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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2 02:48
[일본] [펌] 1조작된 역사로 억지 부리다 처참하게 깨진 어느 원숭이1(스압있으나 읽어볼만한 가치있음)
 글쓴이 : 아드
조회 : 3,943  

좋은 글을 발견한 듯하여 퍼와봅니다.
스압이 있으나 일어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다시는 분이 뭐하시는 분인지는 몰라도 이런분들을 나라에서 대우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부자였다면 역사연구비를 후원하고 싶을 정도네요.
사실 저는 역사적 지식이 많지 않아 그저 방대한 지식량에 놀랄뿐이지만
이곳 가생이분들 중에 역사적 지식이 많은 분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 이종격투기의 순수승부사라는 분의 글을 퍼온 것이나 이분 또한 스크랩한 글이었고
  글의 최초 출처는 나와있지 않았습니다.
* 말투가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 몇몇 욕설을 xx로 순화시킨 것 말고는 원문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
인터넷을 하며 여러 사이트를 둘러보다 정말 대단한 장면을 목격했다.
다음 몇 가지 글을 링크할까 한다.
특히 그 글에 달린 댓글설전을 구경하면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수 없다.
antijap님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며 그 지식의 방대함에 찬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 설전 (다음 글들을 클릭 후 그 댓글을 감상하세요! 또는 다음의 퍼온 댓글들을 봐도 됩니다.)
夏と松と海
내가 당신한테 뭘 기대할 수 있을지.. 그저 일본을 폄하하고 깎아내리는데에만 목적이 있을 뿐인것 같군요.
님은 이 글이 제대로 된 글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연대를 따지는 분이 이런 쓰레기 글을 올립니까?
그럼 야요이시대의 개막은 기원후 300년이란 입장이 님의 공식입장이신지 궁금하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님이 자료를 모으는 방식은 일단 일본보다 한국이 우월했으며 고대의 일본은 형편없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끌어모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기원론이며 님의 삐뚤어진 의식이죠.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열등감을 고대사를 통해서나마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말이죠. 불쌍하네요.
Mimesis
그저 폄하하고 깍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님이라고 여러번 지적하지 않았나요.

고조선의 존재가 없었다면 중국의 사서들은 다 뭐가 되는 겁니까.
그리고 가야왕국에 대한 연구도 옛날 식민사학자들 주장 그대로 발전못했다라는 단정을 너무도 철칙처럼 믿고
그 후론 다르다 얘길해도 않듣는 님이야말로 한가지 목적하에 다른 모든 것을 꿰어맞추고 있질 않습니까.
그것이 순수한 학문 태도입니까. 다 본인의 연구인양 하는 것이 기본태도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님의 삐뚤어진 의식과 논리는 현재까지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반도의 영향만 벗어날 수 있는 조각이라면 전후 관계의 파악도 않고 끌어모아 이어대고 있는 것이 님의 글들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님이 쓰레기라고 하는 윗 글에 대해 정확히 근거를 대는 사람은 저역시 못봤습니다.

다른 견해로 논의를 하려면 하나하나 근거를 비교해야지요.

서기 연도가 일이년 틀려도 아 그것은 당시 대세가 이거니까...역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무슨 헛짓거리들입니까. 그게.
그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실상이고 그것에 올려져 있는 의견 하나가 님은 정설이라고 궤변을 늘어 놓고 있는 사실을 알고는 있습니까.

정신 차라라고 몇 번을 멀해야 본인이 삐뚤어짐을 깨닫는 겁니까.

http://blog.daum.net/innomy/14324473 이런 글도 있고,
http://blog.daum.net/innomy/14324481
http://blog.daum.net/innomy/14324493
http://blog.daum.net/innomy/14324510
http://blog.daum.net/innomy/14324553 이런 지적들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실이 아닙니까?
사실이 아니라면 쓰레기라고 치부하며 말돌리지기 전에 아니라는 근거를 적시한다면 경청하겠습니다.

님이야말로 뿌리깊은 열등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우치지 못하겠다면, 정확히 알려드리죠.
더이상은 말돌리고 회피하고나서 딴소리하지 말고 윗 글에 대한 반론의 근거를 제시하세요.

그것을 못한다면...그리고 뒤에 가서 딴소리하는 것이 바로 역사적 열등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다른 헛소리는 다 필요없는 상황이고 근거를 회피말고 정확히 제시하기 바랍니다.
더이상 회피한다면 인간 축에도 못끼는 것으로 취급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습니까.
夏と松と海
제시하신 글들을 한번 관심있게 보려고 했는데, 보다가 이내 포기했습니다.
님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그 글들이 어떤 관점에서 쓰여져 있는지는 불보듯 뻔하니까 말이죠.
님같으면 누가봐도 일본깔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논조가 가득한 그 그글들의 내용에 대해 신빙성을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의 혐한주의자들이 한국인을 비하하기 위해서, 선전했던 글들과 사진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네요. 누누히 말씀드리죠.
자료를 가지고 오려면, 적어도 제대로 된 글들을 가져오십시요.
인터넷에서 떠도는 혐일론자들의 쓰레기 글들같은 것을 잔뜩 퍼와서는 이렇지 않냐고 말하는 님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혹시 대평유적에 대해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료가 있으면 부탁드리고 싶네요.
한국측 소스중에는 워낙 혐일론자들의 쓰레기 같은 글들이 많아서 참조할만한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제대로 된 글이 있으면 하나 소개해 주세요. 한국의 무문토시 시대의 유적들을 살펴보니, 변한지역에 집중되어 있더군요.
그중 대평유적이 규모도 크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기원전 4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요시노가리 유적간의 비교를 나름대로 해보고 싶군요.
변한지역에 살고 있던 무문토기인들이 부큐슈로 이주해왔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요시노가리의 기원연대인 기원전 400년경과 비슷한 시기에 대평등에 유적을 남긴 조선반도 무문토기인들의 인구가 급감했다고 해서요.
공신력 있는 자료를 소개해주시면 나름대로 감사하겠네요. 정말 제대로 된것으로요.
Mimesis
뻔하다면서 또 회피한다면 더이상 인간 취급할 수없다는 말이 않들렸습니까.
분명한 내용이 있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기에 근거를 못대는 겁니다.
그러고서도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제대로 된 근거 하나 제사 못하면서 제대로된 글을 가져오라는 비양심적인 ㅈ짓거리는 추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거짓으로 역사를 대합니까.
말장난은 그만 하세요.
다시 한번 말합니다. 윗글들에서 지적한 내용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夏と松と海
http://blog.daum.net/mallbest/13141654
나름대로 찾아보다가, 한겨례신문에서 보도했던 내용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적어놓은 주소가 그것인데요.
님의 해석은 어떠실지 궁금하군요.
Mimesis
요시노가리 유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들은 반도로부터 급격히 전래된 농경문화가 규슈 북부에서 세토나이카이와 기내,
동북지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며,
죠몬에서 야요이로의 변화는 이민족의 이입으로 이루어진 급격한 변화라는 것이다.
또한 600년경 맷돌이 전해지기 이전에는 벼이삭 분리가 힘들어 껍질째 먹었다는 지적이 있고,
주거문화도 요시노가리 유적 복원에는 망루등 많은 것들을 재현해 놓았지만
6세기 열도는 대부분 땅을 판 움집으로 타무라 엔초田村圓澄는 기술하고 있다......
이런 내용도 같이 검토되어야 종합적으로 역사를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겠지요.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러번 물어서 식상해지는군요. 반박 근거가 없으면 없다고 하시던가,
아니면 최소한 알아보겠다하고 찾아보던가 ...
근거 제시는 없이 이리저리 당면할 때만 모면하면 되는 일입니까.
夏と松と海
요시노가리 유적은 전형적인 환호취락이고,
나중에 이르게 되면 도시를 이중의 환호가 둘러싼 400헥타르 정도의 도시로 성장하게 됩니다. 환호가 무엇인지는 알고 계시죠?
후대의 일본의 성에도 보이지만 성주변을 둘러싼 해자와 같은 것입니다.
요시노가리 유적에는 전한시대의 청동거울, 중국 신나라시대의 동전, 그리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동경등도 발견됩니다.
중국왕조와의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는 증거죠.
초기 요시노가리를 건설했던 사람들은 조선반도의 대평등으로부터의 이주민이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중심지는 조선반도가 아닌 큐슈로 옮겨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이는 기원후가 되면 양유적간의 규모에서 역전이 이루어지고, 일본고유의 유물로 인정되는 청동투겁창이 조선반도의 대평에서 발견됩니다.
청동투겁창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던 신물이었습니다. 고대는 제정일치의 사회이므로 일본의 청동투겁창이 대평유적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요시노가리인들이 대평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http://www.pref.saga.lg.jp/web/yosinogari_ibutu.html 이곳에 들어가시면 유물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antijap
이거 웃기는 쪽바리네 아주 전형적인 견강부회를 하는구먼 요시노가리에서 지나식 청동거울과 동전만 발견되면
그게 당시 실체도 없는 겨우 1000명 내외의 사람이 모여 살던 자칭 왜 최대의 촌락이 지나와 교역이 활발한게 되나?
일개 촌락도 나라와 무역하나 ㅋ 그것도 본국인 가야 허락도 없이..쯧쯧..

참고로 한국의 고대 취락지역의 인구의 예를 들면 풍납토성의 경우 연대(年代) 측정한 결과 기원전 199년까지 나왔지.
아직 일부만 측정했기 때문에 기원전 3세기 정도까지는 올라갈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주변 인프라를 조사한 결과 풍납토성은 최소한 1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기원전 3세기에 그러한 도시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고대 한국과 왜의 국력을 이야기 해주는 거란다.

물론 풍납토성조차도 한국의 중심지는 아니라는 게야 한국의 중심지는 당시 북방이었으니까
고고학적으로 더욱 인구분포나 기본 인프라가 풍납정도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라는 이야기야.
고대에서 도시를 이야기하려면 인구 1만은 적어도 되어야 한다는 소리지 그런데
인구 1000명의 일개 부락정도의 요시노가리가 도시? 뻥두 작작 쳐라 쪽바라~

풍납토성 유적지는 조금 크니까 비교 대상이 안된다구? ㅎ 그럼 요시노가리정도의 유적지의 예를 들어 줄까 그런건 널려 있어 한국 남부에..
전라남도 담양의 태목리유적에선 말이다 마한(馬韓) 유적으로 고속도로를 공사할 때에 발견된 것인데
특별하게 이곳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집중발굴한 것이 아니라 공사중에 일부분만 발굴했는데도 주거지의 숫자가 435개나 발견된단다.

한 집안 당 보수적으로 잡아서 4명이라구 해도 거의 2000명에 육박하지 ㅋ 그건 일부니까 나머지 다 발견하면
모 얼마가 더 늘어 날진 모르지 ㅎㅎ 그런 기본적인 촌락이 한국에는 널려있다는 거야..
니들처럼 기를 쓰고 발굴해서 고작 1000명이 아니라..이칭구야..고인돌분포도나 고인돌 숫자만 봐도
그건 거의 상식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거지 한국이 세계에서 고인돌이 제일 많은 나라라는 건 알쥐이~쪽바뤼 ㅋ


그리고 요시노가리 유적의 환호취락이라는 게 그보다 년대기적으로 500년이상이나 앞선 진주 대평리 유적이나 그보다 훨씬 상한인
부여 송국리 것을 그대로 빼다 박아 놓은 듯 한게 무슨 대수라고 환호가 무엇인지 아시냐는 둥 설레발을 펼치시나.
짝퉁 대평리나 짝퉁 송국리가 요시노가리인 것은 아시나

요시노가리 후기 유적지에서(서기 1내지 3세기) 발견되는 지나식 동경 몇점과 동전이 나왔다는 것을 침소봉대해서
당시 실체도 불분명한 즉 1000명정도 모여 사는 곳이 고작이었던 당시 왜에서 뗏목타고 지나와 교역하나

정신 좀 챙기시게 쪽바리씨 서기 1내지 3세기면 왜는 이미 서기전 3세기부터 건너가기 시작했던 가야인들이 완벽하게 왜를 장악하던 시기야
요시노가리가 짝퉁 진주 대평리라는 의미는 한국식 청동기 기술과 한국식 자루달린 세형동검, 간석기, 유리대롱옥 경북 영천 어은리에서
출토된 한국식 동경과 판박이인 동경, 옹관묘, 아가리에 점토 두른 덧띠문늬 토기 , 무문토기 등등 모두 한국 그 자체의 복사판이라는 소리지

즉 그곳을 건설한 사람들은 가야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고 전기 야요이를 거쳐 후기 야요이인 1내지 3세기경 되면
모국인 가야를 통해서 수입된 지나식 동경이나 지나동전같은 거야 얼마든지 들어 올 수 있는건 역사가 아니라 상식이야
그걸 부풀려서 겨우 1000명정도가 모여 사는게 최대였던 당시 가야식민지 왜의 역량으로 지나와 교통을 해 푸하하하 犬笑

역사에 기본지식은 있는 쪽바리인가 이 친구는..ㅋ 야요이로부터도 훨씬 후인 삼국시대에조차도 백제와 신라에 얹혀서
지나에 사신을 파견했던 왜의 천박한 국력으로 그보다 훨씬 고대인 서기 1세기와 3세기경에 지나와 직접 교통했다고? ㅋ

귀 씻고 잘 듣게나 쪽바라 AD. 1세기면 이미 전기 야요이를 거쳐서 왜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모국 가야가 왜 그 자체였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를 통해서 왜가야였던 요시노가리에서 출토된 여러 문물들을 지나의 교역에 가야가 사용했을 터이고
그때 교역의 댓가나 교역상품의 일부가 왜가야인 요시노가리에 흘러 들어 오는건 당연한거 아닌가 ㅎ

그리고 이 멍청한 쪽바리는 청동투겁창이 왜 고유의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네 이 대목에서 한참 웃었어 ㅋㅋ
그리고 기원 후가 되면 양유적 간에 역전이 이루어진다고 소설쓰고 자빠져서 다시 한번 기암을 하고 웃었어요 ㅋ
덱끼 아무리 쪽바리라고 해도 그렇지 fact도 없이 우기면 되나 ㅋ
한국식 원형 청동기 투겁창을 제사용으로 길게 조금 倭式으로 변형시키면 그게 한국과 倭의 문화가 역전되는 건가 ㅋㅋ
달랑 그거 한점가지고..아놔~ 이거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여행보낸 쪽바린지 참..어이상실이네..
그리고 두번째 거짓말 진주 대평리에서 이주해 간 고대 한국인들이 뭐하려고 다시 청동투겁창을 가져다 쓰니 ㅋ
자기 머릿속의 상상과 역사적 팩트를 완전히 혼동해요 이 쪽바리 이런 정도의 역사지식을 가지고 주제넘게
무신 오지랍을 떨고 있는지 기가 차지도 않아서 원 ㅋ

먼저 첫번째 거짓말인 청동투겁창이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 누가 그러대? 쪽바리 우익이? 아니면 아키히토가? 아니면 니 소설?

니가 말하는 청동 투겁창은 후기 야요이시대에 왜가야에서 모국인 고대한국의 실전용 청동투겁창을 지나치게 길게 개조하여
장식용이나 제사용으로 개작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해야지 이 쪽바라
단순히 두루뭉술해서 청동투겁창이 '왜고유의 유물로 인정되는..'이라고 뻥을 치면 되겠니
그리고 니가 말하는 길게 개작된 청동투겁창이 '왜 고유의 것'이라는 것도 아직 추정일 뿐이란다. 쪽바라.

니가 말하는 짝퉁 '倭式 제사용 청동투겁창' 말고 원 청동투겁창은 말이다.
BC10세기경부터 요녕일대 서북한일대를 거쳐서 BC 3세기경 대전 괴정동, 화순 대곡리의 돌널무덤 등 주로 무덤유적에서 출토되고
이어서 기원 전 1세기경 경주 안계리일대 영천 용전리 고분에서도 출토되는 길이 20센티 이하의 원 청동투겁창을 말하고
그것은 (후기 요시노가리 유적으로서 AD1내지 3세기에 개조된 니가 말하는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져서 변형된 倭式 제사용 청동투겁창보다)
년대적으로 훨씬 이른 시기에 한국에서 발견되는데 무슨 얼어죽을 왜 고유의 양식 운운하면서 개가 풀뜯어 먹는 소리를 찍찍 해대는가 !!

그리고 요시노가리보다 적어도 500년은 빠른 진주 대평리에서 좃빨랐다고 이미 제사용으로 용도가 변형된 제사용 청동투겁창을
왜 수입해다 쓰겠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게 니 두번째 거짓말이란다.

니가 무식한 것 같으니 또 본좌가 정확하게 fact를 말해주마.
요시노가리에서 발견되는 倭式제사용 청동투겁창이 발견 되는 곳은 진주 대평리가 아니라
요시노가리의 모국인 금관가야의 양동리 고분 출토유물이란다. 그리고 AD. 4세기경에 발견되는 역시
가야계 유물인 고성의 송학동 고분군에서 출토된단다.
이 양동리와 송학동에서 출토되는 제사용 청동투겁창은 AD. 1세기에서 AD. 4세기 것이란다 뽁바라.

뭔가가 그려지지 않아? 아무리 무식한 쪽바리지만..니가 워낙 무식하니까 본좌가 다시 정리해주지
제사용으로 변형된 倭式 긴 청동투겁창은 倭의 본국이던 금관가야나 가야제국에서 의례용으로 식민지이던 倭가야에게
주조를 명하여 생산된 것을 본국에서 가져다 쓴 개념이거나 잘 봐줘야 같은 국가간의 물물교환 형식이라는 게 합리적이지,
실체도 불분명한 AD1세기 무렵 야요이시대의 倭가 자생적으로 문화를 발전시켜서 지나와 교통하고
본국인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다는게 말이 되냐 ㅋ 에라이 이런 후로꾸(니들말이지 이거 후로꾸-영어 倭에 가서 참 고생한다 ㅋㅋ)
같은게 아직도 설치고 다니나 정신챙겨라 쪽바라..ㅋ
Mimesis
antijap님...상당히 깊은 지식을 갖추고 계시군요.
제가 조리있게 정리못한 부분, 또 정확히 모르던 부분 일러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어쨋든 표현은 조금...따지고 보면 저역시 좋은 표현은 않 쓴 셈이지만 그래도 조금 표현이 쎄시네요^^
antijap
그리구 tip 하나 더 이 무식한 원숭아 요시노가리 유적이 400ha라고라고라..? ㅋ 공식적으로 알려진 요시노가리 유적지 크기가
40ha인데 그거 하나 구분 못 하고 400ha라고 뻥을 튀겨? ㅋ 40만평방미터가 400ha인거야? 그런거야 ? ㅋㅋ

이거 산수도 못하는 원숭이네 1ha는? 몇미터 곱하기 몇미터? 내가 니네 역사나 산수까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나 이거 원 ~ ㅎ

1ha는 100미터 곱하기 100미터=10,000M2 여기 까진 알겠지 ㅋ 그럼 40ha는 10000M2 곱하기 40=40만M2,
이 40만평방미터를 평으로 환산하면 대략 12만평, 왜 12만 평 나오는 지는 알지? ㅎ 100만평방미터가 1km2니까 40만 평방미터면
대략 한변이 600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의 사각형정도 크기네 그런데 그걸 뻥 튀겨서 400ha라고 10배를 튀기나 이 화상아 ㅋㅋ
기본도 안되어 있는 쪽바리와 무신 역사를 논하나 shiba神이시여 ㅋㅋ
(참고-吉野ケ里遺蹟-發掘調査槪報Ⅱ(佐賀縣敎育委員會, 1994), 吉野ケ里遺蹟展(佐賀縣敎育委員會, 1989)

아 그리고 기원전 7-8세기경의 청동기 유적지로서 한국의 송국리 유적지는 약 80만평방미터로
니들이 자랑하는 요시노가리같은 건 껨두 안되지 그것두 일부분만이야 아직 10분지 1도 다 발굴 안했거든
요시노가리에서 발견된 청동기들이 고대로 발견되는 송국리는 요시노가리보다 500년이나 위인데도 말이다 ㅋ
좀 공부나 하구 씨부려라 쪽바라..
Mimesis님./

아 -.-; 쪽바리에게 모 이런 표현 센것도 아니죵 ㅎㅎ 아주 찢어 발겼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무개념인 것들 보면요 ㅎ
夏と松と海
일본의 야마타이국이 큐슈에 존재했다는 것은 지금 정설처럼 되어있습니다.
요시노가리 유적이 당시 야마타이국의 수도였다는 것도 강하게 시사되고 있구요.
그곳 유적에서 전한시대의 청동거울과 왕망이 세운 신나라의 동전등이 발견되어 야마타이국이 중국왕조에 조공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일본의 야요이시대가 도래인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죠몬인이 자체적으로 문화수입에 의해 자체적으로 야요이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은 저도 믿지 않고, 일본학계도 인정치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죠몬시대의 문화양식이 계승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죠몬문화가 완전히 단절되어 도래인의 문화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뿐이죠.
조선반도에서의 출병을 통해 일본열도가 정복되었다는 주장을 한국인들은 많이 하는데,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때문에
신뢰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사료적 증거로 이야기한다면 일본열도에서의 출병을 통해 조선반도를 정벌했다는 쪽이 더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정황논리로도, 조선반도의 국가들이 일본열도로 진출하였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듭니다.
조선반도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삼국은 서로 왜의 세력을 끌어들이기위해 분주했습니다.
왜냐하면 왜는 세력균형을 허물고 힘의 우위를 차지하는데 일종의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선반도의 국가들이 일본열도의 정복에 나섰다구요?
고구려의 최전성기였던 광개토대왕시절 고구려군은 왜 백제 가야연합군을 격파하고 조선반도남부까지 진출했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에 일부군대만을 주둔시키고 조선반도전체에 대한 직접지배를 포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구려는 중국세력과의 계속된 항쟁관계에 있었기때문에 힘을 분산시킬 수 없었기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대 조선반도는 팽팽하게 유지되는 세력균형의 와중에 있었기에 이 항쟁에서 살아남아 국가를 존속시키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었습니다.
왜가 조선반도로부터의 압력을 피하고, 순조롭게 문물을 얻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조선반도의 정황이 있었기?문입니다.
이는 왜로선 더할나위 없는 조건이었죠.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조선반도의 국가들은 왜를 정복하는데 힘쓸 겨를이 없었고
오히려 왜의 세력을 자신의 동맹세력으로 만드는데 더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신찬성씨록의 도래계 비율도 교정드리자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입니다. 그 다음으로 백제 고구려가 뒤를 잇고
신라는 가장 적습니다. 신라의 영향력을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 같습니다.
Mimesis
광개토왕비 변조는 현장에서도 확인되는 일입니다. 사진을 올려드리죠.
정황논리는 필요가 없는 형편입니다. 유물들이 나타내는 증거들을 놔두고 정황이라니요.
왜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은 백제 입니다.
신찬성씨록의 가장 많은 비율이 중국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신라인, 조선인까지도 당인으로 불렀다는 기록들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정말 여러번 말하는데 정설이라고 자꾸 되뇌이는 근거를 데세요.
우익교과서인지 아니면 출판물인지 근거만 밝히면 그에 대한 평가는 쉽게 판별납니다.

일본열도 정복은 조작되었어도 근거가 남아있는 고사기, 서기에도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사료적 근거는 묘제,고분, 청동기, 철기유물의 연대적 흐름과 기록등 널려있습니다.

열도에서 출항도 못해 주유성으로 못돌아간다는 등의 기록 하나만봐도 캐스팅보트는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는 일이죠.
antijap
근데 이 쪽바리들이 기본적으로 웃기는 게 논란이나 허구적인 사료를 갖다 들이 민다는 거지..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사료나 fact에 근거 하지도 않고 진위여부로
거의 사료적 실증가치를 상실한 조작의 개연성이 높은 금석문을 증거랍시고 밀어 놓는 꼬락서니하고는 쯧쯧..

자 서로 논란이 있어 문제가 있는 사료라면 이것은 비교적 사료로서 가치 자체가 없는 거야
그러면 2차적 사료로서 한중일 3국의 사료를 비교해 보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그런데 이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학자는 하나도 없어
이렇게 간단한 건데도 불구하고 조작일 가능성이 100프로인 금석문을 가지고만 논하지 웃기는 거야

우선 가장 1차적인 사료로서 광개토대왕이 왜를 정벌한 신묘년조 당시의 니뽕서기를 보면 되잖아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니뽕 서기에 기록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 거잖아 안그래 saru?

그런데 saru 너 신묘년 당시의 니뽕서기는 읽어 봤냐 ㅋ 내가 단언컨대 안 읽어 봤을거야
물론 사료적 가치로서 니뽕 서기는 물론 40프로 정도의 공신력 밖에는 없지만
그래서 더욱 한중일 3개국의 사서를 크로스 체킹해서 알아 봐서 거기에 없으면 나가리시키는 게 수순이지. 안그런가 saru

그럼 신묘년조의 倭王이 누군지는 아나? 아마 모를거야 saru ㅎㅎ 니가 분명히 안 읽어 봤을 테니까
내가 한번 대신 갈쳐주지 辛卯年(391년)은 당시 조작된 니뽕 서기상 인덕왜왕인데

조작되었다는 말에 너무 신경 곤두세우지 마라 이말은 지나서기에 니뽕왕이 없다는 의미지
지나서기에도 기?되지 않은 왕은 결국 가공의 왕이라는 의미니까ㅋ
(니들 왕중에 지나역사서에 이름 올려진 왕들은 그냥 지나가 경멸조로 이름 부른 찬제진흥인가 하는 왜왕들 외에는
확인 되지 않잖아 그러니까 가공의 왕이라는 거야 ㅎ)

여튼 가공의 왕이든 모든 신묘년조 기사를 크로스 체킹 해야하니까 함 보자
391 년 전후해서 + - 10 년해서 381 년에서 401 년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한번 찾아봐 주지

그런데 말이야 ..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아 ? ㅋ

너도 궁금하지.. 이런 것이 적혀 있더구만..

'어느 나라에 머리가 2개이고 팔이 4개인 요괴가 있었는데 그 요괴를 무찌른 사람이 있고 그래서 누구의 선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연못에서 龍 인지 뱀인지를 죽였는데 ..
그 동물이 사슴으로 변신하고..'.그리고 ...없어 ㅋ 그냥 인덕왜왕이 잘 다스렸대..
요괴의 침략을 물리치고 잘 다스렸다고 그리고 아무 것도 없어 ..

그리고 재위 기간이 87년이라고 하대.. ( 그럼 몇살이 되는거야 ?) ㅋㅋ that's all이야
광개토왕비에 대한 기사는 눈을 씻구 봐두 없네

스스로 확인들 해봐.. ( 일본은 인터넷 후진국이라 일본서기 원문 site 가 없어서 좀 한심한 것 같아 요즘은 있나? ㅋ )
saru야 극우 사이비 역사학자들말 믿지 말고.. 비록 僞書에 불과하더라도 자기 나라 역사책좀 보고 스스로 생각들좀 하고 살아라~
머리는 장식이 아니란다 졸만아.

지나역사서에도 물론 없지 이마니시류가 적극 추천한 한국 삼국사(삼국사기는 이마니니 류가 격하시킨 것이다)에도 물론
신묘년기사는 전혀 없어

니네 역사서에도 없고 지나에도 없고 한국역사서에도 없고 조작의혹만 있는 금석문만 덩그러니 있다?
그럼 뭘 믿어야지 조작의혹을 믿자구? ㅋㅋㅋ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그리구 요괴를 잡아 죽이는 왕이 있는 니뽕 환타지 서기에 그럼 백제가 니뽕을 정벌한 직접적 기사가 남아있겠어 모두 조작했겠지
지금 남아 있는 니뽕 위서서기는 에도시대에 필사한 조작본이지
거기에서 무신 진실을 구해 그냥 만화책이지 모 극우 마스터베이션용 ㅋㅋㅋ

아 그리구 두번째로 역사서를 조사했으면 이제 당시의 고고학적 인프라를 조사해서 니뽕말이 맞나 봐야하지 동의하지 saru?

니뽕왕궁에 기와를 얹은게 언제 였더라? 391년이면 후기 고분시대인데 그때 1000명이나 되는 도시가 있긴 했어?
요시노가리 이후에 그정도로 인구가 밀집해 있는 도시조차도 없는 니뽕이 어디를 유린해? ㅋㅋ

말은 있었나 ? 철기는 제련할 수 있었나? ㅋ 함 찾아 줄까 그때 니뽕인들은 수혈식 집에 살 때라지(기원전 3세기 부터 12세기까지)
아 하나 더 7세기 말(693년)까지 왕의 거처인 기요미하라 궁에 기와도 얹지 못하고 판개궁형식으로 비루하게 살았다지

쉽게 이야기해서 왕이 판자집에서 산거지 7세기말이 되도록 ㅋ 당시 신라의수도 서라벌이나 백제의 사비
고구려의 수도 안학궁이나 굳이 예를 들것까지도 없네 ㅋ 고고학적 인프라가 이런데 니뽕이 어디를 공격해? ㅋㅋ
북한이 미국을 공격한 폭이네 재래식전쟁으로 ㅋㅋㅋ

지나 북사(6세기 -7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두 되었네

'有弓·矢·刀· ·弩·斧, 漆皮爲甲, 骨爲矢鏑. 雖有兵, 無征戰.
"활과 화살, 칼과 창, 노와 도끼가 있고, 옻나무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며 뼈로써 화살촉을 만들었다.
병사들은 있지만, 전쟁하지 않았다."

옻나무 갑옷과 뼈화살로 어디를 정벌한다고? 아! 나코우지 유적 잘 아나 saru?
6세기 이후나 되야 사철이 생산돼서 제련하게 하게 되네 ㅋ 그런데 어딜 정벌해?

3세기 말 편찬된 위서 동이전은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고 기록했네
말뼈 혹은 말과 관련된 도구들은 초기 고분시대에서 발굴된 적이 전혀 없어. ㅋ
반면 한반도에서는, 414년 세워진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407년 5만의 보병과 기병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나오지
(물론 이 부분은 조작 의혹이 없는 진짜배기야)

백제로부터 말의 공식적 도래를 니뽕 위서서기에 스스로 응신 15년(404)조에 기록하고 있네. ㅋ

말많고 탈많은 광개토왕비 말고 지나나 니뽕서기 한국 삼국사를 뒤져봐도 그 신묘년의 큰 사건에 대해서 일언 반구도 없어 그리고
고고학적 인프라를 봐도 왕도 아직 초가집에 살고 말도 없고 철도 생산 안되고 뼈촉 화살에 나무 갑옷에
어디를 건너서 어디를 침략해서 정벌을 해?

니 스스로 생각해봐도 한심하지 않냐 saru? 실증사학 주구 장창 외치면서
왜열도에만 들어 가면 모두 쌩까구 국수주의학자들 궤변만 OK가 되는 거야? 그러면서 무신 토론을 해 이 캐병진아 ㅋㅋ

그러니까 니 주장이란 근거가 없는 사상누각이야
솔직히 4세기말인 391년 부근에 군사 1000명에 기마병 300기만 보내면 倭는 어떻게 되겠어 ㅋ 한번 잘 생각 해봐

7세기에 왕궁에 기와를 얹는 기술적 인프라

6세기나 돼야 철을 생산하는 인프라

5세기나 되어야 말이 들어 오는 열악한 인프라

요시노가리처럼 1000명이나 되는 자생적 취락지조차 발견되지 않는 후기고분시대의 수혈식 움집에 사는 인구 인프라

8세기 말이나 되어야 겨우 당과 직통 바닷길을 여는 열악한 해상인프라

6세기 중반(541) 본국 백제의 명에 의해 관산성 싸움에 동원된 왜군 1000명 말이 100필이 고작인 열악한 인프라 등등

양직공도에 보이는 맨발의 사자에서 보이는 열악한 속국적 인프라

백제에서 쓰는 진동대장군의(후에 그보다 더 높은 정동대장군-영동대장군으로 더욱 높이 올라감) 칭호는 커녕
그보다 두단계 낮은 안동장군 칭호의 작위를 감수하는 명백한 왜의 관작에서 보이는 백제에 대한 종속성 ㅋㅋ

니가 보기에도 한심하지 않냐? 6세기중반에도 군사 1000명에 말 100필을 동원하는 국력인데
그보다 2세기나 전인 4세기에 군사 1000명과 말 300필 왜열도에 보내면 어떻게 될 것같애?

고사기나 니뽕서기는 환타지이자 열등감의 산물이지 거기에 그대로 피정복의 기사가 쓰여있어
그 메타포 해석하며 읽는 것도 아주 재미있지 추리소설이야 니뽕서기는 환타지 물인 동시에 ㅋㅋ

여기서 매일 상주하며 징징대지 말고 스스로 니네 부끄러운 역사라도 공부를 하렴..


Mimesis님 이런 쪽바리 인간같지도 않은거 하고 토론하지 마시고 그냥 접속 금지 시켜버리세요. 시간 낭비입니다.
답글을 달 가치가 있어야 달지요.
저렇게 살다가 되지게 놓아 두세요 저렇게 각성하지 않아야 그나마 우리가 앞으로 니뽕을 가지구 놀기가 좋지요
점점 니뽕의 국력은 쇠하고 우리의 국력은 흥하는 과도기에 말입니다. ㅎ
夏と松と海
시간이 없어, 간략하게 답글을 달죠. 이후에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4세기말이면 고분시대에 이르러 일본열도 전반에 걸쳐 대규모 전방후원분이 속속 만들어지던 시기죠.
전방후원분의 규모가 세계적임은 님도 잘알고 계시겠죠. 그러한 거대고분군을 넓은 범위에 걸쳐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세력이 출현했으며 수준높은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왜 역시 중국으로부터 가야와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칭호를 부여받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거구요.
왜는 중국에 대해 백제보다 높은 칭호를 부여해달라고 요구하자 중국이 거절했다고 하는데.
왜가 백제의 속국이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것입니까?
antijap
이 쪽바리 문제의 핵심은 피하고 고분으로 돌아가네 ㅋㅋ 어지간히 똥줄이 탔나 보네 고작 갖다 붙인다는게 고분건설이야 ㅋ

이미 본국인 한국에서는 BC3세기경에 끝나는 권위과시용 고분축조가 대단한건지 아나보지(물론 한국에서는 고인돌이었지만)
그러니까 니가 좃두 모른다는 거야 내가 하나 물어 볼게 너 300톤이상의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인구가 몇명이나 필요할 것같애?

지금 한국 남부지방에서만 300톤이상이 되는 고인돌이 4기나 발견되고 있지 그 300톤을 움직이려면
적어도 3000명이 한꺼번에 동원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남자 장정 3000명이면 당시의 관점으로 그 식솔들까지 합쳐서
거의 10,000명이 넘는 인구를 통치하는 도시가 있고 그 군장이 있다는 거지

니들이 자랑하는 고분시대보다도 거의 7내지 800년전에 고대 한국에서 그런건 식은 죽 먹기였다는 거야
근데 고분 만드는게 무신 큰 건축기술이야 사람 매일 부려서 흙퍼다 방분과 봉분 조성하면 되는 거야
그게 피라밋처럼 정교한 기술이라도 되나디 실제 외형만 컸지 내부야 무슨 건축기술이 필요하니
외형 축조하는 데도 무신 토목기술이랄 것 까지 있니 사람만 있으면 퍼다가 판축하고 쌓는거야 돌도 아닌 흙으로 말이다
그리구 주위에 해자 파고 하니와 배치하고 그게 뭐가 무신 기술이랄 것 까지 있나

중요한건 저런 뻥튀기 과시용 고분만 발견되고 거기에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시와 걸맞는 취락지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거지
500년에 건설된 미츠데라 유적지를 보면 허허벌판에 그저 달랑 고분만 있고 취락지는 없다는 거야
고분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인구나 사회적 인프라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거지

니뽕은 역사고고학이 발달한 나라이고, 엄청난 발굴이 매년 행해지지만 고분시대 일본에서 도시유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아.
그것은 당시 일본의 인구가 그만큼 희소했다는 뜻이지. 물론 당시 니뽕이 인프라가 별로 없는 미개상태이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작은 도시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구밀도가 굉장히 낮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오죽하면 오사카에 고분시대 창고가 여러개 발견되어서 그것이 고분시대의 유명한 유적이 될 정도지
취락지가 아닌 지상건물 유적만 발견되어도(왜 당시 니뽕인들은 반지하 수혈집에서 살았으니까 ㅋ) 그것은 중요한 것이야.
그것이 바로 고분시대 일본의열악한 인프라지.

니뽕에서 닌도쿠 왜왕릉이 최대니 어쩌니 하며 뻥을 치는데 그것도 실은 개뻥이야 함 볼까
니뽕은 2000명의 사람이 15년 8개월 이상 걸린 최대의 능이라고 하지 그런데 가끔 하루에 동원 가능한 2000명은 쏙 빼고
가끔 연인원 6백8십만7천명만 강조하는 잔머리를 굴리지 ㅋ (古墳を造るのに働いた人は延べ6,807,000人で、
一日当たりピーク時2,000人が働いたとして工事期間は15年8ヶ月以上かかった計算になります
(以上、大林組プロジェクトチーム「王陵」『季刊大林・第20号』1985年より)。http://www.city.sakai.osaka.jp/hakubutu/ninhya.html )

즉 하루 고작해야 2000명 동원이 최대치라는 게야 그런데 위에서도 봤지만
이미 한반도 남부지방에서는 각지역의 호족들도 3000명정도는 하루에 너끈하게 동원하지 차이는 돌멘이라는 것과
흙으로 만든 고분이라는 것 밖에는 없어 냉정하게 분석해서 당시 왜열도의 인구는 30만에서 50만정도라는 거야
인구밀도가 진짜 희박한 거지 서기1세기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는 250만 열도는 30만 정도 고분시대 정도 되면
열도 인구가 한 50만 정도 된것이라는 게 고고학적 유물로 보는 추정되는 수치지.

니뽕은 요시노가리 이후에는 이렇다할만한 취락지가 안나와 그런데 한국에서는
송국리의 아직 미발굴지역만 0.61km2 울산 신화리는 3km2 남강 유적은 3.6km2야 요시노가리가 0.4km2니까 엄청난거지

그것도 요시노가리보다 거의 500년전에 말이야

이런 것들이 고분시대보다 거의 1000년전에 한국남부에는 널려 있었다는 거지 한국에서는 이미 고분시대 보다 1000여년전에
인구밀도라든지 기본 경제 인프라가 완비되고 포화되었기 때문에 니뽕으로 이주를 했던 게야
한국에선 더 확장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한국의 청동기인들이 그래서 야요이부터 벼농사 짓고 고국 한국으로부터 문물 받아 들이고 했지만 끽해야 고분시대가 되도
하루에 2000명 동원해서 그것도 15년이나 걸려서 흙으로 무식하게 쌓는 고분 만드는 거 외에는 할 수 없었던 거지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무식하게 흙으로 쌓아놓은게 무신 자랑이야 ㅋ

그 시기에 고국 한반도는 쥐나와의 전쟁과 3국간에 쟁패를 하며 서로 정립할 시기니
솔직히 니뽕처럼 비효율적이게 권위만 자랑하고 실속은 없는 고분 만들 이유도 없었던 게지

그리고 그 고분안에 까보면 뭐 나와? ㅋㅋ 다 가야나 백제 유물아니냐 그런데 그걸 자랑이라고 하냐 이 쪽바라
가장 중요한 것은 왜는 항시 백제의 진동대장군보다 2계급 낮은 직위였지 즉 백제의 왜 총독인 왜왕은 安東장군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이다.
특이하게 왜왕 武가 정동대장군까지 올랐으나 역시 백제 무령왕의 영동대장군에 비해 품계가 낮지

(讚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宋書)

(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宋書)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藩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宋書)

왜왕 무의 급격한 승차기록
1)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宋書)
2)(順帝昇明二年遣使上表曰..중략..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宋書)
3)(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鎭東大將軍).(南齊書)
4)(梁武帝卽位進武號征東大將軍)(南史).

(그리고 이는 여담이지만 倭武왕때 관례에도 없던 안동대장군-진동대장군-정동대장군으로 급격하게 승차하는데
왜왕 무는 사마라고 불리던 곤지의 아들이자 개로왕의 實子로서 곤지에게 한성백제가 장수왕에게 침공을 당하기 전
개로왕의 명에 의해 개로의 妃를 곤지에게 붙여서 왜의 총독으로 보내고 왜 총독으로 부임하던 개로의 아이를 임신한 채
곤지에게 시집을 간 개로의 비가 각라도에서 개로왕의 아이를 낳는데 그가 사마이다.

후에 사마가 왜왕으로 등극하면서 쥐나에 스스로 안동대장군으로 제수를 품의하여 안동대장군으로 제수받고 1년후이자
개로왕이 죽은지 3년째인 479년에 남제서에 등장해서 아비인 개로의 작위였던 진동대장군-전통적으로
항시 왜에 비해 두단계 높던 바로 그 작위-을 자동 승계하고 이어서 백제 동성왕이 백가의 란에 의해 살해 된 1년 후에
백가의 난이 진압되자 마자 왜무왕은 동성왕이 쓰던 정동대장군을 물려 받는다.

그 이후에는 왜왕무가 역사무대에서 사라지지만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무령왕이 백제에서 정동대장군보다 더 높은 직급인
영동대장군을 제수받지. 전통적으로 백제는 왜왕보다 2계급 높은 진동대장군임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때에만 그런 승차의 단계적 기록 없이 영동대장군으로 단번에 품계가 승진했다는 사실은
倭武王이 동성왕을 시해한 자를 응징하고 본국 백제의 왕으로 승차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인정한다.)

이게 무엇을 말해주는 지 알아 saru? 강의료 받아야 하는데 saru 내가 강의료는 안 달라할테니
여기 쥔장에게 배울 수 잇는 장을 마련해주셔서 고맙다는 의미로 sake나 한잔 올리거라 ㅋ 여튼 니 무식을 좀 깨우쳐 주지

당시 고대의 동북아 질서는 만주 원류고에서 나오듯이 백제는 후국을 둘 수 있는 제후국이었다는 거지
즉 왜를 그 휘하에 두고 있었고 그러니 당연히 왜보다 국제적으로 위상이 높았다는 것이고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쥐나 입장에서는 백제의 속국인 왜에게 낮은 직급을 수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그 후국중의 하나인 왜와 신라에게 칠지도를 하사해서 충성서약에 답한거란다.
백제의 후국이라고 쥐나의 역사서에도 기록된 신라에서 칠지도가 발견 된 거 알지?
그리고 니들이 야스리로 삭삭 갈아서 치졸하게 왜곡하려 했던 칠지도가 왜 이소노카미진쟈에서 발견 되었겠니?

거기다 흑치상지의 묘비명에서도 나오듯이' 흑치는 본래 부여씨인데 흑치라는 곳에 분봉을 받아서 성을 흑치로 하였다'는
기록에서처럼 백제는 왕족에게 새로 정복한 곳을 분봉하여 통치하게 하고 그 지역의 이름으로 성을 하사하는 거지.
다라서 당연히 지금은 왜왕이 과거의 백제 꼬붕 노릇을 부끄러워하여 성이 없다고 생구라를 까지만 쥐나역사서를 보면
倭라고 분명히 성이 붙어 있지 /安東將軍『倭王倭濟』-進號安東大將軍 -宋書本紀第五文帝-


칠지도하사, 왜왕의 성은 倭氏(실제는 왜의 백제 총독), 백제보다 2직급 낮은 품계가 무엇을 말해주겠니 이 왜눔아 ㅋㅋ

당시의 5세기에는 당연한 백제의 분국으로서 영광스러웠던 후국의 역사가 황국사관으로 재탄생하는 에도 막부 말기에는
치욕이었던 거지 그래서 그걸 야스리로 삭삭 가는 도둑놈같은 짓을 했지 이게 니 조상들의 행태란다.

참고로 고구려의 관작은 거기대장군으로 쥐나의 천자 바로 아래의 최고 직급을 받았지 그게 냉혹한 국제 질서야.

그리고 신라나 가야를 집어 넣어서 쥐나에게서 책봉받은 적은 있지 그런데 그게 한반도내의 신라나 가야냐? 하면
어림도 없다는 소리지

한서지리지는 "일본은 왜국의 별종"이라 했다. 왜열도내에만 왜국이 있었다면 "왜국의 별종"이란 표현은 성립될 수 없다.

즉 야요이이후 고분시대 전기까지는 가야인이 대거 규슈지역에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니뽕은 숙명적으로
"가야에 예속된 왜국의 별종" 혹은 "가야국의 분국"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백제계가 정권을 잡은 이후인 5세기의 열도에도 가야계 새력은 규슈등지에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가야계만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 온 출신국가나 지역성향에 따라
니뽕열도에서 분국이나 세력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의미이다.즉 5세기에도 니뽕 내부 자체는 아직 정리가 안된 상태였다.
규슈와 기내 따로 따로 아직 열도 자체도 완벽하게 통일 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거기다 한반도에서 신라가 통일하고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 후인 7세기 후에도
고구려 신라 백제 사신이 야마토 정권에 조공을 한다는 기록에서도 보듯이
기내의 야마토 왕조가 통제하지 못한 신라 가야의 분국들이 당시 5세기경의 규슈나 열도에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고
그 분국들은 느슨한 형태로 신라통일이후에도 관례적으로 그 전래의 명칭을 사용하며 규슈등지에 존속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니뽕이 쥐나에 상소를 올려서 전통적으로 백제보다 2단계 낮은 작위를 몇번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칭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倭王이라는 품계명에서 보듯이
신라나 가야등에 대한 통치권 보장에 대한 내용을 보고 쥐나에서 거절을 하지 그러다가 나중에 승인을 해주는데

그것은 쥐나가 조사를 해보고 그것들이 한반도 내의 신라나 가야가 아니라 규슈나 열도에 존재하던 한반도의 분국들로
관례적으로 그런 명칭을 쓴다는 것을 인정했기때문에 열도 내에서의 야마토 정권의 패권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거지

이런 역사적 사실은 왜곡하고 그게 한반도의 가야와 신라를 통제하는 실벼슬이라고 누가 그러대 무식한 saru같으니라구
백제는 멸망후에도 원나라나 명나라 시기까지 자칭 백제라는 집단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왜열도내에서도 고구려 백제 시라기의 분국들이 신라 통일이후에도 존재했다는 것을 잘 반증 해주는 동시에,
그 보다 앞선 시기인 5세기 당시에는 더욱 기승을 떨쳤을 신라 가야 분국들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려는
야마토 정권의 필사적인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거란다.

특히 왜왕무의 송에 대한 상표문에서도 보듯이 倭5왕 시기에 니뽕은 북으로 서로 동으로 중이의 정벌을 나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기내 야마토정권이 열도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왕무의 상표문-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 

더구나 왜가 자칭 통제권을 요구하고 있던 나라들 중에는 이미 오래 전에 망한 나라들이 존재한다.
즉 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라는 자칭 제수품의 명에서도 보듯이
이미 망하고 없는 진한, 모한등이 포함되어 있다.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고대의 이미 멸망한 나라에 대해서 쥐나가 통치권을 주고
왜는 쥐나에게 이미 멸망한 나라들에 대해서 통치권을 인정해 줄 것을 애걸하고 있는게 아이러니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저 나라들은 왜 열도안에 존재하던 한반도 출신의 주민들이 세워 난립하던 분소국들을 말한다.
秦韓은 400년 초엽 무렵, 阿莘王의 폭정을 피해서 백제 유민들이 신라 가야로 도망쳐서 倭에 정착한 秦氏의 국가이다.
AD 7C 초에 隨나라 사신이 보았던 그 秦王國이다.

마한의 별칭인 慕韓이 들어 간 것은 과거 한반도 남부의 마한계 주민들이 왜열도에 세운 분소국이다.
신라나 가야등도 신라계나 가야계 주민들이 장악하고 있는 분소국들인 것이다.

만일 진짜로 오래전에 망한 국가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려 한다면 상표문에 倭王武가 올려야 하는 내용은
" 오래전에 우리의 조상들은 한반도에 진출하여 진한 모한..등 여기에 연고가 있어.." 이런 내용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그런 사실이 없기 때문에 없다. 단지 열도 내부의 한반도 출신별 주민들이 세운 분국문제이기때문이다.

결국 倭王 武는 표문을 통해서 자신의 힘으로 마한계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로 할거하던 倭가 어느정도 통합이 되었다는 것을
호소하며 공식적으로 인정해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예적 작위 수여의 예는 고려 성종실록에도 보이는데
송의 황제가 쥐나의 장회의 땅(과거 대륙백제의 담로가 있던 지역)을 관리하는 백제의 수장임을 공시하는 명예직을
칙서를 통해서 보내온 사실에서도 발견 된다.-이경우는 고려가 요구한 바도 없는데 송 스스로 인정한 경우지만-

그리고 고고학적 인프라로서 당시 倭가 신라 가야 운운했을 때 倭사신의 모습과 신라사신의 모습이 그려진 양직공도를 보면
얼마나 왜의 현재 주장이 허구에 찬것인가를 잘 알것이다.

신라 사신의 고귀한 복식과 신발 모습과 왜 사신의 그 허접한 입성과 가슴팍이 다 드러나는 천박함 및 맨발은
그냥 서지학적 근거가 없이도 왜의 현대의 각색한 주장이 뻥인가를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夏と松と海
솔직히 기가막혀서 한다디 적죠. 일본보다 우월했음을 주장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고 해서 멀쩡한 백제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만들어버리나요? 백제가 따로 후국을 둘 수 있는 중국의 제후국이었다는 말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군요. 아니, 백제의 속국이었던 일본이 백제와 서로 높은 직위를 받기위해 다툰다는게 말이됩니까?
고구려의 전통적인 속국이었던 신라를 보세요.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에 벗어난 내물왕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중국에
조공합니다.그 이전까지는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할래야 할수가 없었던 거죠.
일본이 중국에 대해 요구했던 것이 뭔줄아세요? 신라 가야뿐만이 아니라 백제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인정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제에 대한 지배권은 거부되고, 가야와 신라에 대한, 중국에 조공한 적이 없었던 나라에만 일?의 지배권을 허용한 것이죠.
사실이 이런데, 일본이 백제의 속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부한국우월론자들은 일본의 야마토조정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이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어,
이들의 분국이 일본열도에 존재했었다고 말을 하는데, 야마토조정은 중국의 화이사상을 모방하여 고구려 백제의 도래인들에게
왕의 호칭을 주고 주종관계를 만듭니다. 이는 조선반도에 대한 야먀토조정의 지배권을 형식적으로라도 유지시키려는 태도입니다.
일본에서 통치권을 요구했던 여러나라들중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나라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 야마토조정이 답습한 중화주의적 태도죠. 될수있는대로, 자신들이 관할하는 영역이 매우 넓음을 과시하려는 의도란 이야기입?.
사실, 그런 관할권은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죠. 일본이 요구한다고 해서,
엄연히 존재하는 신라와 백제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요구를 했겠습니까?
무슨 정말 백제나 신라등이 중국의 속국이어서, 중국이 허락만하면 일본이 지배권을 획득하겠습니까?
이것은 중국으로부터 형식적이라도, 그 지배권을 인정받아서 국가적지위를 높이려 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죠.
만일 일본에 조선반도국가들의 분국들이 있었다면, 굳이 평정한 상태에서 중국에 그것을 인정해달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일본이 지배권을 허락해달라고 한 지역은 모두 일본이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지역이지만
그러나 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중국에 인정받아 국가의 지위를 높이려 하기위해 요청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책봉관계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면서도, 이상하게 해석을 하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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