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내용은 규원사화에 나오는 치우천자 관련 내용입니다
이내용은
중국 정사 사마천 사기 본기에 일부내용이 기록되어있는데
규원사화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규원사화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조선조 숙종때 진본입니다
‘20세기 조작, 위서 운운’하는 자들은 한마디로 정보부재에 따른 무지의 결과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보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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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에 나오는 치우천자의 기록)(중 략)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 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에 유망이 소호(少顥)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때에 헌원(軒轅)이란 자가 있어 유망은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치니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 )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함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패하였다.
《운급헌원기(雲 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 鄕城) 안에 있다 하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달라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
《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천년'이라 말한다. '궐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고 단군이 또 다시 나라를 일으킨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또한 이치에 가까우나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