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지리지 평주 낙랑군
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 3,700
朝鮮-周封箕子地。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鏤方 駟望
● 낙랑군 교치설의 자치통감 기록
辽东张统据乐浪、带方二郡,与高句丽王乙弗利相攻,连年不解。
乐浪王遵说统帅其民千馀家归廆,廆为之置乐浪郡,以统为太守,遵参军事。…
요동인 장통은 낙랑, 대방 두 군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면서
해가 바뀌어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낙랑인 왕준의 설득으로 (장통이) 그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를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해 주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에게는 군사 관련 참모를 맡게 하였다.
>북위 영주
樂良郡〈前漢武帝置,二漢、晉曰樂浪,後改,罷。525正光末復。治連城。〉領縣二,
戶二百一十九 219 口一千八 1,008명
永洛〈正光末置。有鳥山。〉 帶方〈二漢屬,晉屬帶方,後罷。525正光末復屬。〉
> 북위 북평군 北平郡〈秦置。〉領縣2 戶四百三十 430 口一千八百三十六 1,836
朝鮮〈二漢、晉屬樂浪,後罷。432延和元年 徙朝鮮民 於肥如,復置,屬焉。〉
한과 진때의 낙랑군 속현이며 후에 폐하였다. 432년 조선민을 비여로 옮겨와 다시 조선현을 설치했다.
(432년 북위가 북연의 화룡성 공격)
新昌〈前漢屬涿,後漢、晉屬遼東,後屬。有盧龍山。〉
> 북위, 동위
남영주 樂良郡〈537天平四年置。〉領縣一, 戶四十九 49 口二百三 203명
永樂〈540興和二年置。〉영락현
● 낙랑군 인구이동 : 고조선 인구의 이동
서진 戶三千七百 3,700 =>
모용외 其民千馀家, 1,000戶 =>
북위 낙랑군 戶 219 口 1,008명, 북평군 戶 430 口 1,836명 =>
북위, 동위 남영주 낙랑군 戶四十九 49
호수 戶 3,700 => 1,000 => 219 / 430 => 49
인구 3,700*5 => 1,000*5 => 1,008/1,836 => 49*5
서진시절 3,700호로 낙랑군 유물을 생산소비 했던 흔적이 대동강 유물로 남았다면,
모용외에게 낙랑군이 교치된 이후 1,000호로도 낙랑군 유물을 생산소비 할수있다고 봅니다.
즉, 낙랑군 유물의 연속성을 증명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수는 없는거죠.
고조선 백성들이 여전히 저런식으로 이동하며 흔적을 남겼고
북경에서 발견된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의 무덤으로 큰줄기는 알고 있는거죠.
조선현이란 명칭으로 계속 끌려다니던 고조선 유민의 자부심은 확인되었습니다.
대동강 유물과 대릉하 유물의 연속성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
없다면 원래부터 대릉하 부근에 낙랑군이 있었다가 될겁니다.
연속성이 있다면 대동강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존 통설이 힘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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