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및 전방후원분에 대한 정의>
전방후원분은 불교의 영향으로 사찰이 설치되기 이전인, 4~5세기 고대 일본의 종교적 무덤 양식이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대륙계 도래인이 일본에 정착한 야요이 시대에 원시적 주구묘의 형태로 발생하여, 일본의 고훈 시대(古墳時代)에 특히 번창했으며 간사이와 규슈 지역에 수십 개의 전방후원분이 세워지다가, 나라 시대 이후 점점 사라졌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앞은 사다리꼴의 네모형, 뒷부분은 원형으로 열쇠 구멍 모양을 하고 있다. 장고형 무덤이라고도 한다.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가장 큰 무덤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최상단에 위치한 오사카 부 사카이 시 다이센 고분(大仙陵古墳)이 그것으로, 일본 내에서는 '닌토쿠천황'의 릉으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적으로 따져도 a)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b)레드 피라미드, c)진시황릉 등과 함께 얼마 없는 대규모의 무덤이다.
직경이 무려 840m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의 기술력을 따져보면 짓는 데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카이 시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해당 고분이 약 5세기경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므로, 이런 거대 고분 문화를 통해 다이카 개신과 무사 계급의 발전 이전, 야마토 정권의 일시적 왕권 강화를 연역할 수 있다.
닌토쿠 천황릉
경상도는 장고형 무덤인줄 알았으나, 아닌걸로 나와 현재 위의 지도는 수정되어야 한다.
전방후원분은 규슈와 간사이 지역 이외에도, 홋카이도나 도호쿠 북부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남부 지역에서도 발굴되었다
<2. 본론 및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에 대한 고찰 & 임나일본부 부정>
1.한반도의 전방후원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지구의 전방후원분.
예전부터 일본의 고유한 양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광주광역시 등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도 일부 발견되었고 발견되었을 당시 임나일본부설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의 이전 형태인 주구묘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일본의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유적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대처가 가능해 졌다.
2.전방후원분과 임라일본부와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학설동향 정리
지난 20년간 한국고고학계를 곤혹스럽게 만든 주제가 바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었다.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장구형 고분이라고도 하는 묘제. AD 3세기 무렵 나타난 일본의 대표적인 묘제였다. 그런데 이 묘제가 한반도 남쪽 영산강 유역에서 잇달아 발견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일본보다 200년 이상 늦은 AD 5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됐다는 것 이다.
이는 (a)모든 문화와 사람이 일방적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정설을 부정하는 셈이며 자칫하면 (b)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뜻했다. 원로고고학자들조차 “우리가 잘 모르니 공부 좀 한 다음에 (전방후원분을) 발굴하자”고 하며 매우 당황하게 만든 유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전방후원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제 옛날이든 지금이든 문화교류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한·일간 상호교류의 관점을 갖지 못했기에 침략사관에 의한 역사해석(일본)과 일방통행적인 문화전파(한국)라는 단선적인 주장만이 되풀이됐다는 반성이다.
1)전방 후원분에 대한 최근의 학술동향 정리
(1)백제용병 조성설: 최근 고려대에서 ‘고대 한·일 관계사의 새로운 조명’을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전방후원분은 왜계 백제 관련 무장집단이 조성한 고분”이라고 주장했다.백제는 475년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남천했다. 그러나 궤멸당하다시피 한 백제의 통치기구는 일시 마비됐고 자력으로는 남방(영산강 유역)을 통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왕권에 의해 각지에 파견된 왜계의 백제 관련 집단(백제의 왜계용병 집단)이 동원되어 토착세력을 견제·통치했다는 것이다. “백제는 마한 토착세력의 거점인 나주 반남지역을 현지 수장들을 통해 간접 지배하고, 그 주변을 외곽에서 포위하듯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들인 왜계세력을 배치하는 양면정책을 썼다”는 주장이다. 즉, “개로왕 피살직후인 479년 동성왕의 귀국때 왜인 500명이 호위했다는 일본서기 기록과 백제인 가운데 왜인·중국인·신라인이 있다는 수서의 기록은 왜계 백제인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임을 주장의 근거로 하고 있다.
(2)신진세력 부상설: 백제의 남하로 인해 영산강 중심세력이 와해되자, 그보다 하위세력들이 급부상했다. 그렇게 갑자기 떠오른 하위세력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치적인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 이다. 그런데 이 하위세력이 예전부터 일본과 정치적인 친연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지역의 토착 수장층들이 이런 일본묘제를 썼다는 것이다. “나주 신촌리 9호분에 일본계의 원통형 식륜(埴輪)이 무덤에 장식됐듯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과의 친연관계를 말해주는 증거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3)한반도 망명설: “야마토 정권의 통합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다른 지역, 즉 한반도로 망명했을 가능성이 많다”면서 “그 세력은 청동기시대부터 정치적 격변기에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던 한반도인으로 추정되며 귀향한 그들이 바로 전방후원분을 조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한반도 기원설: 학계에는 또한 “전방후원분의 원류는 한반도”라며 ‘한반도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들은 “일본학계의 연구방법론이 우리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예컨대 함평 만가촌의 무덤은 방형주구묘이며 AD 2세기쯤 조성된 만가촌 고분은 일본에서 유행한 전방후원분의 원류”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고대사 최대의 수수께끼인 전방후원분의 성격에 대해 연구자 각각의 주장은 다르다. 하지만 ‘전방후원분과 임나일본부설’을 연관시키는 데는 모두 반대한다. 다음은 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