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받침대(대석)가 없는 비석도 있나?
호태왕비는 대석도 없이 민가 옆에 세워졌는데 발견 때까지 그 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조선과 청나라 기록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1900년대 초의 태왕비는 아예 받침석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무게가 37톤이나 되고, 높이가 6.3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세우려면, 지반침하를 막고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큰 받침대(대석)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런데 사진으로 본 1900년 초의 비석은 받침대(대석) 없이 그냥 땅 위에 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받침대도 없는 상태에서 지반침하도 없이 1,500년을 버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재 광개토태왕 비에는 가로 2.7m x 세로 3.35m 높이 약 20cm의 화강암 받침대가 있는데 3부분으로 나뉘어 깨져있다. 그리고 받침대 가운데 비가 서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끝에 비가 있다는 것이다. 비신이 있던 부분은 현재 약 5cm 가량 침하되어 있고, 대석 전체가 15-20cm 침하되어 있다. 받침석이 비에 비해 너무 작고 형편없이 조잡하고 약하다보니 약 140년만에 이렇게 침하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 전성기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최초 비석을 세웠을 당시에는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37톤의 하중을 견디기에는 너무 작고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침하된 것이다.
비가 옮겨졌다는 단서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 있었다"는 만주 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버리고 가버려 누워있던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지금처럼 세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석이나 관석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조선상고사>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 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37톤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깨어져 있는 받침석. 이렇게 깨어진 것으로 보아 이 받침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다.
2. 관석도 없는 비석이 있나?
조선왕조 사대부의 묘비에도 대부분 관석를 세우는 법이다. 하물며 아시아 대륙의 패자인 고구리 광개토태왕의 공적비인데 관석을 안 세웠을 리가 없다. 현재의 호태왕비도 상부는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상부에 가공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삿갓형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관석은 엄청나게 컸을 것으로 추정되어 인력으로 쉽게 오르내리기에 분명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비가 있던 장소에서 관석을 내리고 비를 배로 옮긴 다음, 집안으로 와서 37톤 짜리 비를 세우고 다시 관석을 올리기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관석은 어딘가에 버리고 비석만 달랑 받침대(대석)도 없이 세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를 세우려면 비문의 기록과 같이 산릉(山陵)에 올려야 하는데 비가 워낙 크다보니 편의상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비석만 그냥 버린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 비의 윗부분은 가공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는 삿갓형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 세워진 대청황제공적비에도 조각형 관석과 거북이 모양의 대석이 있다.
3. 비문의 기록과 다르게 평지에 있는 비석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 九月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갑인년 9월 9일 을유날에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한다."고 조각되어있다.그럼에도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돌무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광개토태왕의 릉인 태왕능(太王陵)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평지에 조성되어 있어 분명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이는 누군가가 비를 옮겨다놓고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근처 피라미드 무덤 근처에 갖다놓은 것으로 보인다. 37톤 짜리 초대형 비석도 옮기는 판에 그까짓 작은 벽돌 옮기는 것쯤이야 쉬운 일 아니겠는가! 이 무덤이 어느 왕조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 집안에 있는 이 호태왕비는 과연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광개토태왕 비가 옛날 중원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조선의 기록에 없는 것이고, 또 그 비를 누군가가 옮겼기 때문에 대석과 관석도 없이 비문에 기록된 산릉과 다르게 평지에 비가 서있는 것이다.
그리고 옮겨졌다면, 비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운송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고, 아마 강을 따라 선박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최근 광개토태왕 비석의 돌 성분이 집안 근처의 산에 있는 돌 성분과 다르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위 지도와 사진에서 보듯이 태왕릉은 산지가 아닌 압록강변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