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관리들은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영의정 허적은 14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한다. 다만 현종은 "다른 사람 다 나가도 너는 안된다."라며 허적을 잡아둔다.
이젠 서울마저 시체로 가득찬 거리가 되었다. 시체를 치울 가족들도 기근으로 죽거나 떠나서 시체를 치울 사람이 없었다. 오늘날 서울시 공무원인 한성부 관원들은 숫자가 적고 이들마저 기근과 역병으로 사람이 없어서 시체를 치울 수가 없었다.
결국 시체치우는 일에 승려들까지 동원이 된다. 기록에 따르면, 수천 구의 시신을 합동 매장한 일이 꽤 많았다고 한다. 경신년동안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5만 2천 여명이 보고되었고, 이중 절반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는 사망자 비율이 무려 54%였다고 한다.
이정도 상황까지 오면(솔직히 이게 지옥이 아니면 뭐가 지옥일지..) 사람도 동물이 되어버리는데 조선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 유교국가에서 천륜도 인륜도 다 저버리는 상황까지 와버린다.
부모들이 아이를 강에 버리고 가는 상황이 일어난거다. 배식 대기 중인 부부 중 남편이 죽었는데, 아내는 신경도 안쓰고 남은 죽까지 다 먹은 후에 슬퍼했다고 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고, 지옥의 하이라이트 즉 카니발리즘까지 일어난다.
인육, 식인이 보고되었습니다. 평소였으면 나라가 왈칵 뒤집어졌어야 정상이지만 이 당시에는 워낙 흔한 일이라... 승정원에서는 "굶주림이 절박했고 진휼이 허술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라고 담담하게 기록할 정도였다.
이쯤되니 정부는 뭐하냐, 조선정부의 무능이란 의견이 나올만도 한데, 조선 정부는 오히려 솔직히 잘 대처한 편이었다.
먼저 경신대기근 시기 지구 전체를 보면, 당시 17세기는 지구 기온이 1도 떨어진 소빙하기 기후가 나타난 때 였다. 말이 1도지 지구 기온이 2도가 떨어지면.. 인류가 매머드처럼 얼음으로 변하는 재앙이 펼쳐질 정도로 당시 기온 변화는 심각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강남 지방의 감귤농장이 전멸했고, 텐진 운하 결빙기간이 길어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심지어 에티오피아도 눈이 1년 내내 녹지 않았다.
그리고 현종시기는 예송논쟁도 있던 시기라 일본인들은 나중에 "당파싸움으로 싸우다 다 죽은거 아니냐"라고 말하지만, 왕궁까지 전염병이 퍼진 상황이었다. 솔직히 세종대왕, 엘리자베스 1세, 강희제 어떤 명군, 성군이 와도 대처가 불가능할 정도의 천재지변이었다.
그나마 조선이 어느정도의 행정력이 있어서 나라가 안망하고 버텨낸 것이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대기근 때 자유방임주의를 따른다고 그냥 내버려 두다가(보이지 않는 손)이 온 국민을 다 죽였다.
단적으로 우리의 예송논쟁을 비난하는 일본역시 텐메이 기근 시기 일어난 잇키(봉기)의 발생 수를 보면, 조선 정부는 그나마 대처를 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신 대기근의 영향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a) 대기근으로 재상급 인사들도 죽었다고 말했는데, 이중 화폐발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병조판서 김좌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b)그리고 양반들이 엄청 거부하고 있던 대동법에 대한 여론이 확 바귄다. 대기근으로 살아남은 백성들이 그나마 대동법 때문에 세부담이 적어서 그랬다 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대동법에 대한 지지는 하늘높이 솟구쳤다. 실제로 충청도에서는 결당 10두인 세금을 12두로 높이는 한이 있어도 대동법을 계속 시행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였다.
c)불행한건 24년 뒤 을병대기근이라는 2년의 대기근이 또 찾아왔는데.. 그땐 이때를 교훈삼아 청나라에서 3만 석의 쌀을 수입하게 된다.
d)대기근으로 발생한 다수의 유민들은 북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들이 북방, 만주지방으로 많이 떠나면서 자연스레 청나라와 국경분쟁이 일어나는데, 백두산 정계비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 경신대기근 이후의 숙종 때 발생한다.
e)경신대기근을 잘 버텨낸 조선의 체제는 을병대기근 이후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도참, 미륵 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장길산이란 유명한 산적이 등장하게 된다.
f)또한, 경신대기근 이후 17세기 사회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농장 해체의 경향, 노비제도의 완화 및 사회의 근본적인 해체 국면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서울에 모든 것이 집중되는 경기집중 현상도 이때부터 일어나게 된다.
g)그리고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2층 한옥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땔감수요가 급등해 삼림자원이 남용되기 시작한다.
조선 말기에는 과벌목으로 인한 토사 유실로 농업생산성이 하락했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