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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8 08:22
[한국사] 삼별초, 오키나와로 가서 유구국을 세웠을까?(최근의 역사동향)
 글쓴이 : history2
조회 : 2,118  

삼별초는, 최씨무신 정권의 가신 집단으로, 국내 빨치산, 혹은 게릴라의 원조라고도 이야기 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들이 난을 일으킨 것은 민중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고려를 위한 것도 아닌, 자기 자신들의 기득원을 지키기 위한 난이었다 생각을 한다(물론 이 의견에 꼭 동의를 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난의 결과 역시 고려인민의 고통만 가중시켰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삼별초 진출 상상도.JPG

 

삼별초, 그들은 1260년 원나라의 압력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조정에 맞서, '승화후 온(친원파 홍다구에 의해 진도에서 죽임을 당함)'을 추대하여 진도(배중손)로, 또, 제주도(김통정)로 옮겨가며 3년간 전투를 펼쳤다

처절한 대몽골 항쟁을 거듭했지만, <고려사> 등의 사서는 배중손이 이끄는 진도의 삼별초군이 1년여 뒤인 1271년 쳐들어온 고려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 진압됐고, 탐라로 도망친 김통정의 잔여세력도 2년 뒤 소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삼별초가 탐라민의 지지를 받은 세력은 아니었다, 탐라민은 좌도지관과 고려정부 관리의 지휘아래, 환해장성을 쌓으며 삼별초에게 저항하였다. 아무튼 진도와 탐라 그리고 남해안을 점령한 그들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 동맹을 꾀하기도 하고, 또 남해안의 조운로를 장악하여, 고려재정을 위협하고 약탈을 단행하였다--하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고려인민들이었다)

 

기록대로라면, 삼별초는 그 뒤 완전히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사서의 삼별초 멸망 기록에 정면으로 의문을 던지는 유물들이 발굴됐다.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탐라와 유구왕국'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실은, 오키나와에서 빌려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이 박물관이 소장한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용장성 출토 수막새(왼쪽)과 오키나와 수막새(오른쪽).jpg
                    용장성과 오키나와 출토 기와의 모습 

오키나와를 지배한 옛 유구(류큐)왕국의 수도 슈리성과 우라소에라는 곳에서 나온 기와들은 막새의 한가운데 둥근 씨방을 두고 주위로 아홉 개의 연꽃잎을 돋을새김하고, 다시 바깥에 연속점무늬(연주문)로 테두리를 두른 고려계 기와였다.

용장성의 기와도 연꽃잎, 연주문 무늬 등의 배치가 똑같으나 다만 꽃잎 수가 여덟 개(팔엽연화문)로 하나 적을 뿐이다.

용장성은,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몽골제국과 항전하기 위해 진도에 쌓은 천혜의 요새다. 이곳의 건물터 기와가, 왜 수천 리 건너 남쪽의 이국땅 섬 곳곳에서 무더기로 나온 것일까.

삼별초 군사들이 망망대해를 넘어 오키나와까지 흘러들어간 것이라 믿을 수 밖에 없는 유물들이었다.

오키나와의 아사토 쓰쓰무(오키나와 현립예술대 교수), 용장성 기와를 본 후 매우 당황해 했다오키나와에서 나온 고려계 기와들은, 13세기 삼별초 세력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그는 단언했다.

오키나와 기와와 모양이 비슷한 비교품을 찾으려고 소장품을 뒤졌다가 거둔 뜻밖의 수확이었다.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우리에겐 생소해도,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700~800여 년 전의 고려계 기와들이 삼별초 세력의 것이라는 추정은 일본 역사계에서 새삼스러운 가설은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녔고 시기도 훨씬 앞서는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다. 현지 학자들은 수십 년째 이 기와를 만든 주체와 시기를 놓고 논란을 계속해왔다.

 과정에서 가장 주목된 유물이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씨가 새겨진 암키와다. 사다리꼴 모양에 물고기 뼈대 모양 무늬가 함께 새겨진 이 대형 기와의 명문은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이 기와 명문에 고려 장인임을 떳떳이 알린 것으로 봐서 고려 장인의 정치적 지위와 긍지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키나와 고려기와.jpg
                                  고려문 기와

문제는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인지다. 고려 장인이 언제 오키나와에 진출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정황상 기와의 계유년에 맞출 수 있는 고려의 연대는 1153, 1273, 1333, 1393년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삼별초가 멸망한 1273년과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3년이다.

1273년설은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 선단들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추정이다.

탐라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 정도이기 때문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1393년설이 유력했다. 고려사를 보면 오키나와의 첫 교류가 고려 우왕 때인 1389년 유구국 사절을 파견한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멸망 직전 공식 교류가 시작됐다고 봐야 하므로 양질의 고려 기와를 만드는 고급 기술자 파견은 이런 공식 교류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의 공식 기술자 파견이나 고려 멸망 뒤 상당수 유민이 정착하면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논지다.

하지만 진도 용장성 수막새 기와의 등장은 1273년설에 더 힘을 실어준다.

오키나와 출토 수막새가 용장성터의 것과 같은 반면, 중국이나 일본 본토계 기와에서는 이런 유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별초 세력 일부가 곧장 진도에서 오키나와로 흘러들어갈 수 있을까.


슈리성.jpg


 

동서로 1km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km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도항 준비를 치밀하게 한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 이동할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류큐열도 사이 무수한 표류민 송환 기록이 실려 있고, 드물게 진도에 표류해온 유구국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유구국 사절에 넘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구스쿠.jpg
                                 치가 있는 구스쿠(고려계 성곽)

구스쿠2.jpg
              전형적인 구스쿠(고려계 성곽은 아님), 유네스코 세계유산

흥미로운 것은 삼별초가 역사에서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인들은 지역 세력가들이 '구스쿠'라는 큰 성을 쌓고 경쟁하면서(구스쿠  ぐすく, 御城) 또는 단순히 스쿠(すく, 城)는 오키나와어에서 "성"또는 "요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인구도 적은 조그만 섬에서 곳곳에 거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점은 성 쌓는 기술인 축성술과 전쟁 기술에 능한 외부 세력의 조력 없이는 쉽지 않다는 추정이 가능하다삼별초의 오키나와 진출설은 그런 면에서 타당한 이론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한다.


오키나와 삼국시대의 지도. 근세 일본의 사상가인 하야시 시헤이가 도쿠카와 막부에 바친 지도다..jpg
유구국 삼국시대 고지도..삼별초가 영향을 주어 성립되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반론) 오키나와에서 나온 대천’(大天)이란 글자가 쓰인 다른 고려계 암수키와의 존재는 이러한 가설에 의문을 제기한다이 기와는 오키나와는 물론 제주도의 제주목 관아터 등에서도 똑같은 것들이 나왔다. 제주목이 조선초의 시설임을 감안하면 시기를 14세기 말에서 15세기까지도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 결국 두 가지 연대에 출토 기와의 시기가 걸칠 수 있어, 좀 더 정밀한 고고학적 문헌 검토가 필요한 셈이다어쨌든 오키나와에서 삼별초의 흔적을 좀 더 발굴할 수 있다면, 삼별초 군사들은 몽골의 탄압에 분노와 한을 품고서, 진도 혹은 제주에서 오키나와로 갔을 것 같다는 가설은 맞을 수 도 있을 것이다.


P/S: 유구왕국의 역사 시대는 800여 년 전부터다. 7세기 중국의 <수서>에 유구가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그러나 여기서 유구는 대만의 백제지방 담로일 수 있다), 사서에 나오는 왕조의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기와 제작 기술, 삼별초 역사는 물론 당시 오키나와의 사회현실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지, 민족주의적 화두로 접근하면 안 될 것이다.

다만, 홍길동의 율도국이나, 이상향으로 여겨지는 파랑도가 어저면 유구를 칭하는 말일수 도 있겠다라는 생각은 여전히 든다.

아무튼 한을 품은 자들은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끝까지 저항을 한 발해인의 정안국과 그 외 후발해국들의 한도 문득 생각이 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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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8-03-08 11:30
   
오키나와 여행에서는 거의 필수코스인 슈리성을 둘러본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중국풍+일본풍이 혼재된 느낌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외형은 일본풍인데, 여타 일본성들과는 다르게 정문-정전에 적색-황금색 도색을 입힌 경우처럼
중국풍 또한 적지않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대마도의 옛 건축물들이 한국풍+일본풍이 혼재된 것과 같이....

슈리성 또한 여러번의 화재로 인한 소실로 인해 여러 차례의 재건과정을 거쳤고...
마지막으로는 2차대전 막바지 오키나와 전투에서 소실된 것을 1990년대 복원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복원하기 이전 슈리성터에서 고려기와들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예전 슈리성에는 고려-조선의 건축양식도 상당히 적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소실과 복원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해당 시기는 또한 유구(오키나와)에 대한 고려-조선의 영향력이 소퇴하고
사쓰마를 포함한 일본의 영향력이 심화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여러차례 재건되는 과정에서 고려-조선의
건축양식은 점차 사라졌을 것입니다.
.
.
삼별초의 유구진출은 어느정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조선시기를 통틀어 탐라인(제주도인)들의 유구(오키나와)지역으로의 표류 및 송환이
여러차례 이루어졌던 점들을 감안하면.... 삼별초들이 진도-제주도에서 패하고 일부잔여세력이
해류를 이용해 유구지역까지 다다랐을 개연성은 충분하며....

유구(오키나와)의 사이즈 또는 인구가 예나 지금이나 제주도와 비교해서도 확연한 차이는 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불과 수 백명 단위의 삼별초 잔여세력이라 가정하더라도.... 유구에 적지않은 족적을 남겼을 것으로 봅니다.
(오키나와 열도에 산재한 여러 섬들을 합치면 제주도보다 면적-인구에서 상대적으로 2배 이상 크지만
수도 나하가 있는 오키나와 본섬은 제주도보다 오히려 약간 작은 사이즈로 알고 있습니다)

제주도 또한 수 백명~1,000명 단위의 왜구들의 침입에는 본토에 구원병-증원병을 요청했을 정도로
자력으로 그만한 규모의 외부인들을 물리치기가 쉽지않을 정도의 사이즈였기 때문에....

삼별초 구성원들이 원래 고려에서 상대적으로 엘리트그룹에 속한데다가, 무력적인 측면에서도
몽골군-고려정부군과의 오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상당했을 것이니

비록 개인적으로는 삼별초 잔여세력들이 당시 유구왕국의 정세를 주도적으로 교체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부정적으로 보지만....
적어도 용병-기술자로 활용되어 유구에 적지않은 족적을 남겼을 것이라는 견해에는 충분히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홍길동전의 율도국을 유구(오키나와)로 비정하는 것을 보고 문득 연상되는 것이....

실제역사에서 허균이 역모죄로 투옥될 당시를 전후하여 허균의 무리들이 퍼뜨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유구(오키나와)의 군사들이 남해안의 섬에 은거해 있고 이들이 장차 한양을 넘보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한양도성 일대에 널리 퍼져 당시 한양사람들이 불안해했고 심지어 여러 사람들이 피난갈 조짐까지 보였었던
사례가 떠오릅니다.....^^
가난한서민 18-03-08 11:57
   
하하..덕분에 흥미로운 사실들을 다시 되세기고 있어요
갔을지 안갔을지가 역시 궁금합니다. 토착민들과 함께 국가를 세웠다고하면 더욱 놀라울듯 합니다ㅎㅋ
하보나 18-04-2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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