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총요와 독사방여기요의 기술 내용을 비교하여 거란 동경의 위치를 고찰하고자 합니다
무경총요(武經總要)는 1040년 송나라 인종이 명하여 1044년에 완성한 군사 목적을 띤 기술서로 병기, 병법, 지리 등을 망라하는 종합서입니다. 당시 송나라의 절실한 현실 상황이 무경총요 저작에 얼마나 정밀성을 요구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명말(明末)청초(淸初)의 한족 학자인 고조우(顧祖禹:1631~1692)가 저술한 종합지리서입니다. 대명일통지를 기본으로 하여 명나라가 통치한 영토의 지리정보 상을 자세히 기술하였습니다. 독사방여기요는 한국 사학계에서도 지리 및 강역 상을 연구하는 데에 긴요하게 활용, 참고되는 문헌입니다.
원나라 시기인 1344년 재상 탈탈에 의해 완성된 요사에 비해 훨씬 선대(300년)의, 그것도 송과 거란이 대치하여 송이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저작된 무경총요는 요사, 특히 요사 지리지의 지리 정보보다 앞선 시기의 지리정보를, 그것도 보다 생생하게 담고 있으리라 충분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1044년 당시의 정보를 담은 무경총요전집과 명나라 요동도사의 소처인 요양을 중심으로 그 관할지에 대한 지리 정보를 상세히 담고 있는 독사방여기요(의 산동8)를 비교하여 거란 당시 동경도의 치소인 동경의 소재지가 현 요양이 맞는가 하는 것을 따져 보고자 합니다.
동경의 위치를 알려줄 이정표가 될 지점을 기준하여 무경총요가 기술하는 거란 동경의 위치와 명 요동도사, 즉 현 요양시의 위치가 일치하는지 확인하겠습니다
1. 요수/요하
<독사 산8>
遼水司西百六十里,又西距廣寧衛二百里。自塞外流入三萬衛西北境,南流經鐵嶺、沈陽而至此。又南至海州衛,西南入海,行千二百五十里。
요수는 요양 서쪽 160리에 있다.
<무경총요>
東京,遼東安市城也。城之東即大遼河,城之西即小遼河。
동경은 요동의 안시성이다. 성 동쪽에 대요하, 서쪽에 소요하가 있다.
西至遼河百五十里。
(동경에서) 서쪽으로 요하까지 150리이다.
160리와 150리는 같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큰 차이는 아닙니다.
2. 압록수/압록강
<독사 산8>
鴨淥江司東五百六十里。
압록강은 요양 동쪽 560리에 있다.
<무경총요>
東南至鴨綠水九百里
동경에서 동남쪽 압록수까지 900리이다.
鴨綠水,高麗國西,源出靺鞨白山,水色似鴨頭,去遼東五百里。高麗之中也,此水最大,波瀾清澈,恃之以為天塹,水闊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水東南二十里分界,至新羅國興化鎮;自黃土巖二十里西北至東京八百五十里,南至海六十里。
송나라 당시의 왕건 고려의 압록수와 평양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이 기술 상의 압록수는 현 압록강이며 평양은 현 북한 소재 평양인 것을 기술하는 정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독사방여기요의 압록강은 명나라 당시의 압록강, 즉 조선의 서북계를 형성한 현 압록강입니다. 무경총요의 압록강 역시 현재의 압록강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거란 동경의 소처가 현 요양시가 맞다면 압록강과의 거리에 있어서 요동도사가 있던 현 요양시를 기점으로 설명하는 독사방여기요의 기술 정보와 일치하거나 거의 일치해야 하는데 무려 340리 차이가 납니다. 현 압록강 340리 밑으로 압록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강이 있었습니까? 청천강이나 대동강이 압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적은 없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거란 동경 소처가 현 요양시였다면 있을 수가 없는 거리 기술입니다.
3. 금주(錦州)
<독사 산8>
廣寧中屯衛司西南六百里。
광녕중둔위(금주)는 요동도사(요양) 서남쪽 600리이다.
<무경총요>
西南至錦州四百里
(동경에서) 서남쪽의 금주까지 400리이다.
거란 동경에서 금주까지 거리(400리)와 명 요동도사 소재지인 요양에서 금주까지 거리(600리)는 무려 200리 차이가 납니다. 몇 십리 차이라면 이해가 가겠으나 200리 차이라면(압록강은 340리 차이) 거란 동경과 현 요양시는 서로 다른 곳이라고 보는 게 상식적 사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4. 의주
<독사방여기요(義州)>
義州衛司西北五百四十里。東至廣寧衛百二十里,東南至廣寧右屯衛亦百二十里,南至海岸百四十里,西南至廣寧中屯衛九十里,西至邊外廢興中州百六十里。
의주는 요양 서북쪽 540리에 있다. 의주 남쪽 90리에 광녕중둔위(금주)가 있다.
<무경총요(宜州)>
東至醫巫閭山,西至霸州二百里,南至錦州九十里。
(의주) 동쪽에 의무려산이 있고 서쪽으로 패수가 200리, 남쪽으로 금주가 90리 떨어져 있다.
錦州,遼西之地,南至大海,北距柳城,阿保機建為州,今號臨海軍。東至顯州二百里,西南至嚴州百七十里,南至大海三十里,北至宜州百二十里。
금주에서 북쪽으로 의주까지 120리이다.
비록 30리 차이가 나지만 의주를 키워드로 독사방여기요에서 말하는 금주와 무경총요에서 말하는 금주가 같은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광녕중둔위는 금주에 있었고, 금주가 명나라 광녕중둔위였던 것은 이견이 없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즉 거란 동경이 현 요양이 맞다면 현 요양에 있었던 명나라 요동도사에서 금주까지 거리와 거란 동경에서 금주까지 거리가 일치하거나 근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200리 차이가 납니다. 거란 동경과 명 요동도사(현 요양시)가 같은 곳으로 생각되십니까?
5. 심주(沈州)
<독사방여기요>
沈陽中衛司北百二十里。北至鐵嶺衛百二十里,東南至鴨淥江六百里。
(요동도사, 즉 현 요양에서) 심양중위(현 심양)까지 북쪽으로 120리이다.
<무경총요>
北至沈州百二十里
(동경에서) 북쪽으로 심주까지 120리이다.
동경과 심주, 요양과 심양의 방향과 거리는 정확히 일치합니다. 심양이라는 명칭은 심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현 심양이 명나라 심양중위가 맞고 거리도 일치하니 거란 동경이 현 요양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독사방여기요>는 다음과 같이 아주 결정적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6. 심양 기준 교치 사실
<독사방역요>
沈陽中衛司北百二十里。北至鐵嶺衛百二十里,東南至鴨淥江六百里。
遼濱城衛西北百八十里,高麗之遼東城也。唐太宗克之,改曰遼州。時亦謂之新城,以別於遼東故城也。《唐史》:貞觀十九年,伐高麗,江夏王道宗將兵數千至新城。二十年,復伐高麗,命李世將營州兵自新城道入。永徽三年,高麗侵契丹,松漠都督李窟哥將兵御之,大敗高麗於新城。儀鳳二年,徙安東都護于新城,以統高麗、百濟之地。此唐所名之新城也。後為拂涅國城。勃海置東平府,督伊、蒙、陀、黑、北五州。契丹阿保機攻勃海,先克東平,五州皆下,復置遼州於此,並置遼濱縣為州治,亦曰東平軍,德光更為始平軍。金皇統三年,州廢,縣屬沈州。元並廢縣。近《志》謂之遼陽城,又謂之顯州城,皆誤也。按:《舊·高麗傳》:貞觀十九年,季圍遼東城,高麗發新城步騎來援。又《志》安東都護府領新城州、遼東州。據此則遼東城非新城也。蓋唐初以遼東城置遼州,亦曰遼城州,新城則置新城州,至遼時乃移遼州於新城耳。又《舊·高麗傳》曰:乾封二年,季度遼至新城,謂諸將曰:新城是高麗西境鎮城,最為要害。若不先圖,餘城未易可下。遂引兵於新城西南,據此築柵,且攻且守。城中窘迫,乃降。
“요빈성이 심양중위 서북쪽 180리에 있는데 고구려의 요동성이다. 당 태종이 그 성을 함락시켜서 요주를 설치하였다. 그 때에 또한 신성이라 하였는데 이는 별도로 요동고성을 가리킨다(遼濱城衛西北百八十里,高麗之遼東城也。唐太宗克之,改曰遼州。時亦謂之新城,以別於遼東故城也。)”
당 태종이 함락시킨 고구려 요동성이 현 심양(심양중위) 서북쪽 180리에 있었다는 사실과 신성은 요동성과 별도로 요동의 옛 성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독서방여기요의 이 기술에 근거한다면ㅡ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요동성에 설치됐던 적과 신성에 설치됐던 적이 있는데ㅡ안동도호부가 설치됐던 고구려 요동성은 현 요양시도 요양시 북쪽의 현 심양시도 아닌 현 심양 서북쪽 180리에 있던 요빈성입니다. 독사방여기요의 기술의 핵심은 고구려 요동성은 현 요양이나 심양, 또는 이 일대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침략하며 먼저 동평부(와 동평부 관할 5개 주)를 차지했는데 당 태종이 이 자리에 설치했던 요주라는 이름을 거듭 사용하여 이 자리에 요주를 설치하고 요빈현에 치소를 두어 또한 동평군이라 하였고 후에 시평군으로 고쳤다(契丹阿保機攻勃海,先克東平,五州皆下,復置遼州於此,並置遼濱縣為州治,亦曰東平軍,德光更為始平軍。)”
발해의 동평부는 고구려 요동성과 신성 등이 있던 곳이자 당나라가 요주를 설치한 곳으로 현 요동 중부가 아니라 의무려산에서 현 요하에 이르는 넓은 지역입니다. 이 발해 동평부를 거란이 별해를 정벌하며 가장 먼저 차지했다고 요사에도 적혀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는 거란이 부여부를 침략하는 것을 시작으로 발해를 침략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거란의 발해 침략은 동평부를 차지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단국이 옮겨온 곳이 바로 발해 동평부 자리였습니다. 발해 동평부이자 거란 요주 동평군 자리로 동단군이 옮겨온 뒤에 남경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 뒤에 남경도가 거란이 송으로부터 연운을 획득하면서 새롭게 설치되면서 동경도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연운이 남경도로 설치가 되면서 거란의 강역은 크게 늘어나게 되고 이 시기에 거란 동경도의 교치가 촉발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이전, 즉 동단국이 동평부 자리로 옮겨오면서 기존의 동단국 시절의 행정지 다수를 함께 교치해 왔으리라 짐작됩니다.
“요동성에서 요주, 즉 요성주를 다스리고, 신성에서 신성주를 다스렸는데 요나라 때에 요주의 치소를 신성으로 옮겼-을 뿐이-다(遼東城置遼州,亦曰遼城州,新城則置新城州,至遼時乃移遼州於新城耳)”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14개 주를 설치하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 요주와 신성주였습니다. 물론 제대로 운영되지 못 했습니다. 독사방여기요의 이 기술은 원래 요빈현의 요빈성이 요동성이고, 이 요동성이 요주의 치소였는데 금나라가 요빈현을 폐지하고 심주에 속하게 했고, 그 이전인 요나라 거란이 요주를 신성에서 관할하게 옮겼다(移)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주의 관할이 옮겨가면서 본래의 신성이 요동성으로 혼동되었고, 또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요나라 시기에 요주의 관할이 신성으로 옮겨가면서 요주가 축소되고, 또한 요주 소속의 현들이 이웃 주로 편속되고,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심주와 요주 요빈현(요동성), 신성(요동고성) 등의 사실이 알려주는 정보는 앞에서 두 사서를 비교하여 따져본 사실 정보와 함께 거란 동경도 중심지 현 의무려산과 현 요하 사이에서 현 요심 지역으로 크게 교치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ㅡ3줄 요약ㅡ
거란 동경과 명 요동도사는 다른 곳이다
명 요동도사가 있었던 현 요양시는 처음부터 거란 동경이 있던 곳이 아니다
거란 동경뿐만 아니라 여러 행정구역이 교치되거나 새롭게 편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