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史記,卷六十九, 蘇秦列傳, 第九
去游燕嵗餘, 而後得見, 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嘑沱易水, 地方二千餘里, 帶甲數十萬, 車六百乗, 騎六千匹, 粟支數年.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소진이 연국(燕國)으로 간지 몇 해가 지나서 연문후(燕文侯)에게 말하였다. “연(燕)의 동쪽에는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림호(林胡)와 루번(樓煩)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호타수(嘑沱水)와 역수(易水)가 있어 지방(地方) 2천여리입니다. 무장군사(帶甲)가 수십만이고 600승의 병거와 6000필의 기병과 수년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가졌습니다. 남쪽으로는 갈석(碣石)과 안문(鴈門)의 비옥함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이익으로 백성들이 비록 경작하는 수고가 있을지라도 대추와 밤의 이익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위 천부(天府)라고 하는 것입니다.”
2.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第六
分天下以為三十六郡, 郡置守 尉 監. 更名民曰黔首
천하를 나누어 36개의 군으로 만들고 郡(군)에는 守(수)와 尉(위)와 監(감)을 두었다. 백성(民)을 黔首(검수)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地東至海曁朝鮮, 西至臨洮羌中, 南至北嚮户, 北據河為塞, 並隂山至遼東
영토는 동쪽으로 海(해:발해)와 朝鮮(조선)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臨洮(림도)와 羌中(강중)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北嚮户(북향호)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황하(河)에 의지하여 요새(塞)로 하였고 隂山(음산)을 아울러 遼東(요동)까지이다
3. 결해
1) 연국의 동쪽에 있으며 진국의 동쪽 끝인 요동은 현 노룡, 또는 그 서남 일대
2) 연국의 남쪽은 현 보정시 역수, 호타수
3) 연국의 강역은 북경에서 보정시에 이르는 지역
4) 진국의 강역 한계선은 황하와 노룡(또는 그 서남)
5) 4세기 이전과 3세기 전후(조선은 연에게 일시에 빼앗긴 영토를 점차 회복하였다) 조선의 서쪽 강역은 북경 인근까지
6) 어쨌거나 갈석은 하북성 보정시/노룡~황하 라인에 존재
7) 조선요동을 조선을 지나 요동이라느니 요동을 지나 조선이라느니 조선이 요동이라느니 하는 병신 같은 해석은 제발 그만(열거법과 대구법이 쓰였다. 이 표현은 동서고금 글쓰기의 기본)
8) 독산님의 말씀대로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북경까지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9) 당시 요수는 조백하, 또는 영정하
■ 원문 및 해석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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