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3-27 18:41
[한국사] 낙랑군 유물의 연속성 2
 글쓴이 : 도배시러
조회 : 1,570  

>진서 지리지 평주 낙랑군 
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  3,700
朝鮮-周封箕子地。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鏤方 駟望

● 낙랑군 교치설의 자치통감 기록
辽东张统据乐浪、带方二郡,与高句丽王乙弗利相攻,连年不解。
乐浪王遵说统帅其民千馀家归廆,廆为之置乐浪郡,以统为太守,遵参军事。… 

 요동인 장통은 낙랑, 대방 두 군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면서 
해가 바뀌어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낙랑인 왕준의 설득으로 (장통이) 그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를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해 주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에게는 군사 관련 참모를 맡게 하였다.


>북위 영주 
樂良郡〈前漢武帝置,二漢、晉曰樂浪,後改,罷。525正光末復。治連城。〉領縣二, 
戶二百一十九 219  口一千八 1,008명
永洛〈正光末置。有鳥山。〉  帶方〈二漢屬,晉屬帶方,後罷。525正光末復屬。〉

> 북위 북평군 北平郡〈秦置。〉領縣2 戶四百三十 430  口一千八百三十六 1,836
朝鮮〈二漢、晉屬樂浪,後罷。432延和元年 徙朝鮮民 於肥如,復置,屬焉。〉 
한과 진때의 낙랑군 속현이며 후에 폐하였다. 432년 조선민을 비여로 옮겨와 다시 조선현을 설치했다.
(432년 북위가 북연의 화룡성 공격)
新昌〈前漢屬涿,後漢、晉屬遼東,後屬。有盧龍山。〉

> 북위, 동위
남영주 樂良郡〈537天平四年置。〉領縣一, 戶四十九 49  口二百三 203명
永樂〈540興和二年置。〉영락현

20180327_182740.jpg
↑ 지도는 모용외 낙랑군 교치설의 추정 위치


● 낙랑군 인구이동 : 고조선 인구의 이동

서진 戶三千七百  3,700 => 
모용외 其民千馀家, 1,000戶 =>
북위 낙랑군 戶 219 口 1,008명,   북평군 戶 430 口 1,836명 =>
북위, 동위 남영주 낙랑군 戶四十九 49

호수 戶 3,700 => 1,000 => 219 / 430 => 49
인구 3,700*5 => 1,000*5 => 1,008/1,836 => 49*5

서진시절 3,700호로 낙랑군 유물을 생산소비 했던 흔적이 대동강 유물로 남았다면,
모용외에게 낙랑군이 교치된 이후 1,000호로도 낙랑군 유물을 생산소비 할수있다고 봅니다.

즉, 낙랑군 유물의 연속성을 증명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수는 없는거죠.
고조선 백성들이 여전히 저런식으로 이동하며 흔적을 남겼고
북경에서 발견된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의 무덤으로 큰줄기는 알고 있는거죠.
조선현이란 명칭으로 계속 끌려다니던 고조선 유민의 자부심은 확인되었습니다.


대동강 유물과 대릉하 유물의 연속성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

없다면 원래부터 대릉하 부근에 낙랑군이 있었다가 될겁니다.
연속성이 있다면 대동강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존 통설이 힘을 얻게 됩니다.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감방친구 18-03-27 19:02
   
삼바님께ㅡ
삼바 18-03-27 16:36 답변
감방친구님
/////낙랑은 이미 북연시절에는 난하를 건너갔고/////
위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북연 시대까지 낙랑은 대릉하에 있었고,
북연을 멸망시킨 북위가 난하하류 지역 요서군에 옛 낙랑군 대방군의 속현인 조선현과 함자현등을 설치된것이 위서 지형지에 보이며,
현재 북경의 북쪽지역인 광양군 광흥현에도 조선 유민을 사민 하였습니다.
그러니 북연 시대에는 낙랑이 난하를 건너 간적이 없고, 북연을 멸망시킨 북위에 의해서 교치/ 사민된 것입니다.

ㅡㅡㅡㅡㅡㅡ

우선 난하를 건너갔고는 제 비약이고요
지금 도배시러님이 사용하는 지도는 중국이 비정한 지도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장통이 데리고 모용씨에 귀부한 낙랑 1000여 호는 진나라에 의해 교치되고 남은 인구의 일부이고
이미 진나라 때는 낙랑군이 진장성 시작점인 난하 부근으로 교치된 때입니다
저는 모용씨의 용성을 학계 비정 현 조양시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이 부분의 고찰은 제가 더 이어서 공부하지 않고 고려 전기 서북계로 빠져서 집중했기에 앎이 짧을 수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다만 제가 공부한 바에 근거 이미 광개토대왕 말기에 고구려는 대릉하까지(어쩌면 이보다 서쪽으로 더) 진출했다고 봅니다
촐라롱콘 18-03-27 20:11
   
그런데 상식적으로 낙랑유물을 중국계통이라고 특정했을때....

한반도 내에서의 낙랑 유물-유적은 주변 유물-유적과 비교해 뚜렷이 구분이 가능하지만,

요서-하북지역으로 이치된 낙랑인들이 남긴 유물-유적은 해당 지역이 중원문화권 또는 바로 인접한 지역인라

주변과 비교해 뚜렷하게 구분될만한 요소가 적을 텐데요... 

그들이 남긴 유물-유적에 딱히 낙랑관련이라 할 만한 특정할만한 표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은...

게다가 유민의 규모 또한 위 본문의 각 시대별 호수와 인구수 대비를 적용한다면 요서로 이치되던

시점조차도 5,000명 정도 규모인데다가... 시대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어 수 백명 규모로까지 축소되는데

또한 한 자리에 진득하니 머문 것도 아니고....적어도 100년 단위로는 이리저리 옮겨 다녔는데...

종합적으로 고려해볼때 이치된 낙랑인들의 흔적이라고 특정할만한 유물-유적이 쉽게 발견될 것 같지는 않네요~~~

또한 교치되기 이전의 서진시기의 낙랑호수 3,700호란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한참 축소되던

시기의 호수 아닌가요....??? 낙랑의 전성기인 전한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6만여호에 인구

30만 이상에 달했을 텐데요....??
     
감방친구 18-03-27 23:34
   
[[그런데 상식적으로 낙랑유물을 중국계통이라고 특정했을때....

한반도 내에서의 낙랑 유물-유적은 주변 유물-유적과 비교해 뚜렷이 구분이 가능하지만, ]]

이게 웃긴 거죠
중ㆍ한국 사학계 통설대로라면 기원전 2세기 말부터 4세기 초까지 현 요동반도를 거쳐 서북한까지, 심지어 경기도 북부&강원도와 북한 전체까지 중국계 왕조 영토였는데

내리 4~500 년 동안 영토였고
서안평 (학계 통설 압록강 하구 북안)을 고구려에 빼앗기며 서북한 낙랑군이 요하 서쪽으로 교치됐다는 건데

유독 서북한 지역만 중국계 유물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감방친구 18-03-27 23:39
   
[[또한 교치되기 이전의 서진시기의 낙랑호수 3,700호란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한참 축소되던

시기의 호수 아닌가요....??? 낙랑의 전성기인 전한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6만여호에 인구

30만 이상에 달했을 텐데요....??]]

이게 벌써 3세기 말의 이야깁니다
장통 1000여 호 전의 이야기고
이 서진 시기에 교치된 낙랑군이 진장성 시작점에 있었다고 진서 지리지/태강 지리지에 적혀 있습니다

현 요서에 동서로 걸쳐 있는 것은 학계 통설에서도 연장성 유적이라 말하지 진장성이라 안 합니다

무슨 얘긴지 아시겠습니까
     
감방친구 18-03-27 23:47
   
낙랑군 인구변화상

낙랑군(樂浪郡)

한서 지리지ㅡ 가구수는 62,812이고 인구수는 406,748명이다. 운장(雲鄣)이 있다. 현은 25개이다.

후한서 군국지ㅡ 18개의 성이 있고 가구수는 61,492이며 인구수는 257,050명이다.

진서 지리지ㅡ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 대방군(帯方郡), 공손도(公孫度)가 설치하였고 현은 7이며 가구수는 190이다.

위서 지형지(북위)ㅡ 현은 2개이고 가수수는 219이고 인구수는 1,008명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 위와 서진 시기인 3 세기에 요동ㆍ낙랑 등 5 군에 대한 교치가 있었습니다
#나. 북위 시기인 5세기 초에  #가의 5군을 포함한 6군의 하북성 고죽국 자리로의 교치가 있었으며
#다. 역시 북위 시기인 6 세기 초에 상기 5군에 대한 하북성 보정시 위치로의 교치가 있었으며
#라. 6세기 북제ㆍ북주 시기에 재차 교치가 있었습니다

이를 더 체감케 하기 위해 수나라의 동북계 영역의 인구수를 제시합니다. 아래 군들은 모두 지금 하북성 자리에 있었습니다.

수서 지리지

탁군(涿郡)
ㅡ옛날에 유주(幽州)에 설치하였었는데, 후제(後齊, 北齊)에서 동북도행대(東北道行臺)를 설치하였다가, 후주(後周)가 북제(北齊)를 평정하여 총관부(總管府)로 고쳐 설치하였으며 대업(大業, 605-617) 초에 부를 폐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9개이고 가구수는 84,059이다.

상곡군(上谷郡)
ㅡ개황(開皇) 원년에 역주(易州)를 설치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6개이고 가구수는 38,700이다.

어양군(漁陽郡)
ㅡ개황(開皇) 6년에 현주(玄州)를 이곳에 옮겼으며 아울러 총관부(總管府)를 두었다가 대업(大業) 초에 총관부를 폐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호구수는 3,925이다.

북평군(北平郡)
ㅡ옛날에 평주에 설치했었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2,269이다.

안락군(安樂郡)
ㅡ옛날에 안주(安州)를 설치하였었는데 후주(後周)가 현주(玄州)로 고쳤다. 개황(開皇) 16년에 주(州)를 옮겨 다시 단주(檀州)를 설치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7,599이다.

요서군(遼西郡)
ㅡ옛날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는데 개황(開皇) 초에 총관부(總管府)를 두었고, 대업(大業) 초에 폐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751이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8758&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5
뚜리뚜바 18-03-27 21:00
   
매일 보면서 배우는 입장입니다만

교치라는게 너무 억지 같다는 생각을 매번 합니다.

예전에 이 억지 같은 느낌을 풀어준 꼬마러브님이 작성한 글이 있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교치가 억지라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 지는듯... 혹시 교치됬다는 증거를 확인해줄 만한게 자치통감 말고는 유물로서밖엔 방법이 없는 건가요?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2194&sca=&sfl=wr_subject&stx=%EA%B5%90%EC%B9%98&sop=and
     
도배시러 18-03-27 21:06
   
[교치 낙랑 - 원조 낙랑] 유물로 교차검증하는게 가장 쉬워 보입니다.

먼저 북경에서 발견된 조선현 한현도 무덤의 부장품 비교는 어떨까 싶네요.
     
감방친구 18-03-27 23:43
   
[[교치라는게 너무 억지 같다는 생각을 매번 합니다. ]]

그렇죠
낙랑이 서쪽으로 고구려에 밀려 교치돼 간 것은 맞는데
학계 주류설이 말이 안 되는 거죠
감방친구 18-03-28 01:46
   
사람들이, 특히 사학계가 이상한 게 3~4세기에 요동이나 요서나 낙랑을 고구려가 공격했다 하면 저 지도에 보이는 것처럼 요동군, 낙랑군, 요서군을 공격한 것인데

마치 현재의 지리 관념으로 현 요하를 기준 삼아 요서와 요동을 고구려가 공격한 것이고 그 때까지 고구려가 요동조차 제대로 장악치 못한 것처럼 왜곡해서 설명한다는 것이죠

제가 늘상 쓰는 말이
축소지향의 역사관인데

정말이지 우리 사학계는
자국 역사를 축소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은 집단입니다
     
도배시러 18-03-28 02:07
   
조선 양반들의 폐단이죠.
외부와 쌈박질할 건수를 사전에 봉쇄하고, 안에서 당쟁에 열을 올리시다보니...
정치적인 이유로 강역을 축소시킨게 아닌가 하네요. 뭐만 하면 주변 눈치 보는거 습관이라...
          
비좀와라 18-03-28 07:41
   
조선 양반들의 폐단 이라기 보단 조선 중기 부터 두각을 보이는 사회주의자들인 사림의 특징이죠.

보수는 부폐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놈의 사회주의자들은 외부의 적 보단 내부의 적을 이기는데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죠.

이게 임진왜란의 오판과 황서영 벽서와 동학등으로 표현되는 것 이고요.
               
감방친구 18-03-28 10:29
   
이런 식의 해석은 동아게 역사토론에 분란만 가져옵니다
자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도배시러 18-03-28 23:15
   
저 지도를 보면 요동성이라 우기는 요양도 5세기까지 바다에 잠겼을듯 하네요.
history2 18-03-31 17:05
   
낙랑이라는 실체는 아무튼, 반도에서는 그 존재자체가 부인되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기존의 카르텔이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겁니다.....평양의 낙랑유물 글쎄요...전 낙랑의 무역거점이 평양에 있었음 까지는 인정을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유물은 동산이고,,,유적은 부동산인데 유적이 없는 평양이 어찌 낙랑의 치소가 되겠습니까? 평양에서 고조선의 성곽이나 궁궐터 나오기 전 까지는 제발 강단도 입을 닫아주세요!
 
 
Total 20,02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90058
4632 [한국사] 낙랑 유물 조작문제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을까? (40) 콜라캔 03-26 1207
4631 [한국사] 낙랑군 유물의 연속성 (10) 도배시러 03-27 978
4630 [한국사] 세종실록 지리지 맹신자들께(feat.공험진) (12) 감방친구 03-27 1844
4629 [한국사] 조선 초기의 북방영토에 대한 소견 (14) history2 03-27 1940
4628 [한국사] 남.북한의 1차 내각의 구성과 어려움(친일파 배제의… (2) history2 03-27 1157
4627 [한국사] 고구려 당 1차 전쟁 간략 개요 (7) 고이왕 03-27 1055
4626 [한국사] 고구려-당나라 1차전쟁 시작지도 (2) 도배시러 03-27 1040
4625 [기타] 가쓰라-테프트 밀약1(밀약의 국제법적 정의) (2) history2 03-27 1361
4624 [기타] 가쓰라-테프트 밀약2 (조선과 필리핀은 교환가능한 … (8) history2 03-27 1271
4623 [한국사] 물속에..우리 역사가.. (2) 백전백패 03-27 1105
4622 [일본] 이 사람들 근황이 궁금하네요.. (4) 에미나이 03-27 1320
4621 [한국사] 낙랑군 유물의 연속성 2 (14) 도배시러 03-27 1571
4620 [한국사] 요하문명에 대하여 (7) history2 03-28 1562
4619 [한국사] 국정화 교과서 기사 있길래 링크 퍼왔습니다 (1) 뚜리뚜바 03-28 640
4618 [한국사] 고조선의 수도의 이동과 위치에 대한 소견(1) (3) history2 03-28 1769
4617 [한국사] 고조선의 수도의 이동과 위치에 대한 소견(2) (8) history2 03-28 1429
4616 [한국사] 북한 쪽에서 보는 한사군의 위치 (16) 윈도우폰 03-28 2111
4615 [중국] 진시황, 한나라의 해안선 표시도 (6) 도배시러 03-28 2290
4614 [한국사] 가탐도리기의 진왕석교는 현 잉커우 다스차오 (12) 감방친구 03-29 1107
4613 [한국사] 가탐도리기 항해 경로의 실질 교차 비교 (2) 감방친구 03-29 2340
4612 [한국사] 갈석산의 위치에 대한 지도 정리 (13) history2 03-29 1420
4611 [기타] 동남아시아 유일의 백인왕국 '브룩 사라와크' (5) history2 03-29 2708
4610 [기타] 역사상 유일하게 강제독립 된 싱가포르 스토리 (6) history2 03-29 1764
4609 [홍콩] 홍콩 청렴의 상징 "염정공서"의 역사(한국 공수처의 … (5) history2 03-29 2078
4608 [중국] 홍산문명의 청동문명과 상나라의 관련성 그리고 고… (17) history2 03-29 2194
4607 [한국사] 서경 우공편의 원조 갈석산 (11) 감방친구 03-30 1378
4606 [중국] 고대 해안선을 적용한 전국시대 연나라 (5) 도배시러 03-30 2551
 <  571  572  573  574  575  576  577  578  579  5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