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남진정책 관련 문헌
장수 63년(서기 475)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漢城)을 점령한 후,
백제의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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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文周王)[혹은 문주(汶州)라고도 한다.]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毗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서기 475)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지키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여 병사 1만을 얻었다.
고구려 병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개로왕이 죽어서 문주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품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 웅진(熊津, 충남 공주 ???)으로 도읍을 옮겼다. - 삼국사기 문주왕
■ 고구려 남진정책이 개소리라는 문헌
문자 16년(서기 507) 겨울 10월, 임금이 장수 고로(高老)를 파견하여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횡악(橫岳) 아래에 주둔하게 하였다. 백제가 병사를 출동시켜 우리의 병사에게 대항하자 곧 물러났다.
여기서 키포인트는 백제 한성(漢城) 입니다.
[475 ~ 507년] 32년 동안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점유한게 아닙니다.
백제 문주왕의 기록에서 보듯이 그냥 물러 갔어요.
남진정책이란 명칭을 붙이려면 해당 지역의 점유가 관건인데...
점유를 하지 않고 실력 행사만 했으니 남진이란 명칭을 붙이면 안되죠. - 사서문헌적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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