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07 08:01
[한국사] 김씨 흉노족 설에 대한, 최근의 흐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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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는 흉노의 후예인가?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 B.C134~B.C86년)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는 소개된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는 유물로는 1796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명문이 소개되었다. 문무왕비문에 따르면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하늘에 제사지냄이 7대를 이어졌고 15대조인 성한왕이다.(秺侯祭天之胤傳七葉...15代祖星漢王)”라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한나라에서 투후(秺侯)라는 벼슬을 받았던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조상임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흉노의 후손이 어떻게 한반도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문무왕 비석일부
그러면 먼저, 문무왕이 선조라고 기록한, 김일제가 한나라로 가게 된 사연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나라 무제의 처조카인 장수 곽거병은 18살 때 위청의 부장으로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21살 때인 B.C 121년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다시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해 롱서(隴西)에서 흉노를 대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참고로 롱서는 진시황이 쌓은 진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산서성 서남단 황하가 꺾이는 지점이다. 이때 흉노 선우의 번왕이였던 휴도왕(休屠王)과 혼사왕(渾邪王)이 계속 한나라에게 패배하자, 선우가 그들을 송환해 죄를 물으려 했다. 혼사왕은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휴도왕에게 같이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의했다. 휴도왕이 이에 반대하자 혼사왕은 그를 살해하고는 혼자 투항하면서, 휴도왕의 부인과 두 아들을 한나라 장수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피살된 휴도왕의 장남이 바로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로 그때 나이 14살이었다.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는 처음에는 장안에 있는 마구간에서 말 키우는 노비로 있다가 일처리를 워낙 잘하다보니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마구간을 감독하는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라는 벼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 김일제는 ‘망하라’라는 자가, 한 무제를 암살하려는 것을 격투 끝에 막아낸 공으로 거기장군이 되고, 무제는 일제에게 김(金)씨 성을 하사했다. 김이란 금을 뜻하는데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냈기에 성을 김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써 김일제는 역사상 최초로 김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신라인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제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공주를 유혹하려하자, 김일제는 그 행동이 매우 불경하다고 생각해 자식을 죽이고는 한 무제에게 보고했다. 한 무제는 상심했지만 김일제의 충성심에 더욱 감동했고, 나중에 한 무제는 죽으면서 김일제 등 3명의 고명대신에게 어린 소제(昭帝)를 잘 보필해달라는 유지를 남긴다. 즉, 김일제가 한나라 조정의 핵심권력에 들어간 것이었다.
한나라 소제는 김일제가 병들어 죽기 직전 그를 투후(秺侯)에 임명했으며 자손들로 하여금 그 관작을 세습토록 했다. 김일제의 무덤은 한 무제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인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섬서성 흥평현(興平县)에 있다. 감숙성 무위시에는 김일제의 석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김씨 집안의 내력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김씨 부인은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가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자신이 살던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그녀의 묘비명에는 신라 김씨의 먼 조상이 소호금천의 후손으로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김씨들은 전한말, 친족인 왕망에게 협력을 했고, 신나라를 건국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이 신나라는 왕망 단 한명의 황제만을 남긴 체, 단명왕조로 끝나버렸고, 그래서 소호금천씨 김일제 일족은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구절이 ‘대당고김씨부인 비석’에 자세히 나와있다......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 대당고 김시부인 비석: 묘지명의 주인공은 함통(咸通) 5년(864) 5월29일에 32세로 사망한 재당 신라인 김공량의 딸 김씨 부인이며, 1954년 중국 산시성 시안시 동쪽 교외 곽가탄에서 출토됐다. 전서체로 3행에 걸쳐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라고 새긴 덮개돌(43.5×44㎝)과 23행에 최대 27자씩, 총 593자의 예서체 명문이 기록된 지석(46.5×45.5㎝)이 함께 발견돼 현재 시안의 비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김씨 부인은 ‘구당서’ ‘신당서’ ‘책부원귀’ 등 중국 사서들에 신라인으로 기록된 김충의의 손녀이자 김공량의 딸이다. 김충의 부자는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하며 화가이자 기술자로 이름을 날렸다. 권 교수는 “당시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인이 많았는데 이번 묘지명은 재당 신라인의 유일한 실물 묘지명”이라며 “신라인들이 중국에 머물면서도 성씨와 신라인의 정체성을 지녔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내용만 보면, 완전히 딱 들어맞아 보인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문무왕이 직접 본인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 밝혔다 2.신라라는 국호가 김씨일족이 충성했던 왕망이 세운 ‘신나라’에서 온 국호이며, 신나라가 널리 퍼지라는 의미이다. 3.신라 초기에 발견된 페르시아식 금제 칼과 마구를 비롯한 말과 관련된 유적들이 발견되었는 데, 흉노족들이 서방과 오가면서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한다. 4.신라 마립간 세력의 대표적인 묘제로 손꼽히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역시 스키타이 및 쿠르간 등 북방 민족의 묘제와 비슷한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특히 시기적으로 최초의 김씨 등장은 1세기경(김알지세력), 흉노의 흔적이 라고 주장하는 돌무 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등장은 4세기경으로 맞지 않다는 말이 있지만, 신라의 첫 김씨 왕 미추왕의 재위기간은 3세기 말(262~284) 이므로, 당연히 김씨의 흉노식 왕릉은 4세기경에 등 장할 수 밖 에 없으므로 이것은 반박 근거로는 불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5.황당한 이야기 지만, 훈족의 아틸라왕과 신라의 아달랴왕의 이름이 유사한 것도 증거로 제 시되고, 김알지의 알지가 묵돌선우의 비첩에서 유래된 설까지 있다(하두 황당해서 적고 싶지 도 않다) 그러나 반박도 만만치 않다
1.김일제를 시조로 들고 있는 비문에 대해서도, 신라는 역사적으로 조상세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자신들을 석가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등) 특히, 김일제는 이민족 출신으로 중국에서 황제를 구한 영웅으로 등극한 입지 전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우연히 성씨도 김씨인 덕분에 신라의 김씨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금천(金天)이라는 명칭에서 김씨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즉, 신라 왕실에서 중국과의 관계도 염두에 두면서(일제는 아무튼 충신이니) 적절한 숭조사업 대상을 물색하다가 김씨를 연상시키는 김일제 를 조상이라고 꾸며낸 것이라는 것이다. (고려의 왕씨도 당나라의 숙종의 후손이라 주장했다) 2.묘제의 유사성을 통한 북방민족 계통이라는 주장은, 스키타이의 무덤인 쿠르 간 과 신라의 돌무지 덧널무덤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인데, 고고학적으로 묘제 는 매우 보수적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쿠르간과 신 라의 무덤은 등장시기에서 워낙 큰 차이가 있으며, 쿠르간과 돌무지 덧널무덤 이 완전히 동일한 형태의 무덤도 아니다. 또한 돌무지 덧널무덤에 부장된 유물은 스키타이 뿐만 아니라 백제, 가야계와 비슷한 유물 이 다수 발견되며, 오히려 백제나 가야계의 유물이 스키타이의 유물과 비슷한 면모도 보이 는 등 신라가 스키타이와 관계 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현재의 강단은 신라의 돌무지 덧널무덤을 자생적인 무덤 형식으로 보며, 쿠르간과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로 본다(매우 강단스러운 해석이 아닐 수 없다)
3.그리고 신채호 선생님은 백제무왕 때, 신라와 백제의 전쟁을 선화공주의 사위 인 무왕의 ‘왕 위계승권 전쟁’이라 보고 계신데, 이 때문에 신라가 백제계와 피를 공유했다는 것을 부인하 기 위해 이 김일제 설화를 만들어 냈다는 의견도 있다. 무엇이 정답이 되었건, 역사에 하나의 물줄기, 단일민족 그리고 우리만의 상대적 우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이 사건을 접했을 때, 너무나 놀랬고 또한 선비족과 흉노족이 구분을 못하여, 모용선비가 고구령 패해 신라로 내려왔다, 기마민족설이 증명되었다 난리가 났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이 기사를 보니, 새롭기 보단 이제 지나간 옛 추억같은 느낌마저 든다. 무엇이 진실이든 나만, 우리만 존재하는 역사는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결론이 않나고 있구나 하는 아쉬움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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