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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여 년 전 횡성군 갑천면과 평창군 봉평읍 경계에 있는 태기산에 삼한시대 진한의 마지막 임금인 태기왕이 피난을 왔다. 태기왕은 경남의 삼랑진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침입을 받아 싸움을 벌였다가 패하자 소수의 친위병만을 거느리고 1000리가 넘는 이곳까지 달려와 한숨을 돌렸다. 한 달여 동안의 강행군으로 태기왕의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있었으므로 개천에서 갑옷을 벗어 빨아 입고서 더 북진하여 덕고산에 이르렀다. 그가 도착해서 보니 덕고산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는 이곳에 성을 쌓고 군사들을 시켜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게 하는 동시에 훈련을 시켜 후일을 도모하였다.
태기왕은 박혁거세의 군사가 남쪽에서 쳐들어올 것이라고 여겨 남쪽만을 경계하였는데, 신라군은 염탐꾼을 풀어서 북쪽이 취약한 것을 알고 홍천군 서석면 생곡리 방면으로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뒤늦게야 잘못을 깨달은 태기왕이 신라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태기왕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서문을 나가 ‘지르메재’를 넘어 인근 속실리 율무산성으로 도주했다. 그 뒤에 태기왕의 생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평창군 봉평면 멸운리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그때 패망한 진한의 군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마을을 개척해 살았던 곳이 신대리라고 한다.
태기왕이 쌓았다는 태기산성에는 현재 성터와 우물 그리고 곡식 창고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횡성현 동북쪽으로 49리 50보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는 568보 5척이다. 시냇물이 한 곳에 있는데 장류(長流)하여 마르지 않는다. 또 군창 5칸과 관청 2칸이 있다”라고 실려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덕고산성으로 표기하면서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653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군창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금폐(今廢)’라고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이미 태기산성은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태기산 건너편의 산은 태기왕이 답사를 했다고 해서 답산(踏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태기산 자락을 흐르는 갑천(甲川)은 태기왕이 먼지 묻은 갑옷을 씻은 뒤로 갑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횡성군 갑천면 신대리의 성골마을에는 대궐 터가 남아 있다. 박혁거세에게 쫓긴 태기왕이 덕고산에 웅거할 때 이곳에다 성을 쌓은 뒤 대궐을 짓고 살았다는 곳이다. 성안이마을은 덕고산성이 있을 때 그 성의 안쪽에 있던 마을이고, 중금리의 어상대(御床垈)는 태기왕이 덕고산에 웅거하고 있을 때 이곳에 어상(임금의 음식을 차려놓는 상)을 놓고 쉬어갔던 곳이라고 한다. 횡성군 우천면 오원리와 안흥면 안흥리 경계에 있는 바람부리산은 풍차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서북쪽이 틔어서 바람이 늘 세게 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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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泰岐山)과 태기왕(泰岐王) 전설
태기산은 봉평면과 횡성군 둔내면에 연해 있는 해발 1,261m의 산으로 꼭대기에는 태기산성(泰岐山城)이라고 불리우는 성터가 남아 있으며 이와 관련되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부족국가 시대에 맥국(貊國)의 왕 태기가 춘천 지방에서 다른 부족에게 쫓겨 원주로 옮겼다. 이에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강릉지방의 예국(濊國)과 최후의 전투를 하려고 덕고산(德高山=태기산)에 이르러 군막(軍幕)을 치고 산성을 축성, 병마를 훈련시켰다. 태기왕의 부하 중 삼형제(森炯濟)와 호령(號令)의 두 장군이 있었다. 삼형제 장군은 삼형제봉에 진을 치고 군사 3백명으로 일대를 이루고 호령 장군은 호령봉(現 회령봉)에 군사 5백명으로 진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웃 땅 진부면 도주골(現 도사리)로부터 예국의 대군이 쳐들어 와 호령장 군과 그 밑의 군사들을 전부 멸하고 태기산으로 몰려 왔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삼형제 장군은 진을 버리고 군사를 몰아 태기산성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산성이 함락(陷落)되고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고는 태기왕을 호위하여 산성을 벗어 급히 피난을 하였다. 태기왕은 워낙 당황하였는데다 적군의 추격(追擊)이 급하여 피난하던 중 옥산대(玉散臺;現안흥동)에서 옥새(玉璽)를 잃어버리고 왕유(王留)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멸인(滅人;現 면온)에 도착했다.
태기왕의 막하에는 삼형제(森炯濟) 장군과 호령(號令) 장군이 있었다. 두 장군이 맥국 군사를 통솔한 셈이다.
삼형제 장군은 삼형제봉에 진을 치고 군사 3백명으로 일대를 이루고 호령 장군은 호령봉(現 회령봉)에 군사 5백명으로 진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웃 땅 진부면 도주골(現 도사리)로부터 예국의 대군이 쳐들어 와 호령장군과 그 밑의 군사들을 전부 멸하고 태기산으로 몰려 왔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삼형제 장군은 진을 버리고 군사를 몰아 태기산성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산성이 함락(陷落)되고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고는 태기왕을 호위하여 산성을 벗언 급히 피난을 하였다. 태기왕은 워낙 당황하였는데다 적군의 추격(追擊)이 급하여 피난하던 중 옥산대(玉散臺;現안흥동)에서 옥새(玉璽)를 잃어버리고 왕유(王留)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멸인(滅人;現 면온)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왕을 호위하던 군사들이 전멸하여 더 이상어찌할 수 없게 되자 삼형제 장군은 단신으로 왕을 모시고 백옥포(白玉浦;白衣의 장군이 왕의 옥체를 업고 물에 빠졌다 하여 부르는 이름)에 투신(投身)하여 최후를 마쳤다. 태기왕이 예국군에게 쫓기어 피난하다가 해가 저문 곳이라하여 무일리(無日里)라 했는데, 지금의 무이리(武夷里)가 바로 그 곳이다. 봉평 덕거리에 덕고산이 있고, 평촌리에 삼형제봉이 있으며,흥정리에 호령봉이 있다. 진부면에 두루골(도사리)이 있으며,무이리·옥산대·면온 등의 지명이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맥국 태기왕 전설은 그 현장성이 지명과 얽혀 내려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