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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0-15 20:07
[기타] 조선의 생산력이 조루된이유
 글쓴이 : shonny
조회 : 3,378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114

수레 대신 가마와 지게를 이용한 조


그렇다면 조선은 어떠했을까? 1780년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타는 수레와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레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운반이 어려워서 바닷가 사람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새우와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지만, 서울에서는 한 움큼에 한 푼이나 주고 사야 되며, 영남지방 아이들은 새우젓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라가 가난한 것은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한 까닭이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고, 한갓 글만 읽고 있을 뿐이다.”

박지원의 지적처럼 조선은 수레가 널리 쓰이지 않는 나라였다. 조선에서는 수레 대신 가마와 지게를 사용했다. 한국 특유의 운반 연장인 지게는 무거운 짐을 효과적으로 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수레만큼 한꺼번에 많은 짐을 옮길 수는 없었다. 따라서 대량 운송은 해상교통 수단인 배에 의지해야 했다.
 
가마는 양반들은 물론 임금이 행차할 때에 사용된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가마는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된 운송수단의 하나지만, 속도가 느리고, 먼 거리를 가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사람이 들고 이동하기 때문에 타는 사람도 자주 울렁거렸다. 가마는 도로가 없이도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했지만, 교통문화 발전에 기여하기 보다는 낙후된 상태를 유지하는 원인이 된 도구에 불과했다.

 

 

조선은 왜 수레를 널리 쓰지 못했는가

조선에서 수레가 활용되지 못한 이유로는 크게 다음의 4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도로가 발전하지 못한 점이다. 한반도는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였지만, 박지원은 이것이 변명이라고 비판했다.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은 것이지,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라고 본 것이다.

 

둘째는 수레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수레 제작 기술이 단절되고, 기술이 퇴보했던 것뿐이다. 여기에는 기술자를 우대하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 탓이 크다.


달구지. 조선 후기에 사용되던 것으로, 소나 말이 끄는 짐수레의 일종이다.

 

셋째는 소와 말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 말에 고려는 원나라에게 많은 말들을 빼앗겼다. 원나라에 이어 중원을 장악한 명나라는 고려에서 3만 필의 말을 빼앗아 갔다. 조선도 무려 7만 필을 말을 명나라에 빼앗겼다. 명은 조선이 명나라를 위협할 기병을 육성하는 것을 막고, 자신들이 북방 민족과 싸울 때 필요한 말을 얻기 위해 조선에 과다하게 말을 요구했었다. 그 결과 조선 초기 국영 목장에 4만 필 정도가 있었던 말조선 후기인 1870년에는 겨우 5,646필에 불과했다. 소와 말이 부족하므로 수레를 끌 동력원이 없다 보니 조선에서는 수레 사용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왕실에서도 조선 초기에 수레를 이용하던 것을 차츰 가마 이용으로 바꾸고 말았다.

 

넷째 정부의 의지가 없었다. 조선은 한성부, 공조, 병조 등 여러 관청에서 도로를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시간이 갈수록 도로를 수리하지 않았다. 조선은 도로를 만들면 적이 쉽게 쳐들어온다는 소극적인 국방정책과 교통정책을 갖고 있었다. 도로 수리부터 하지 않으니, 수레가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노릇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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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hehell 12-10-15 20:26
   
사농공상의 신분구조를 보면 생산력이 꽝된게 당연함.

공상을 천대하는데 사회생산력이 저하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임.
81mOP 12-10-15 20:29
   
생산력 조루? ??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17세기 이후를 제외하곤 생산력이 세계에서 탑클래스였다라고 알고 있는데...

조루? 유통이 안되는 문제은 당시 어느나라나 비슷했던 문제고...

서양의 농노제도와 일본의 농노제도를 봤을 때 조선의 생산력이 더 높을 수 밖에 없을 텐데요

물론 17/8세기 르네상스 이후엔 다른 이야기긴 합니다만...
     
shonny 12-10-15 21:36
   
토지면적은 세종떄가 젤 넓었긴 한데요 (장부에 적힌게 아닌 실제 수세결수로).. 조선후기땐 생산량부터 차이가 나는데요.

이철호의 [조선전기농업경제사]에 따르면
 
"세종 때인 15세기 전반에 1결당 미곡 생산량은 평균 160두였으나 광해군~인조 때인 17세기 전반에는 225두로 늘었다가 숙종말~영조초에는 400두로 늘었고, 영조말~정조 때인 18세기 후반에는 600두로 늘었다. 이는 약 3세기 만에 농업 생산력이 4배 가까이 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농업 생산력의 발달은 엄청한 사회 변화를 수반했다."

고려와는 다르게 해상무역도 별로였고, 상업역시 조선초엔 그닥 장려하지도 않았었죠.. 송상이 망한게 조선초였으니까요. 농업국가가.. 동력이 되는 소, 말을 대량 잃었는데.. 생산성이 높았을리 없죠.
          
81mOP 12-10-15 21:43
   
그렇군요...그러나 서양에 비하면 괘 생산력이 꽤 높았다고 들었는데...
               
중앙동장닭 12-10-16 15:11
   
서양의 경우 생산력이 별로 였지만 흑사병으로 인구가 확 줄어버려서 생산량에 비해 인구수가 적어서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살았다나 뭐라나... 여하튼 그러더라구요... 생산인구가 적으니 효율을 중시하게 되었고 그래서 동양쪽 보다 서양쪽이 먼저 산업화가 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 입니다.
굿잡스 12-10-15 21:29
   
원제국 시절과 조선 명의 무역 관계는 다릅니다만

도리어 조선이 명에게 선불로 10배를 후려 팔아 먹었는데 ㅋㅋ. 조선이 여진족을 휘하로 영향력 하에 두면서

여진족 말을 싸서 명나라에 선불로  그것도 10배의 고가로 팔아 먹었음.
     
굿잡스 12-10-15 21:52
   
<선불 10배로 후려 먹던 조선>

조선 초기 명나라는 3년 1공(貢), 즉 3년에 1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하였다. 조공무역이 세간의 인식대로 조선에서 명나라에 일방적으로 갖다 바친 것이라면, 명나라에서는 3년에 1번만 바치면 된다는데. 조선에서 1년에 3번 바치겠다고 주장할 까닭이 없다. 조공무역을 조선의 손해로 보는 것은 조공무역의 원칙을 모르고 나온 오해이다.

 


 

명은 조선 초기에 금과 은을 조공품으로 요구했지만, 세종의 요구로 결국 말과 포로 대처하게 했다. 당시 북쪽으로 쫓겨난 몽골족은 호시탐탐 명나라를 칠 기회를 노렸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로서는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말과 포가 많이 필요했다.

 

조선초기 말은 조공무역의 최대품목이었다. 조선 개국(1392)부터 세종 10년(1428)가지 36년간 명에 조공무역한 말, 즉 조선이 명나라에 수출한 말은 총 5만 9천여 필이나 되었다. 명나라로서는 말이 급히 필요했기 때문에 선불 즉 비용을 먼저 지불하고, 말을 나중에 받아갔다. 이는 말이 조공이었지, 실상은 조선이 우위에 선 국제무역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 단목지가 자신이 가져온 액수만큼, 먼저 말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태종은 말 값을 모두 받은 후에 보내주겠다며 거절하여다. 이처럼 말 무역은 조선 초 양국의 가장 중요한 조공무역 품목이었지만, 실상은 말 값을 한꺼번에 먼저 받고, 말은 나중에 제공하는 것으로 조선이 우위에 있는 무역 형태였다. 게다가 당시 명의 요구에 비해 말의 공급이 딸렸으므로 값도 비쌌다.

 

태종실록을 보면 명나라와 조선은 말의 국제무역가를 협의해 포로 환산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 "                                                                                            - 태종실록 1년 10월 3일 -

 

승(升)은 삼베의 곱고 거칠은 정도를 표시하는데 1승은 80올로서 오승포는 품질이 중등인 삼베이다. 포1필을 쌀로 환산하면 5~6두(斗) 정도였다.(세종 19년 기록) 큰 말 상등 값이 오승포 500필이라면 쌀이 250~300두나 되는 대단히 비싼 값이다.

 

조선의 말 값은 왜 비쌌을까? 그건 조선에서 큰 말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역시 말을 여진족으로부터 수입해였다. 조선이 여진족으로부터 수입한 말의 가격은 다음과 같다.

 

"호조에서 상계하였다.

'말을 올린 야인(野人: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

이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년 1월 7일 -
굿잡스 12-10-15 21:32
   
그리고 사람들이 잘못아는게 조선이 상업보다 농업을 장려했다고 상업을 등한시 한게 아닙니다.

삼국 고려때 워낙 상업이 융성하긴 했지만 고려말 너무 상업에 치우치다보니 농사짓을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농업을 장려한 정책이였음( 근현대 이전에 당연히 공산품보다 농업이 동서양의 국력을 지탱하는 원동력

이였음. 물론 근현대 산업 혁명도 기본 농업혁명이라는 1차 먹거리 문제가 해결되어야 공산품이 발달하는

것이고.  오늘날에도 북한이 핵들고 무장 어쩌고 해도 먹고 살 기본 쌀이 없어 조루되는 현실보면)


이미 우리나라는 기본 철기의 발달과 우경 그리고 조선 세종때에는 더욱 높은 수준의 농사장려

정책을 통해서 경작 면적의 확대와 더불어 쌀 수확량이 엄청나게 증가 합니다.
     
81mOP 12-10-15 21:44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굿잡스 12-10-15 21:45
   
세종때는 휴양법과 같은 밭에 수확 기간이 다른 파종을 통해 한해 이모작 형태의 간종법 등이 농사 직설

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수확량이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물론 조선 후기에 가면 논 면적의 확대와 이앙법, 이모

작, 근경법․간종법의 확대 등의 논농사 기술 발전, 밭의 토지 이용률 증가 등으로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음.


조선을 다른 말로 <술의 나라>라고도 비유하는데 집집마다 각자의 비법으로 각양 각색의 술들이 빚어졌는데

이것은 그만큼 먹고 남은 풍부한 쌀을 바탕으로 하는 먹거리가 가능했기에 그외의 유흥으로 술도 흔하게 빚어지는

현상이였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혹자는 왜구 극우들이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 막장에 왜구는 에도 시대가면 생산량이

조선을 능가했니 어쩌니 하는데 실상은 왜국은 이 당시도 사람이 농사 짓었다는. 즉 근대 메이지 유신의

산업 혁명의 기계적 생산력을 얻기 전까진 조선의 기본 생산력을 따라잡았니 하는 건 혓소리.

(그 찬란하다던 에도시대에 잽 농민 반란이 더 많았고 평균키도 고대보다 작았음. 인구는 응응

하는 문화라서 급격히 느는데 밀집 목가옥에 비위생적이다 보니 화재에 병이 빈번했고

인구에 비해 식량 생산은 조루라 먹고 살기 빠듯했던게 에도 시대 일반 왜인들의 생활상)




비록 조선이 임진왜란의 전란의 후유증이 있었지만 15세기 세종대왕이 이끌고 만든 조선의 국력과

정치 사회제도와 인프라 과학, 문명 수준은 당시 인구력 바탕의 명을 제외하고는 그 생산력에서

감히 세계에서 탑 수준이였음. 물론 선진국 관점에서는 명도 조선에 미치지 못했고.


이후 17세기 대동법이 실행되면서 조선에서도 본격적 근대화의 물결로 단순히 먹기 위해 농사가 아니라

채소등도 사고 팔기 위해 상업적 사업 개념으로 재배되는 현상들이 두루 나타남.
굿잡스 12-10-15 21:50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굿잡스 12-10-15 21:59
   
근데 훨 이전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부터 백제 신라도 기본 도로에 수레들이 활발했던 점으로 보면

조선시대에 물적. 인적 교류의 핵심인 수레나 도로의 발달이 미비했던 점은 분명 아쉽기는 합니다.

혹자는 과거 넘 잘 닦여 있다 보니 외적 침입에  용이했다는 안보적 문제로 도로문제를 등한시 했다는 말도 있긴 하던데.
가가맨 12-10-15 22:17
   
조선때는 그냥 볍신국가엿져...

뭔말이 필요해...

가끔 정신병자들이 주장하는....평화를 위해 군대를 없애자...그런류의 볍신들이 넘쳐나던 때가 조선이엇음...

외세의 침입햇을때 쉿게털린다...그러니 도로를 깔면안되다는..뭐...볍신들의 국가
     
굿잡스 12-10-15 22:21
   
임진왜란의 후유증이겠죠.

조선은 15세기는 잘 나갔음. 군사력도 강했고. 세계사적으로도 선진 인프라제도를

가진 강대국이였음.

그리고 17세기 말은 이런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딛고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이 약해진 여러 요인에 대해 여러 지식인들이 성찰을 통해 더욱 발전을 이끌고자

의욕들이 끓던 시대 흐름이였습니다. 그런 시대 정신이 있으니 17세기 후기부터

이후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조선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 한 것임.
     
zzag 12-10-17 10:39
   
그런 국가가 500년을 유지했죠. 지금 이나라 잘나간다지만 당장 한세대 후 두세대 후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제 겨우 60여년 지났을뿐인데..
김삿갓이 잘나가던 관직버리고 동냥밥 먹으며 전국을 방랑했던 이유는.. 스스로 쪽팔려서였죠.
실컷 비난하고 깐족댔던 이가 알고보니 직계조상.
서라벌 12-10-15 23:55
   
확실히 조선은 상업보다는 농업을 장려한 국가이다보니 도로의 발달이 미비했을겁니다. 삼국시대 까지만 해도 말이 끄는 수레가 많았고 도로도 잘 닦여있었다는데 그러다보니 산지가 많아서 그렇다는걸 변명이라고 하는 이유죠.
그래도 조선은 굿잡스님이 설명해 주신대로 나름 부유하고 괜찮은 나라였습니다. 농업 생산력도 좁은 땅에 비해서는 굉장한 편이었죠. 다만 수레가 발달하고 도로가 잘 닦여있었으면 정말 대단한 생산력, 부를 가진 나라가 되었을 텐데 좀 아쉽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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