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군에 의해 불과 일주일만에 완전히 박살나 버립니다.
전격전이라 할 수 있던 당시 고구려군 3만의 공세로
당시 한성에서 탈출하지 못했던 개로왕과 왕족들이 모두
지금의 아차산에서 참수됩니다.
그러나 한성 함락전 개로왕의 명을 받고 신라에 원군을 구하러 떠난
문주와 일부 왕족들 그리고 461년에 개로왕의 명으로 당시 백제의 담로 중 하나였던
길비 하네(지금의 일본 오사카 및 주변 지역)을 다스리러 떠났던 곤지와 개로왕의 부인 및
태중의 아기 (훗날의 무령왕) 등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북위는 물론이요 동북아를 호령하던 막강한 고구려군 3만의 질풍노도와 같은
공세로 한성백제는 멸망합니다( 백제본기(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아니라 백제 당시
백제인들이 집필했던 백제본기)를 인용했던 일본서기에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잇음)
그런데 얼마안가 무령왕때 백제는 다시 강국이 됩니다.
고구려에 의해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했던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될수 있던 배경은?
저는 바로 아직도 풀리지 못한 수수께끼인 대륙백제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대륙백제라고 하니까 환빠의 냄새가 짙게 풍겨온다고 무조건 배척부터 하는 분들이 많긴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요서, 발해만 산동성 그리고 양쯔강 동해안 지역에
백제인 엄밀히 말하면 부여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지역이 활성화되어 있던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겁니다.
중국사서에 전연후연북연시대에 요서에는 상당수의 부여인세력이 있었고 부여씨 세력가의
이름들이 심심치않게 등장합니다.
얼마전 라마동 유적지의 주인공들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이라고 주장하는 중공측 학자들의
증언도 나왔던 역스스페셜 방송분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또한 신구당서에도 산동성에 상당수의 우리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중국땅에 백제의 세력지가 있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중국측 기록중에
남제서에 실려있는 484년, 488년 490년 세차례 걸친 북위와 백제와의 대규모 전쟁 기록이
그것인데.. 남제서에는 백제 동성왕이 북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북위전쟁을 위해 동성왕이 파견했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찬수류와 같은 백제장군들을
해당 지역의 통치자로 공식인정해줄것을 요청하는 국서까지 실려있어 덮어놓고
대륙백제는 허구라고 주장하기엔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당사자였던 북위 기록에도 대놓고 백제와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남제가 중군(衆軍)의 무리를 이끌고 지금의 산동성 부근지역에서
북위와 전쟁을 벌인 사실이 있는데..
중군이란 외인부대를 뜻하는 당시의 용어로서 결국 동성왕이 파견한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가
이끄는 백제군으로 이해할 여지가 크다고 볼수 있습니다.
당시 북위와 남제는 첨예한 대립을 거듭하던 남북조시대였기 때문에 백제와 남제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남제가 산동성 등 백제령을 인정해주는대신 북위를 상대로 공동방어를 펴고 있다고 봐도
정황상 어긋나지 않아 보이는군요.
아무튼, 산동성 등지에 백제령이든 백제직할지든 백제의 영향이 강하게 끼치던 지역이 있었다치면,
광개토태왕때부터 고구려가 그토록 서해 해상권을 두고 백제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현대에 비해서는 한줌의 한줌도 안되는 교역량밖에 안되던 5~6세기 동북아시대에
서해를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산 도자기 등 위세품을 수입하지 못한다고 나라가 절단나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남제로부터의 정치적 지지를 받는등의 외교적인 목적도 매우 중요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정치적 목적 외에도 결정적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화의 이동이 뒤따라야만
총력을 다하여 수군을 운용하고 적국과의 해상전투를 무릅쓸 동기와 충분한 이유가 생겼을 겁니다.
따라서, 단지 위세품만을 수입하려고 막대한 재원과 인력이
요구되는 수군을 마련하여 서로 오랜 접전을 거듭했다고 보기보다는
당시 산동성 등지에 백제세력 내지 백제를 지지하거나 백제인들과 긴밀한 인적교류가 있어왔던
부여인세력들이 존재하여 백제에 서해해상교통로를 통해 백제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있었기에 이에 부담을 느낀 고구려가 어떻해서든지 산동성 등지의 백제세력과 한반도 남부의
백제세력간에 통로를 끊고자 서해에서 고구려수군을 운용해왔으리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따라서, 중국으로 통하는 뱃길에서 가장 중요한 한반도 기착지로서 한강은 너무나도 중요했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의 지배를 두고 그토록 오래 치열한 접전을 벌인것도 이해가 가구요.
비록 백제가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했지만
웅진은 금강에서 서해로 바로 나갈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비록 한강유역을 빼앗겨 고구려수군의 차단으로인해 전처럼 용이하게 중국동해안지역의 백제세력과의
연계는 힘들게 됬지만, 그래도 사력을 다해 대륙백제와의 연계에 경주한 덕분에
동성왕때 북위와의 전쟁에 승리하여 산동성 등지에서의 세력을 지킬수 있던 백제는
한반도 백제와 대륙백제의 물자수송에 매진하여 차츰 한반도에서의 힘을 회복하고
또한, 지금의 규슈, 오사카 등지에 진출해있던 백제의 담로 왜에서의 인력 등이 지원을 받아
무령왕때에는 고구려와 산발적 전투에서 연승을 거둘만큼 성장할수 있던게 아니냐는 겁니다.
당시 동북아를 호령하던 고구려가 꼴랑 한반도 서남부에 지나지 않은 영토를 지닌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하고 한성함락에 만족했던 이유도
사실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뿐만 아니라 산동성 요서 및 바다건너 왜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로서도 백제를 쉽게 보지 못하고 있던게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