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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6 07:29
[한국사] 한겨레21의 이덕일 죽이기를 위한 변명 (이덕일 씨의 주장 + 강단의 반론 + 조선일보 기사)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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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은 한 역사 토론회에서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이덕일 소장이 논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도를 하였다. 그것은 낙랑군이 현 "평양" 에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덕일씨를 거론한 기사였다.  


* 아직 교치에 대한 강단의 주장이 옳은지, 이덕일씨가 옳은지 완전한 판단이 난것은 아니지만,  이덕일씨를 위한 변명을 강단의 교치설에 대한 그의 반박글을 통해 적어본다. 

(문헌은 이덕일 우세, 유물은 여전히 강단 우세 but 둘 다 뚜렷한 유적(왕검성 궁성 및 성곽 혹은 낙랑의 치소)에 대한 근거는 없슴.....a) 유물은 상당수 위조존재, b) 강단이 제시한 유적은 대부분 위조-낙랑치소,장무이묘 등


1. 기사 발췌.   "이덕일 소장은 토론 상대자인 윤용구 박사의 

                   다음 지적으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한서>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것은 <한서>에 주를 붙인 거예요. …이건 <후한서>의 기록이 아니에요. 여기 주가 달려 있는… 괄호 친 건 다 ‘주’예요.” 
알고 보니 이덕일 소장이 ‘1차 사료’라고 자신만만하게 제시한 자료는 한나라 존속 시기에서 수백 년 지난 당나라 때 사람 안사고나 이현 등이 <한서>나 <후한서>에 붙인 ‘주석’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1차 사료’도 아니었다.

...한겨레21 기사처럼 이덕일의 한사군 요동설은 과연 그의 망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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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덕일씨의 강단에 대한 항변 


 한사군, 특히 낙랑군이 식민사학계의 주장처럼 평양 일대가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사료가 수십 개 이상 공개되었으므로 이 사료들이 말하는 사실에 대해 무언가 설명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교군설(僑郡說)’이다. 교군설(일명 교치설)이란 간단하게 말해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요동으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강단사학계는 한사군의 중심이라는 낙랑군 조선현의 자리를 평양 남쪽의 대동면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중국 사료들은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자리를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이라고 말한다. 교치는 평양 대동면에 살던 ‘조선’이 하북성 노룡현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지금은 하북성 노룡현에 살고 있지만 과거에는 평양 대동면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북성 노룡현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는 중국 사료는 많지만 그 전에 평양 대동면에 살았다는 사료는 없다는 사실이다. 


교치설 자체가 사료로는 입증할 수 없는 공상이란 뜻이다. 그러나 식민사학계는 사료에 낙랑군이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 진위를 살펴보자.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 권88, 진기(晋紀) 10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건흥 원년(313) 4월 요동 사람 장통(張統)은 낙랑(樂浪)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 모용외(慕容廆)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요 동사람 장통이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 미천왕과 싸웠는데,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의 설득을 들은 장통은 1000가구의 백성을 데리고 선비족 모용씨에게 귀부했다는 것이다. 선비족 모용외는 창려(昌黎) 극성(棘城) 사람으로 전연(前燕)의 건국자 모용황의 부친이다. 


그러나 이 사료는 


첫째, 고구려 미천왕 때 장통이 점거했다는 낙랑군과 대방군은 평안남도나 황해도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미천왕 때라면 고구려가 이미 요동반도는 물론 그 서쪽 상당 부분까지 차지한 상태였다.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장통이 1000가구를 거느리고 자국 영토를 지나 지금의 베이징 부근인 고대 요동에서 활동하던 선비족 모용씨에게 가는 것을 눈 뜨고 구경하고 있었겠는가? 


둘째, 1000가구의 낙랑인이 이주한 것을 가지고 낙랑군 전체가 이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낙랑군의 인구에 대해 ‘한서지리지’ 낙랑군 조는 “6만2812호에 40만6748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략 한 가구의 구성원이 7명 정도라는 이야기다. 즉, 장통이 거느리고 간 1000가구는 7000명 정도라는 뜻이다.*40만7000여 명의 낙랑인 중에 7000명이 이주한 것을 낙랑군 전체가 이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나머지 40만 명은 어디로 갔나?


식민사학의 논리라는 것은 이처럼 조금만 들여다보면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 장통이 점거했다는 낙랑, 대방은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 고구려가 단군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서쪽에 있던 낙랑, 대방을 공격하자 장통이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1000가구만 거느리고 고대 요동의 모용씨에게 귀부한 것이다. 


나머지 낙랑인들은 계속해서 하북성 낙랑지역에 살고 있었다. 낙랑군 1000가구가 귀부하자 모용외는 낙랑군이란 명칭을 부여해준 것에 불과하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던 적이 없고, 따라서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이주한 적도 없다. 중국의 어느 사료에도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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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단의 망상지도 


3. 강단의 이덕일씨의 주장에 대한 반론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은 313년 이후의 자료들이다그런데 313년 이후 낙랑군은 요서로 교치되어 졌다그러니 313년 이후의 낙랑군에 대한 사료들은 당연히 낙랑군이 요서에 있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이덕일은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각종 사료에 등장하는데 식민 사학계는 313년에 낙랑군이 멸망했다고 주장한다고 비웃고 있다하지만 사학계가 313년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의 낙랑군만을 가리킬 뿐이다. 313년이후 낙랑군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이덕일의 주장은 313년에 한반도의 낙랑군이 축출된 후 요서 지방에 새로운 낙랑군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는 알고도 우길수도 무식한 주장일 뿐이다낙랑군이 313년에 미천왕이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낙랑군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하지만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존재했다물론 이 낙랑군은 평양에 있던 그 낙랑군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멸망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에게로 갔다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새로 만들었다(이른바 교치).

이 요서의 낙랑군은 이름만 있는 낙랑군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가 존재하는 실재하는 낙랑군이었다그후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고 이때쯤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520년 대에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었다는 것이다.


4. 참고. 같은 토론회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 발췌


고조선 멸망(BC 108) 후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은 어디에 있었나? 상고사(上古史)의 쟁점 중 하나인 낙랑군 등의 위치를 놓고 '한반도설'을 주장하는 주류 학계와 '요서(遼西)'을 주장하는 비주류 학계가 격돌했다.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상고사토론회는 '한반도설' 입장에 선 공석구 한밭대 교수,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부장과 '요서설' 입장에 선 복기대 인하대 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각각 발표하고 토론을 벌였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이주영)가 주최한 이날 토론회는 대립하는 두 학설의 학자들이 맞대결을 펼쳐 시작 전부터 관심거리였다. 또 정부가 새로 만드는 국정 한국사 교과서에 상고사와 고대사 서술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후라 더 주목을 끌었다.

공세적 입장인 '요서설' 학자들은 중국 역사서들을 주된 논거로 삼았다. 고조선 연구자인 복기대 교수는 "그동안의 낙랑군 연구는 문헌 사료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고학적 발굴에 너무 의존했다""중국 정사(正史)들에 중국사의 일부로 기록돼 있는 낙랑군의 위치는 하북성 북부에서 요령성 서남부였다"고 주장했다. 이덕일 소장은 "후대의 기록이나 연구보다는 고조선 멸망 후 상황을 보여주는 당대의 기록이 중요하다""낙랑군·대방군이 존재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중국 고대 사서는 그 위치를 고대 요동(遼東)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낙랑군의 중심지인 조선현은 하북성 노룡현이었다"고 주장했다.

방어적 입장인 '한반도설' 학자들은 이들 중국 역사서의 사료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공석구 교수는 '요서설'의 근거로 인용되는 중국 사서들이 후대에 편찬된 것이고 그 원조에 해당하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낙랑 수성현은 갈석산이 있고 장성(長城)이 시작된 곳"이라는 기사는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돼 요서로 교치(僑置·이름만 옮김)된 이후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조선 연구자인 윤용구 박사는 "한사군의 위치는 조선 후기에 추정 가능한 모든 논리가 이미 제기됐고, 1920~30년대 점제현신사비·대방태수묘 등 고고학적 발굴과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통해 대강의 결론이 내려졌다""더구나 해방 이후 평양 일대에서 수많은 낙랑 유적·유물이 나와 낙랑군의 한반도 서북 설치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양측은 낙랑군 위치 문제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서도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복기대 교수는 "동북아에서 역사는 안보의 시작인데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덕일 소장은 "중국과 역사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굳이 왜 우리에게 불리한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석구 교수는 "정치적 이유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사료만 택하면 안 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용구 박사는 "낙랑군은 고조선 이래의 토착 세력이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고 낙랑문화는 고조선 문화의 기반 위에 한문물이 융합된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17/2015111700090.html


ps.....삼바님이 주신글 

한서지리지 요동군 험독현 
험독현(險瀆縣),[4] 
[4]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王) 위만이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험독현(此)은 자연적으로(自) 올바른(是) 험독이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 
주석문의 시대 
應劭==후한(동한)시대 인물/ 험독현에 처음 주석을 단 인물(AD 200년 전후) 
臣瓉==서진(AD 265~316)대의 인물 
顔師古==당나라 초기 인물(AD 581~645) 
------------------------------------------------- 
험독현 주석에 나오는 3인은 안사고만 후대의 인물이고, 응소와 신찬은 낙랑군 존재 당시의 인물입니다. 비록 주석이라할지라도, 1차 사료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윤용구의 한마디로 한순간에 무녀졌다고 하는 소리는 사실과 다릅니다. 
원문 제시하면서 그안에 주석까지 소개한걸 트집잡아 후대의 인물만 주석을 단것처럼 말한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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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중인 평양출토 낙랑향로(위조품으로 생각됨)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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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 18-03-26 08:43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대무신 열제 20년(단기 2370,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삼국사기에 나오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설화는

호동(好童)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에게서 난 소생이다. 왕은 그를 심히 사랑하여 호동(好童)이라 이름하였다.  대무신왕 15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를 유람하였는데, 낙랑의 왕 최리(崔理)가 여기 나왔다가 호동을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그대야말로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인가?"며 호동을 데리고 함께 돌아가 사위를 삼았다.


 (삼국사기) A.D 32년 그 뒤, 호동이 고구려에 돌아와 낙랑(樂浪)에 있는 아내 최씨녀(崔氏女)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 무구(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서 맞아들이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으리라." 하였다.



이유는 낙랑에는 옛날부터 신기한 고각이 있어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지라, 그로써 침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과연 최리의 딸(낙랑공주)은 몰래 무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그 고각을 찢어 버리고 호동이게 그 사실을 알렸다. 호동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다.


평양 일대에 있다는 낙랑유적은 무엇이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전설에 나오는 낙랑국은 무엇인가?.

평양일대에 남아 있는 ‘낙랑’이라는 이름 때문에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 당연하다.


과거 국극단이나 학예회에서 공연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호동왕자의 나라인 고구려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낙랑공주의 나라인 낙랑국(樂浪國)에 대해서는 시원스런 해명을 듣지 못한 채 역사를 배워왔다.


낙랑국은 서기 32년을 전후해서 지금의 평양자리에 실존했었다. 왕의 이름은 최리(崔理)였다. 이 시기는 낙랑군(樂浪郡)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존속되던 때로 배웠다. 이렇게 되면 평양에는 ‘낙랑국’이라는 독립국과 ‘낙랑군’이라는 식민지가 동시에 있었던 것이 된다.



4군현이 BC 108년에 설치되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는 AD 313년까지 장장 421년간이나 우리나라 북부에 버티고 있었다면, 낙랑국이라는 독립국이 가능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최리의 낙랑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못하고 하나의 전설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허위를 정당화 하다보니 내용이 사리(事理)에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최리의 낙랑국은 AD 37년에 고구려로 통합되지만, 이 최리의 낙랑국은 BC 169년에 번조선의 유민 최숭(崔崇)이  북부여(北夫餘) 왕실(海城:요동반도 북부)에 곡식 300가마를 바친 기록이 나온다. 또 BC 195년에는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땅으로 옮긴 기록이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나온다.
 

이때가 연나라 사람 위만이 번조선의 준왕의 은혜를 배신하여(BC 194) 준왕이 쫒겨나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으로 도망갈 때이다. 우리 고조선의 말기, 북부여 때이다.


시대상으로 볼 때 북중국의 낙랑지역이나 기준왕의 번조선지역에 살던 최씨 일족이 위만의 학정을 피하여 바다 건너 현재의 평양지역으로 옮겨와서 낙랑국의 유래가 된 것이다.


이때는 소위 한군현을 설치하려던(생각만 했음) 87년 전이다.

한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기준이 BC 194년에 쫓겨났는데, 최숭은 그보다 1년 전에 보물을 싣고 마한으로 갔다. 그래서 낙랑이라는 고향의 이름을 따와서 살게 된 것이며, 그때 마한지역은 고조선 말기, 고구려의 태동기로서 통치력이 미약하던 시대적 상황이었던 만큼 평양지역에 낙랑(국)이라는 최씨들의 영지(領地)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번조선의 낙랑군과 최숭의 낙랑국

낙랑은 위만이 번조선을 찬탈해 다스렸던 왕험성王儉城(번조선 말기의 수도로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 지역이다.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은 고조선 삼한 중 번한番韓(번조선) 유민 최숭이 세운 ‘최씨 낙랑국’이며 낙랑군이 아니다.



한무제 당시의 사관이면서 전장에도 참여했었던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는 한사군이 없으며 150여년 후 반고의 ‘한서’에 처음 등장한다.) 실존하였다 하더라도 그 위치가 우리나라의 평양부근이 아니다.




이병도박사는 타임머쉰을 탔었던지 아님 축지법을 썼는지 몰라도 낙랑군과 낙랑국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그의 스승 이나바 이와고치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한걸음 더하여 황해도 수안이 낙랑군지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근거로 동북공정을 추진하던 중국당국은 얼사 좋다며 그동안 발해만 갈석산에 있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한반도 황해도 수안으로 끌어놓고 말았다.



‘고조선은 신화이고 고조선의 역사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한사군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매한 조선민족이 선진 민족인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정체론(停滯論)’에 입각한 식민사관에 벗어나지 못한 역사학자들의 잘못된 역사관과 교육이 우리의 역사를 남에게 팔아넘기고 있는 셈이다.
신수무량 18-03-26 09:31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저 지도..'강단의 망상지도 (가짜사학집단의 망상지도)' 이군요..

"고조선 연구자인 복기대 교수는 "그동안의 낙랑군 연구는 문헌 사료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고학적 발굴에 너무 의존했다"며 "중국 정사(正史)들에 중국사의 일부로 기록돼 있는 낙랑군의 위치는 하북성 북부에서 요령성 서남부였다"고 주장했다."

역사를 역사로(사서로부터) 증명을 해야는데...
지나애들이 기록한 사서들에 한반도에 낙랑이 있었다는 사서가 있다면 그걸로 1차 증명하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그런데 기록에도 없는 것을 교치니 뭐니 하면서 끝까지 다른 주장을 하는 걸까요? (그것도 일제 강점기 왜의 관변(가짜)사학자들이 주장한 바를 한 발자국도 발전하지 못한...)
딸기파이 18-03-26 09:50
   
     
신수무량 18-03-26 10:59
   
나무위키에서 역사관련내용은 (근거로서의 가치가 없는) 그냥 잡글로 취급하면 됩니다..
자신들 입맛에 맞게 아무나 쓰고 고치고  검증없는 내용들입니다.
history2 18-03-26 09:53
   
딸기파이 님 감사합니다...저도 역사에 대한 시각이 이덕일 님과 일치되는 부분보다는, 아니 상충되는 부분이 많습니다..다만, 한겨레21의 기사가 너무 자극적이라 한번 접근해 보았습니다...이덕일 님의 주장이 합당한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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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9 [일본] 남선사관(임나)에 대한 일본학계의 흐름 정리 (2) history2 03-2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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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5 [한국사] 낙랑예관이라는 관청이 존재하였는가? (2) history2 03-26 753
4634 [한국사] 낙랑이 평양이 된 이유? (후한서 왕경전 한 구절) (29) history2 03-26 1397
4633 [기타] 발해가 한국사가 아니고 말갈 역사다? (13) kkuk1129 03-26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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