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나도는게 이 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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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전체 군사의 구성에서 철포의 낮은 비중 문제를 들 수 있다.
철포를 이용한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알려진
장소합전(나가시노 전투 1573) 직후인
1575년 상삼겸신의 「군역장」에 의하면
39인의 家中의 武將이 거느린 군사 5,514명 중
장창병은 3,609명,(65%)
철포병(철포지) 321명,(5.8%)
기수(대소기지) 368명,(6.6%)
기병 566명,(10%)
그리고 각종 잡병(수명) 650명(11%)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당시 전체 군사에서 철포병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6%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장창병은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기병의 비중도 10% 이상임을 고려한다면
16세기 후반 일본의 전술이 철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초 일본군의 편성과 전술 양상은 전쟁에 참전하였던 일본군의 구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 직후에 일어난
조선과의 제1차 전쟁(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이
고교종무(타치바나 무네시게), 고교통호 형제에게 부과한 군역 내용을 보면
총 인원 3,000명 중에서
전투원은 1,400명으로서(총원의 46%)
구체적으로 보사(사무라이 보병),150명, (10%)
기사(사무라이 기병)이 150명, (10%)
철포족경이 200명,(14%)
궁족경이 100명,(7%)
창족경이 500명 등이었다.(35%)
+ 기타 300명(21%)
(전투병
따라서 철포의 비중은 궁의 2배 정도로서
이전보다 상당히 증가하고 전체 전투원 중에서 14% 이상이었다.
그런데 조선과의 제2차 전쟁(정유재란) 시기
같은 (고교)형제에게 부과된 군역에서는
궁병과 철포병의 비율이 1 : 3.8로 철포의 비중이 2배 가까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5~6년의 짧은 시기 동안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대략 전체 전투병 중 14%->28%로 상승했다는 소리인듯)
철포의 비중은 계속하여 급격히 높아져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일본의 패권을 놓고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북 지방 다이묘인 이달정종(다테 마사무네)가 보낸
3천 군사 중에서 기병 420명(14%) 등을
제외한 보병 전투원 2,300명(76%) 중
철포兵이 1,200명(40%)에 달하여 전체의 절반을 상회하였다
http://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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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일본 전국시대 장창병 비율 65% ->
임진왜란 때 장창병 비율 35% + 사무라이 보병(주무기는 창) 10% = 45%
조총병 비율
일본 전국시대 6% -> 임진왜란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