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鴨淥江)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략) 옛날 안촌홀(安寸忽)[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한다.]이었던 안시성(安市城).
鴨淥水以北 未降十一城(중략)安市城 舊安寸忽[或云丸都城]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고구려의 성 중 하나. 한나라 요동군에 안시현이 있었는데, 고구려가 그 지역을 접수하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름을 그대로 붙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험준한 지형과 방어하기 좋도록 지어진 고구려 성의 양식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난공불락의 성으로 남아있었던 걸로 알려진다. 그러나 안시성을 언급하는 사서마다 그 위치가 다르게 적혀 있거나 부정확하게 적혀있기 때문에 확실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다.
1) 통설: 영성자 산성이 안시성
해성시 동남쪽 8km의 영성자둔(英城子屯) 영성자촌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의 지리적 위치는 발해만 방면에서 수암(岫巖)으로 통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하며, 평원지대에서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전략적 위치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산성이 위치한 지형은 동쪽은 높고 서쪽이 낮은데, 성안에 계곡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은 산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았는데, 축조방식은 무순(撫順)의 고이산성(高爾山城)과 마찬가지로, 기초는 돌로 쌓고 그 위에 토석으로 골격을 쌓은 위에 흙으로 다져 덮은 방식이다.
성의 구조는 본성(本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진 복합식 산성인데, 외성은 본성의 서쪽에 접하여 구축되었다. 본성과 외성이 만나는 곳에는 치(雉)형태의 각대(角臺)가 시설되어 있다.
외성이 평지와 연결되는 부분에는 본래 성벽과 성문이 있었겠지만,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서 파괴되었다. 성벽의 총 길이는 본성이 3km 정도이고, 외성과 합하면 총 4.5km 정도이다.
본성에는 성문이 동서남북에 각각 4개가 설치되었는데, 평지와 연결된 서남문이 정문이다. 서남문지는 안쪽으로 들어간 옹문(甕門)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문지 양쪽에는 높은 토벽이 판축의 기법으로 축조되어 있다. 서남문의 남쪽에는 계곡물이 흘러나가는 수구(水口)가 한 곳 있다.
성벽을 따라 곳곳에 치와 각대가 설치되었으며, 성문과 치의 안쪽으로는 비교적 평탄한 대지가 구축되어 있다. 북문지 동편의 대지에는 건물지가 남아 있는데, 5세기 중엽의 고구려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산성의 축조 시기를 짐작케 한다.
성안에는 계단상의 대지가 여러 곳에 시설되어 있으며, 서벽 안쪽의 경사면에는 장대(將臺)가 남아 있고, 5곳 이상의 건물지 초석도 확인된다. 성안에는 수뢰(水牢)라고 부르는 돌로 쌓은 유적지가 3곳이 있는데, 길림시(吉林市) 용담산성(龍潭山城)에 보이는 수뢰·한뢰(旱牢)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성안에서는 고구려시대의 유물은 물론 요(遼)·금(金)대의 화폐와 철제품도 출토되고 있다. 산성의 동남쪽 모서리 바깥으로는 인공적으로 쌓은 작은 토산이 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으로 비정된다. (통설)
2) 통설의 문제
소위 지금의 학자들이 안시성이라고 비정하고 있는 해성시(海城市)에 있는 영성자성(營城子城)은 안시성이 아니다. 중국인들도 덩달아 이곳을 안시성이라고 지도에 표기해 놓았다. 위 지도에서 보는 바와같이 영성자성은 겨우 40여채의 집들이 있다. 이곳에 어찌 10만명의 군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성문이 동쪽으로 나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나 있다.
3) 통설에 대한 반론, 관련기사
신동아 - [신동아 9월호/현지취재] ‘잃어버린 땅’ 고구려 고토(古土)를 가다 ● 삼국사기의 ‘東’자를 해석하지 않은 역사학계 ● 지안(集安)엔 국내성 아닌 황성이 있었다● 장수태왕은 이북 평양으로 천도한 적 없다● 말로만 식민사관 탈피, 실제론 일제 史觀에 묶여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조선사다. 조선사는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폈다고 써놓았다. 일제는 고구려의 힘이 제대로 알려지는 것이 싫어 이렇게 했을 수 있는데,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여 앵무새처럼 그대로 사용해왔다....만리장성 근처까지 차지
당나라 때 ‘두우’라는 중국인이 만든 책 ‘통전(通典)’에는 ‘’지금(당나라 시절) 북평군 남쪽 20여리는 고려(고구려) 땅인데 그곳에 좌갈석이 있다[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라고 해놓았다. 이는 고구려가 좌갈석산을 차지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의무려산을 넘어 산해관 근처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만리장성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의무려산도 넘어가지 못한 모양으로 고구려 최대 영토를 그린다.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잘못 비정했으니,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도 좁게 그리는 어리석음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웃는 것은 통전을 비롯해 많은 사서와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땅을 차지한 중국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언제 식민사학에서 벗어날까. 고구려의 원혼이 땅을 칠 노릇이다.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4) 통설에 근거한 해성의 안시성 3D 이미지
3D 이미지 안시성
5) 통설을 점검하고, 안시성의 위치를 다시한번 점검하면 좋은 듯 합니다.
다음은 통설에 근거한 현 영성자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일으킨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전쟁초기 개모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을 적에게 빼앗기며 수세에 몰렸으나, 안시성전투에서 승리하여 당나라를 물리 칠 수 있었다.
사진에서 왼쪽으로 안시성으로 추측되는 영성자성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당 태종 이세민이 매일 일만 여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60일 동안 쌓았다는 토산의 흔적이 보인다.
중국 요녕성 해성시 팔리진에 위치한 안시성
현재 안시성은 중국 요녕성 해성시 팔리진에 있는 영성자성(英城子城)으로 추측되고 있다. 안시성의 현재 지명인 영성자성은 인근에 중국 군부대가 주둔하는 관계로 원칙적으로 외국인의 왕래가 금지되어 있다.
안시성으로 추측되는 영성자산성 표지석
안시성은 둘레 2.5킬로미터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로 서남쪽 앞은 비교적 평지이며 동북쪽은 높은 산으로 막혀있다. 안시성은 중국 당나라가 고구려에게 패배한 전투지역이어서 그런지 중국 정부에서 관광지로 개발하지 않아 영성자산성이라는 표지석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또한 흙과 돌을 섞어서 성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성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곳 안시성은 고구려 군인과 주민 10만 여명이 당나라의 30만 대군과 4개월동안 전투하여 그때까지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당 태종 이세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겨준 장소로 조국을 지켜낸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팔리진 마을을 멀리서 보면 안시성 동쪽으로 당나라 군인들인 만든 인공 토산의 흔적이 보인다.
요동성과 건안성 사이에 위치한 안시성의 위치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은 3갈래의 길로 30만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입하게 된다. 요동대행군 대총관으로 임명된 이세적은 6만의 선발대로 심양지역에 위치한 개모성을 함락 시키고 남쪽으로 내려와 당 태종의 친정 군 20만과 합류하여 요양지역에 위치한 요동성마저 함락시켰다.
이어 요동성 북쪽 등탑시에 위치한 백암성에 다다르자 백암성주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하게 된다. 또한 남쪽으로는 당나라 장량이 이끄는 500여 척의 배와 수군 4만3천 여명이 비사성에 상륙하여 비사성을 함락하게 된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든 천리장성에 있는 산성 중 안시성과 건안성 신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나라에 함락되어 안시성마저 당나라에게 빼앗긴다면 당나라군이 막 바로 수도 평양성으로 향하게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성주 손대음이 당 태종에게 항복한 백암성
이때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연수, 고혜진 장군에게 15만의 고구려, 말갈 연합군을 안시성 동남쪽에 주둔시켜 당나라 군대와 대치하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 고연수, 고혜진은 안시성 동남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 군에 포위되어 당 태종 이세민에게 항복하고 만다.
지원군이 패한 후 스스로의 힘으로 당나라를 막아낸 안시성 모습
고구려 지원군이 패한 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 안시성 군인과 주민은 스스로의 힘으로 당나라 대군에 맞서야 되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군인과 주민 10만 여명과 함께 4개월 동안 당나라 군대와 싸워 안시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를 지켜내게 된다.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당나라 서기에는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이름이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쓰여진 송준길의 <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 야사에만 나와 양만춘 장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6) 통설에 반발하여, 주장되는 안시성의 위치(아래)
10만 대군이 주둔이 가능한 토성지와 토산이 현 만리장성 인근, 산해관 지역에서 발견이 되야하는데, 뚜렷한 유적지가 없어서 지도상에서만 안시성의 위치가 난립함. 현 해성이 몇가지 부분에서 미흡하긴 해도, 유적지로서 또 안시성에 부합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에,당장 부정되기는 힘듬 사료적으로 현 영성자산성이 부적절한 부분이 있으므로 빠른 유적 탐사가 요구된다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