《광제방(廣濟方)》·진랑중(陳郞中) 《약명시(藥名詩)》·《신농본초도(神農本草圖)》·《본초요괄(本草要括)》·《오음지장도(五音指掌圖)》·《광운(廣韻)》·《경전석문(經典釋文)》·《국어(國語)》·《이아(爾雅)》·《백호통(白虎通)》·유향(劉向) 《설원(說苑)》·《산해경(山海經)》·왕숙화(王叔和) 《맥결구의변오(脈訣口義辯誤)》·《전정록(前定錄)》·《황제소문(黃帝素問)》·《무성왕묘찬(武成王廟讚)》·《병요(兵要)》·《전후한저명론(前後漢著明論)》·《계원필경(桂苑筆耕)》·《전한서(前漢書)》·《후한서(後漢書)》·《문수(文粹)》·《문선(文選)》·《고려역대사적(高麗歷代事迹)》·《신당서(新唐書)》·《신비집(神祕集)》·《책부원귀(冊府元龜)》 등의 책이었다.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3번째기사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하였다.































일제시대 국사박멸책(國史撲滅策)

 

출처 :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내다니엘 페퍼Nathaniel Peffer 저 1920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은 '상해 영문대륙보'의 기자 내다니엘 페퍼(1890-1964)가 1919년 가을 한국에 파견돼 약 한 달간 체제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실상을 확인한 뒤 일제의 간교한 식민정책과 일제의 총부리에 맞서 대한독립을 외쳤던 우리 조상들의 용기와 투쟁을 생생하게 전한 기록이다.





그중에 국사박멸책이라는 부분을 일부 발췌하였다.





국사박멸책 國史撲滅策

 

한국인 교육의 목적은 국민성을 함양함에 있다 한다. 그것도 표면적으로 보면 매우 훌륭한 이상이다. 그러나 사실은 소위 국민성이라는 것은 일본 국민성을 말함이다. 이는 결코 한국인에게 후일 자립에 필요한 능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통일적 정신과 애국심을 배양하려 함이 아니라 그 실상은 일본인의 충복을 만들고자 함이다.





현재 일본인이 교육방침을 실시하기 위하여 온갖 불법 무도한 행위를 자행하는 중이다. 또한 그들의 실행방법은 실로 그 극렬하고 철저한 점에서 아마 그 상대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는 절대로 엄금이다.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일본인은 즉시 한국의 국사란 국사는 전부 압수하여 불태워버렸다.

한국의 문화를 한자 한 획이라도 기록한 문자는 철저히 수색하여 폐기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런 문자는 가지고만 있어도 그 소유자는 감옥에 수감됨을 면치 못하였다. 한국 국사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가 된다. 나도 달포 전에 자기 조국의 역사를 본 죄로 구타를 당한후 15일 이상 30일 이하의 구류를 당한 한국인을 목격하였다.


 

한국 어린이가 학습하는 유일한 국사라는 것은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일본 교과서 중에 삽입된 약간의 사적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사실은 전부가 교묘히 날조된 것뿐이니 이는 한국 어린이에게 조국을 멸시하는 사상과 함께 일본에 대하여는 찬양하고 경배하는 관념을 주입하기 위함이다.


한 예를 들면 소위 이 한국 국사라는 데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한국은 이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요, 일본의 후진국이다 ”“ 한일 양국 황제는 최초에는 형제였다”“한국은 예로부터 일본의 보호국이요 일한합병은 한국의 일반적 민의에 의한 것이다” 등등





이처럼 일본은 모든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전하여 자기네의 위엄을 뽐내려 한다. 또한 그 내용뿐만 아니라 분량으로 보아도 총독부의 소위 한국사라는 것은 보잘 것 없다. 그러므로 이름은 한국사나 사실은 일본식으로 날조해낸 일본사에 불과하다. 이 소위 국사에 의하면 전 세계는 모두 일본의 후예요 또 비록 일시적으로 각각 분리되어있다 하여도 모두 만민의 아버지인 일본 천황폐하의 슬하에 귀의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하였다. 이것이 소위 세계사라는 것이다.

 





 

또 소위 지리 교과서라는 것도 역시 이 모양이다. 이 역시 일본 지리에서 몇 부분 뽑아낸 날조된 지리다. 이에 붙인 소위 지도라는 것을 보면 실로 괴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는 관공립학교는 물론 사립학교, 교회학교에 이르기까지도 강제로 사용케 한다. 그리고 더욱 그 교육방침이 철저한 것은 역사 지리교사는 절대로 일본인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일본은 이 교육방침은 완전히 미국 전도국의 기부금으로 유지해가는 경성 연희전문학교에까지도 적용한다. 또한 비단 역사와 지리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신사상을 고취할 만한 시사는 한국학생은 감히 근접도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만 연방 돌아오는 일본 경축일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실은 문맹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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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3 [중국] 중미 패권관련된 다큐하나 찾고 있습니다 (6) 하하하 05-08 1653
4982 [기타] 공자(孔子)의 어록들.TXT (23) 샤를마뉴 06-25 1653
4981 [북한] 임란직전 vs 2017 (11) 전략설계 09-12 1653
4980 [중국] 서양이 바라본 서안 피라미드, 마운드 (5) 도배시러 11-05 1653
4979 [기타] 일본이 위조한 발해유물 (5) 인류제국 11-22 1653
4978 [한국사] 재야사학자 一道安士의 저서, <삼한사의 재조명> (1) 지수신 06-10 1653
4977 [기타] 말갈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seharu77777 06-09 1652
4976 [한국사] 러일전쟁 이긴 일본 찬양했는데 식민지 조선은 ‘타… (5) 히스토리2 05-07 1652
4975 [기타] 시장주의 자들의 망상. (5) 철부지 02-13 1652
4974 [기타] (질문) 유명 역사 블로거 잡학다식 초록불님에 대해 (4) 환빠식민빠 06-06 1652
4973 [한국사] 삼국 통일 물타기,그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의도 (2) 환빠식민빠 11-06 1652
4972 [한국사] 아래응용 시마즈 병력계산.jpg (1) 젤리팝 05-01 1652
4971 [한국사] 고려라는 나라가 참 원나라만 아니었으면 (7) 강철백제 08-29 1652
4970 [한국사] 한반도 한사군이 불가능한 아주 간단한 근거 (18) 밥밥c 12-24 1652
4969 [한국사] 현 요하 물줄기를 착각했네요 (11) 감방친구 05-01 1652
4968 [다문화] 법 - 근무지에 통고 없이 불체자 단속 안되! (6) 내셔널헬쓰 03-13 1651
4967 [기타]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 (8) 츄리닝 02-08 1651
4966 [몽골] 속편)가생이 머시기들...... (10) 성시리 11-03 1651
4965 [일본] 방송 예고 ! 광개토대왕은 일본 열도를 정벌했는가? 풍림화산투 08-14 1651
4964 [한국사] 바다에서의 거리 감각과 고구려 강역 (12) 감방친구 03-30 1651
4963 [기타] 현대 중국 학자들은 예맥족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하… (2) 관심병자 10-29 1651
4962 [중국] 헝가리의 타민족선호도조사 (6) 투후 06-29 1650
4961 [다문화] 영국의 다문화 (3) 모름 03-04 1650
4960 [기타] 고구려 백제 질문요 (6) 센스 03-06 1650
4959 [기타] 증산도의 가르침... (1) 마라도 12-24 1650
4958 [한국사] 밑에 왕후장상님이 올린 글이네요. (2) 아날로그 06-22 1650
4957 [기타] 일본과 중국의 개화 시절 옷에 관한 우스운 일화 (1) 고이왕 08-12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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