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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8 19:28
[한국사] 북한 쪽에서 보는 한사군의 위치
 글쓴이 : 윈도우폰
조회 : 2,109  

내 경우...후기 고조선의 위치나 그 후 낙랑군을 중심으로 하는 한사군의 위치에 있어 북한 학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

낙랑군의 경우 본국이 망한 후에도 수백년이나 존속하려면 위치적으로 요동반도 끝이어야 타당...재야 사학자들 관점처럼 만리장성 위라고 하면 중원의 본국에 통합될 수 밖에 없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그런 점에서 우리 재야 학자의 요동설도 부적절하다고 보임.

이병도나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처럼 평양에 있으면 중원의 본국과 교통에 문제가 많았을 것으로 봄...물론 남포항에서 배타고 연안을 거쳐 북경 쪽으로 간다면 모르겠지만...육로로는 연결이 안 되는 상태에서 우리 조상 들의 공격 속에서 수 백년 존속하는 것도 무리

반면 북한학설처럼 요동반도 서쪽 변에 위치한다면 중원과 떨어져 있어도 해로로 중원과 연계되어 교류에 문제가 없음...실제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에는 눈으로 보이는 열도가 위치하는데...이 열도의 북쪽이 발해만이고 그 아래가 서해...즉, 낙랑은 중원과 떨어져도 열도를 따라 연안항로를 이용해 중원과 교류할 수 있다고 보면...중원의 통제도 안 받고, 고구려 공격도 막아내며 수백년 존속이 가능한 위치로는 요동반도 서쪽이 유일함

물론 평안도에 위치해도 배를 연안을 따라 중원으로 갈 수는 있지만 중원이 너무 멈 ...수 백년간 그러기에는 무리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가장 타당한 낙랑군의 위치는 중원과도 바다로 떨어져 있고, 고구려와는 산맥(천산산맥)으로 막혀 있는 위치인 되는 요동반도 서쪽...

지리적 측면을 고려할 때 한사군의 위치는 북한 학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보여지며...그렇다면 후기 고조선의 강역 또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비정하는게 맞을 듯

그리고...우리 사학자들은 일개 군을 엄청 크게도 그림...북한 쪽 주장이 맞는게 군(郡)은 군일 뿐임...군이 아무리 커도 주(州) 만큼 크지는 않는데...그런 개념이 없는지...우리 사학자들은 일개 군을 주보다도 크게 그림...한의 사군을 합쳐 아무리 커도 주(州)보다는 클 수 없는 것임...그런 점에서 보면 요동군도 크게 비정하면 안되는 것

[북한 역사책에서 고구려사 부분]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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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폰 18-03-28 20:09
   
북한 학설을 따른다면 동예나 옥저의 위치도 서해안으로 비정하여야 하는 문제...그런데...사실 옛날 지나인들이 동해를 알았을까 하는 생각도 듬...그렇게 생각하면....압록강 넘어 요동반도 남쪽 바닷가가 예의 위치일 수도 있음.

물론 지금처럼 방위각이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았다고 본다면 지나인들에게는 평안도 쪽 서해가 동쪽 바다로 인식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사실...동해안 쪽에서 동예의 유물이 나온 것도 아니고...동해안 쪽에 동예가 있었다는 증거도 없음.

어쨌든 낙랑군을 평양에 위치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태백산맥 못지 않은 낭림산맥(평안도와 함경도를 나누는 산맥)을 넘어서 임둔군을 설치했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됨. 지나인들인 무슨 수로 낭림산맥을 넘어 함흥 원산 지역에 군을 설치?
     
호랭이해 18-03-28 20:48
   
동옥저

지형은 동북간이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는 된다. 북쪽은 읍루( 婁), 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해 있다.

읍루

읍루(挹婁)는 부여(夫餘) 동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고 대해(大海)에 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북옥저(北沃沮)와 접하나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임둔을 요남에 비정하긴 애매하지 않을까요
          
윈도우폰 18-03-28 22:43
   
제가 생각하는  남옥저의 위치는 함흥 쪽, 북옥저의 위치는 연해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읍루는 연해주 북쪽에서 흑룡강 사이로 보고요...그렇다면 읍루와 맞닿는 대해는 연해주와 사할린 사이의 바다가 아닐까 하는....

식민사학의 경우 임둔군 위치와 (남)옥저의 위치가 함흥평야 일대로 같은데...임둔이란 명칭의 기원이 한사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임둔이란 고조선 지역이었다고 본다면...임둔은 고조선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지역 즉, 낭림산맥 넘어 함흥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즉, 임둔 역시 고조선 중심지 가까이에서 찾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만...
     
촐라롱콘 18-03-28 21:44
   
[[사실 옛날 지나인들이 동해를 알았을까 하는 생각도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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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자사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군이 고구려를 쳤을때, 관구검 휘하의 현도태수 왕기가

동천왕을 추격하는 와중에 동해에까지 다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옥저인들에게

얻은 정보 가운데서는 울릉도(우산국)로 추정되는 동해 한 가운데 섬에 대한 정보도 있지요~~

그리고 수-당 시기에 이르면 중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부정확해지기는 하지만 동북방 방면에만

한정하더라도 오호츠크해 일대까지는 비교적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다소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심지어 더 멀리 캄차카반도 또는 근처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윈도우폰 18-03-28 22:48
   
제가 문헌에 의존하여 의견을 내는 것은 아니라서 좀 그렇기는 하지만...무협지에서도 보면 '북 해' 무슨 무슨 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오지요^^ 상상의 바다로서 북해를 많이들 상정하는데...오오츠크해가 가능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만주 기준 동북방 방면에 대한 지나의 기록은 정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지리지의 기록도 정확도는 떨어지는데...고지도 상의 위치는 반 이상이 상상에 맞추어 기술되는게 많지요...그건 동양이나 서양 모두 마찬가지.

만약 옥저인들이 동해 한 가운데 섬이 있다고 인식했다면...그건 울릉도이기 보다는 사할린이나 홋카이도가 더 타당할 것입니다. 옥저의 위치를 보건데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동해 상의 섬은 콩알(?)만한 울릉도보다는 홋카이도나 사할린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당시 항해술로는 동해를 가로지르는 것이 불가능했지요. 바다를 횡단하는 것은 한참 후대에나 가능해진 것이고 울릉도는 남쪽에서 올라가는 동한난류와 쓰시만 난류로만 접근 가능합니다. 즉, 함흥이나 연해주에서 내려오는 한류를 타고는 울릉도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이들이 울릉도를 인식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발해 역시...나중에 왜에 사신을 보낼 때...동해를 횡단하기 보다는 한류를 타고 혼슈우 북서단이나...한반도 동해안으로 타고 내려와 대마도 해협을 건너는 방법을 썼을 것입니다. 즉, 해류 흐름 상 연해주나 함흥에서 울릉도를 인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정
               
촐라롱콘 18-03-28 23:27
   
[[함흥이나 연해주에서 내려오는 한류를 타고는 울릉도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울릉도를 인식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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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의 근거지인 함경도 근해를 지나는 북한한류를 타면 자연스럽게 울릉도 근해까지

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 남부 연해를 지나는 난류를 타게되도 역시 을릉도 근해

까지 비교적 쉽게 다다를 수 있지요! 따라서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울릉도 근해지역에

조경수역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하기 이전까지 우산국 원주민들의 유래를

북쪽방면으로부터는 읍루,옥저,동예 그리고 남쪽방면으로부터는 삼한지역까지 후보들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에 언급된 현 울릉도로 추정되는 기록입니다.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고구려에 처들어온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현도군의 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남옥저(지금의 함남 남부 지역)까지 쫓게 하였다.

거기까지 온 왕기가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자 그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언젠가 풍랑을 만나 동쪽의 한 섬에 도착한 적이 있었는데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칠월이면 소녀를 골라 바다에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
                    
윈도우폰 18-03-29 00:09
   
역사 얘기는 아니라서 좀 그렇지만...동해에서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해역은 울릉도로부터 한참 위의 대화퇴(왜인들이 지은 이름이지만...)가 있는 위도에서입니다. 즉, 한류가 울릉도까지는 못 오고 함흥과 거의 같은 위도에서 남에서 올라오는 난류에 부딪혀 한류가 동쪽으로 꺽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함경도 쪽에서 동해 중앙으로 나가게 되면 울릉도 쪽으로 가는게 아니고 동쪽으로 꺽여서 일본 혼슈우 서북부 해안으로 가게 되지요. (그래서 배로 탈북한 사람들이
왜국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뉴스에 나오는 것이지요^^)

함흥에서 해류를 타고 내려오려면 동해 연안 쪽만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해류를 타고 울릉도 쪽의 동해 한 가운데로는 가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돛단배라서 바람을 잘 타면 갈 수도 있겠지만... 그 시대가 역풍일 경우 지그재그로 항해하는 일종의 원양항해술까지 발전한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면...하여간...바다를 횡단하는 것은 백제나 통일신라 때가 되어서야 가능해지지요. 이 때까지만 해도 왜는 배도 제대로 못 만들었지만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술이 없어서 엔린같은 왜의 승려는 중국으로 오고갈 때는 장보고의 배를 탔다고들 하지요.

어쨌든 제가 잘못 아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함경도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로 쉽게 갈 수도 없지만...갔다고 하더라도 다시 함경도로 되돌아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삼천포로 빠지는 얘기...
          
도배시러 18-03-28 23:03
   
그 당시 해안선에 요하지역이 동해지요.
요동성이라 우기는 요양도 바다에 잠긴것으로 보이는 5세기 고대 해안선
남북통일 18-03-28 20:50
   
북한사학계는 일단 연암 박지원 선생의 의견을 통설로 보는 것 같습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으로 보고 계셨고 고구려 평양성을 봉황성으로 보고 계셨지요.
현 북한사학계에서도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으로 보고 있고 평양성을 봉황성에 비정하는 것 같습니다
     
호랭이해 18-03-28 21:23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에 가는 그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에게 보낸 시(詩)에,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 千秋大膽楊萬春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 箭射虯髥落眸子

라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것이 없다더니 | 爲是囊中一物爾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 那知玄花落白羽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다. 이 두 노인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대개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 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대개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54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54 당서(唐書) : 유후(劉煦)의 《구당서(舊唐書)》, 구양수(歐陽修)의 《신당서(新唐書)》가 있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 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예(穢)·맥(貊) 등 동이(東彝) 55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56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합하여 2부(府)로 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 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읍루(挹婁)·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위씨(衛氏)·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57와 《문헌통고(文獻通考)》58에는,

“광녕·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원(元)의 탁극탁이 씀)》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년(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고구려 보장왕(寶藏王)]을 요동주(遼東州) 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
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꼬마러브 18-03-28 21:25
   
단재 신채호 선생과 그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리지린의 학설이기도 합니다.
코스모르 18-03-28 23:05
   
북한애들은 단군릉이란것도 만들어 놓고,,, 학계가 정치라 전혀 분리가 안되어있는데 그들 연구를 믿을 수가 없죠
     
윈도우폰 18-03-28 23:15
   
그것과 한사군 위치와 관련된 주장과는 다르지요....오히려 고조선이나 한사군과 관련해서는 우리 나라의 식민사학자나 왜의 관변 사학자들이 주창한 현 이론이 더 믿기 어렵지 않나요?

고대사에 있어서는 북한 쪽이 더 정확할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지리적으로나 사료확보 차원에서 보면요....단지...단군릉과 같은 정치적 목적의 조작을 빼고는 왜정시대 정립된 이론에빠져 있는 우리 쪽 연구보다 더 정확하다고 봐야 합니다.

더욱이 공산주의자들의 역사연구는 소위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접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접근법은 실증사학이니 뭐니 하면서 자기 주장에 맞는 사료를 선택하여 객관적인 척 하는 쪽보다 더 객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은 고대사 쪽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봉건시대에 해당하는 쪽의 과도한 부정이 문제가 되지요...자본주의와 시대적으로 동떨어진 고대사회에 대해서는 왜곡할 이유가 별로 없지요...공산주의는 반봉건을 주창하다 보니 중세 쪽 왜곡이 심하지요. 우리 나라의 경우라면 조선시대에 대한 부정이 그렇지요.
     
신수무량 18-03-29 09:28
   
'학계가 정치라 전혀 분리가 안되어있는데 그들 연구를 믿을 수가 없죠'
좋은 지적이라 생각합니다...그리고 이 논리로 현재의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면, 일제 강점기 왜의 관변(=가짜)사학자들에 의한 우리나라의 역사 연구는 모두 믿어서는 안됩니다. 당시 일제 가짜사학자들은 순수한 학문으로 우리의 역사를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침략의 도구로 삼았죠). 그 당시 대표적인 쓰다소키치(한국의 역사를 날조한 장본인이자 한국의 역사를 정복한 출발자),  쓰에마스, 이마니시 류 및 그  제자(가짜사학자들)들에 의해 씌여진 우리의 현 역사는 모두 지우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에 의한 우리나라 역사 연구결과는 모두 믿어서는 안됩니다...
history2 18-03-31 17:03
   
남북한 모두가 다들 자신들을 얽매이는 그래서 온전한 진실을 만드는 것을 가로 막는 장벽이 있는 것 같습니다...북한이야 이제까지 어느정도 합리적인 이론을 내세우다, 갑작스레 그놈의 주체사상 때문에 잠시 왜곡이 있지만, 곧 학문적 진실이 승리할 것 이라 생각을 합니다(워낙 주체사상 식 주장은 황당해서요)...더 문제는 암묵적인 카르텔이 형성된 남한 학계지요...누가 억지로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조선편수회의 주장이나,,,,성리학에 물든 과거 조선 중,후기 관념을 가진 학계를 어찌 해야 할지요.....
지수신 18-04-10 01:36
   
연나라 장수 진개가 조선(동호)을 쳐서 2천리(1천여리)를 빼앗았다는 기록과
요서 일대에서 전국말기 연나라 계통 유적/유물이 분명히 나타난다는 점을 보면
위만조선 영역이 요서가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윤내현은 문제의 '만번한'이 요서라고 단언했으나, 별다른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2천리를 빼앗겼지만 금방 되찾았다는 주장도 일방적인 뇌피셜로 보이고요.

기준과 위만/우거의 왕검성이 요동이고 따라서 한 낙랑군도 요동이라면 많은 것이 설명됩니다.
요/금/원/청 기록에서 한결같이 말하는 등식
조선 왕검성=한 낙랑군=고구려 평양=요 동경압록부=원 동녕부
한 낙랑군을 요서의 만리장성 근처로 갖다놓으면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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