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환단고기를 비판하는 분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구성하여 적었습니다. 즉 환단고기와 일본의 우익과의 관련성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여 올립니다.(이문영 글을 주로 인용함)
1) 흑룡회와 환단고기: 흑룡회의 뿌리는 천우협이라는 단체까지 올라간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천우협은 일본의 낭인단체로 동학농민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동학농민운동은 외세 배격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고 그 외세에 일본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데, 배격의 대상인 일본의 단체와 동학이 협력했다니 무슨 말인가? 그러나 천우협이 동학농민군을 지원하고자 조선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후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참여했다. 1901년 결성된 흑룡회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를 흑룡강까지 도달케 하자는 목적으로 단체 이름을 흑룡회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미 쓴 글(흑룡회 등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 낭인들은 단순 무뢰배가 아니라, 이론적 배경을 만들 학식을 가진 인간들이었다. 그럼 흑룡회의 사상적 토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들이 기초하고 있던 사상은 ‘동이·북적 문명론’과 ‘동일 혈통론’이었다. 이 이론에 근거해서 일본, 조선, 만주, 시베리아를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했다. 즉, 같은 황인종이라 해도 동이가 아닌 중국은 이 권역에서 제외되었다. 본래 동이족은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서역 지방에서 이주해 온 한족에 의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퉈왔다고 설명한다.
2) 흑룡회가 환단고기를 통해 하고 싶은 말: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바로 황제-치우의 탁록대전 이후 한족과 한민족이 허구한 날 싸웠다는 그들의 주장과 동일한 이야기 구조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중국 문명이 중동 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이론은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에 의해 중국 한족의 이름을 ‘한민족’으로 바꿔치기하여 되풀이되었다. 물론 당시 일제의 유사역사가들은 그 자리에 ‘일본’이라는 이름을 넣었다. 이들은 일본이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동이·북적 민족 중 가장 발전한 만큼, ‘고대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조선과 일본의 합방이 이들의 과제가 되었다. 이들은 아시아, 특히 동이족의 영토에 쳐들어오는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시베리아 등지에 많은 낭인들을 보내 정찰하게 했다. 이들의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실제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대러 전쟁은 아시아 평화를 위해 짊어진 수고로움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만들어진 친일단체가 바로 이용구의 ‘일진회’였다. 일진회는 흑룡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한일 간의 동등한 합방을 요청하는 척했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측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강제병합을 하였고, 곧바로 한국인 최대의 정치단체인 일진회를 해산시켜버렸다. 친일이건 뭐건 어떤 한국인 정치단체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용구도 죽으면서 자기가 속았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흑룡회의 이론은 결국 동이족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로 활용되었다. 흑룡회를 만들고 흑룡회의 이론을 창안한 우치다 료헤(內田良平)의 이론을 보자. 그는 아세아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의 옛 이름인 ‘위원(葦原)’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 아시아가 일본의 옛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환단고기』에 입각해 전 아시아가 환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유사역사가의 주장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그의 주장 중에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도 있다.
그들의 망언: “천지 이변 때문에 일본 본토와 대륙의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기에 이르고, 그 결과 아세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여 인류 진보의 선구가 되는 만주와 몽고에서 중앙아세아에 걸친 지대는 교통이 불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후도 한랭하게 되어 이에 세계적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그래서 우리 야마토 민족은 이때 그 본거지인 만몽의 주요 지역을 파괴당하고 남하하여 황하를 중심으로 해서 발전하기에 이르렀지만, 본토(일본)와의 연락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에 홀로 대륙에 남아 일본의 통치를 떠나 독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에는 결국 같은 야마토 민족이면서도 역사와 풍속을 달리하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중국 대륙에 자기들 종족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는 주장은 우리나라 역사가들도 흔히 하는 이야기다. -> 이문영이 대륙백제 등을 이야기하는 말인 듯
*주의: 우리 역사가들은 사서 특히 ' 남조 등 중국 정통 사서들'을 근거로 논리를 제시하지, 일본인들 처럼 상상력에 근거한 망상이 아니다(위서아닌 위서같은 정사라는 일뽕서기?)
이들 대륙에 남은 동이족은 한족과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옛 땅인 만주, 몽골로 쫓겨나게 된다. 따라서 일본과 만주, 몽골, 조선은 다 같은 혈통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선일체론이다. 이런 점을 우리나라 유사역사가들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이 종가이고 일본은 분가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1920년대 말 대공황을 만나면서 일본에는 파시즘이 일어난다. 파시즘 아래서 흑룡회의 이론은 더욱 기승을 떨치게 되었다. 만주사변과 같은 전쟁의 이면에는 대동이족의 영토를 찾겠다는 신념이 일정 부분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파시즘의 대두와 더불어 천황의 신격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팔굉일우의 대일본제국, 대아시아주의, 대동아공영론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등장에도 역시 이런 이론이 어느 정도 기여한 바 있다고 보겠다. 천황을 유교적 가부장 체제의 정점에 놓고 혈연공동체로서 국가를 건설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물론 우치다 료헤의 이론 같은 것은 그 황당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서 일본 내 주류 사상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은 파시즘 일본 내에서도 비주류 중의 비주류에 속해 있었다.
3) 환단고기와 대한민국: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면면히 살아남아 대한민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유사역사가들이 ‘피의 순수성’, ‘혈통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 일부는 국제결혼이 늘어나는 것이 한민족의 순수 혈통을 ‘더럽히려는’ 선진국들의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행히도 오늘날 유사역사학을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사역사학의 뿌리가 바로 이런 일본에서도 주류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상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동이’라고 되어 있는 종족은 다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한몽연합국가론이나 대쥬신벨트 건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 묘족이나 티베트도 우리 민족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유사역사가는 청이 우리 민족의 정통이고 우리는 곁가지라며 자기 정체성마저 상실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발상의 근원에 일본의 흑룡회가 있고, 또한 대동아공영론이 있었던 것이다.
4) 대동아공영권과 환단고기: 유사역사가들은 왜 이런 대동아공영론의 이론을 떠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들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인물들이 일제강점기에 그들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흑룡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 중 하나였던 최동은 그들의 이론에서 일본을 한국으로 바꾼 『조선상고민족사』를 내놓아 유사역사가의 이론적 기초를 만들었다. 이 이론은 일제강점기에 계속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학식 있는 인물들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고급 문관으로 근무했던 문정창은 이 이론에 깊이 경도되어 여러 권의 책을 내놓았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중동 지방의 문명에서 우리나라가 기원했다는 주장도 문정창이 내놓은 것이다. 그 이론은 20세기 초에 흑룡회에서 내놓았던 주장의 주어를 살짝 바꿔 놓은 것에 불과했다.
5) 이유립, 문정창 그리고 가지마 노보루: 환단고기를 내놓은 이유립은 친일 단체인 조선유교회에 있으면서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흑룡회의 이런 이론들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최동과 문정창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상들이 『환단고기』 안에 깊이 배어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일본 극우사가인 가지마 노보루는 『환단고기』가 자신들 극우사관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아보고 일본에 수입하여 소개했던 것이다. 가지마 노보루가 중동 지방에서 일본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가라는 점은 임승국의 『한단고기』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이유립
유사역사가들이 중동 지방이 일본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극우사가 아고우 키요히코(吾郷清彦) 등의 이론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본래 뿌리가 같기 때문에 그 이론을 보는 순간 친근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 안에서는 이런 극우사관은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이를 안타까워하는 유사역사가는 일본이 ‘대쥬신’의 정체성을 망각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이들의 정체성 안에는 이처럼 일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런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는 좋은 방법은 다른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그 덕분에 국내 역사학계는 친일파의 본산지라는 음해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다 (이문영 본인이 대 놓고 친일을 이야기 할 처지는 아닐텐데...이문영의 학설은 친일 + 동북공정-친중적임)
***소견*** 한국의 강단의 폐쇄성이, 오히려 '환단고기' 라는 초유의 베스트셀러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단고기로 인해, 소위 환빠라는 용어가 생겨나고 자신과 이견이 생기면 무조건 '환빠'로 매도하는 역사계의 현상이 나타난건, 이 환단고기 현상이 나타난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학의 부작용이 되버려 안타깝다. 또한 환단고기가 '5공 군사정부'의 '국풍' 즉 '신우익역사 정책'의 산물임은 틀림없다 생각이 든다.
문정창
ps)저는 이 문영의 환단고기 비판을 무조건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며, 특히 그가 가진 한국사관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입장임을 밝힙니다. 다만,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이러한 부분이 있슴도 알아야 한다는 개인적 생각에 의거하여 글을 적었습니다.
저는 이문영 자신도 폐쇄적인(제가 보기엔) * 실증사학(본인이 본인 스스로 정의하길)에 갇힌 또다른 모습의 유사 사학자 혹은 사학보수론자 라고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