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쿠왕국이야기가 나와서 하나 첨가하면, 류쿠와 똑같은 케이스가 바로 제주도.
제주도(당시 탐라)는 498년 백제동성왕에게 패배하여 복속당하지만, 제주도 자체 왕과 정부는 조선태종때까지 이어져서 실질적인 제주의 지도자 역할을 함.
백제 멸망후나 고려 혼란기에 다시 독립을 유지했다 본토에 복속했다를 반복하였으며 항상 외부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강했음. (몽골침입기에는 삼별초와 협력하여 고려조정에 대항, 반원체제이후에는 몽골인과 합세하여 최영장군의 고려군에 대항함)
따라서 조선왕조는 제주도에 대해 억압정책을 펴서 출륙금지령이라고 제주도 출신이면 본토에 발을 들여 놓지도 못하게 하고 배도 띄우지 못하게 하였음.따라서 제주도민은 섬에 살고있으면서도 고기잡이를 못하고 해녀들이 해산물을 따는것에 의존하게 됨(탐라국 시대 해상을 왕래하며 무역하던 배를 만들던 조선(造船) 기술과 배를 다루던 항해 기술이 단절되었음).
제주도에 기근이 들었을때 많은 재물을 풀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김만년의 유일한 희망이 본토에 나가서 금강산 구경하는 것이었을 만큼 철저하게 제주민을 관리했음.제주도민은 관직에 나서지도 못하게 하며 항상 본토 출신 목사들로 통치하게 하고 철저한 수탈의 대상으로 삼음.
예를 들어 공마, 귤, 약재 및 해산물, 산짐승 등의 진상 공물은 물론, 지방 관아의 지공(支供)·목자(牧子)·과원직(果園直)·선격역(船格役)을 모두 부담해야 하였기 때문에 한 사람이 10역(役)을 겸하는 상황이었음.때문에 여자도 역을 져야 했고, 60세 이상의 면역은커녕 어린아이도 태어나자마자 바로 역을 부담해야 하였음.
그중 가장 고되고 무거운 역이 목자역. 제주도민들에게는 시(柴)·탄(炭)·초(草)의 요역이 전가되어 있었기에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음. 게다가 말을 유실했을 경우 마적(馬籍)에 등재되어 있는 같은 색깔의 말로 보충하여야 하였고. 때문에 대부분의 목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나 처자식을 팔거나 자신이 머슴살이를 하곤 했음.
여자의 역과 관련된 잠녀역의 경우, 생업을 위해 해조류와 패류를 채취하는 해녀들의 역, 이들은 관아에서 작성한 잠녀안(潛女案)에 의해 채취물의 일부를 진상, 관아용 명목으로 상납하여야 했는데, 액수가 연 7, 8필에 달하는 고액이었음. 더욱이 관아에 가져다 바칠 때 서리의 농간이 작용하면 그들의 1년 작업량으로도 상납이 모자라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음.
그러나 제주도민들에게 가장 고통을 안겨준 것은 특산물 진상이어서, 말과 소, 그리고 귤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물품을 중앙 정부에 바쳐야 했음. 따라서 중앙 정부에서 요구하는 수량이 너무 많아 제주도민들은 한 사람이 열 사람의 몫을 감당해야만 했음.더구나 공물 상납을 제외하고는 행정과 재정 운영이 거의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중앙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는 자의적인 통치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의 악용의 소지가 많았고, 그래서 제주도에 부임한 목사들은 거의 다 수탈을 일삼았음.
조선시대 제주도민의 명칭이 한라산의 별칭인 두독야지(頭禿也只), 두모악(頭毛岳)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혹은 주로 해산물을 채취해서 생활한다 하여 포작인(鮑作人) 등이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흑인을 깜둥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멸칭이었음.
지금은 제주도 토박이 중에 성이 없는 사람이 없지만, 원래 제주도토박이는 100년전만해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성이 없었음. 지금의 성은 그 후에 본인들이 외부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거짓으로 만든것.
돌하루방에서 보여지듯이 남방계 해양문화의 영향이 본토보다 컷으며, 9개의 단모음과 20개의 자음으로 구성된 언어도 단어라든가 발음이 표준어와 너무 달라서(접사가 다양하고 특이한 처격과 여격의 발달, 주체 높임법이 없는점, 3등급 상대 높임체계, 질서정연한 동작상, 몽골 차용어의 존재, ‘ㅣ’와 ‘,,’가 합한 쌍아래아 음의 존재, 복모음 ‘ㅚ’는 단모음 [ø]로 발음되지 않고 항상 복모음 [we]로 발음되는점 등) 최근 언어학자들에 의해 제주도사투리가아니라 제주어라는 독립된 언어로 정의 되었됨.
극소수이긴 하지만, 제주도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2004년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주도독립우려를 이유로 국보법 참칭조항 유지를 주장하기도 했음.
항상 독자적인 행로을 원하는 경향은 현재까지도 제주도민의 특징이며 제주4.3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고, 최근 지속적인 노력끝에 국방외교권을 제외한 독자적인 자치행정권을 가진 제주도 특별자치도가 되었음.
엄연히 대한민국의 한 부분인 탐라왕국에 대한 역사를 지금은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다음과 같은 잊혀진 왕조의 기록은 한번 알아두면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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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국가(部族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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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왕(乙那王) -고을라 기원전 2337년경
건왕(建王)
삼계왕(三繼王)
일망왕(日望王)
도제왕(島濟王)
언경왕(彦卿王)
보명왕(寶明王)
행천왕(幸天王)
환왕(歡王)
식왕(湜王)
욱왕(煜王)
황왕(惶王)
위왕(偉王)
영왕(榮王, 기원전 105년 ~ 기원전 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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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古代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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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왕(厚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7년)
두명왕(斗明王)
선주왕(善主王)
지남왕(知南王)
성방왕(聖邦王)
문성왕(文星王)
익왕(翼王)
지효왕(之孝王)
숙왕(淑王)
현방왕(賢方王)
기왕(璣王)
담왕(聃王)
지운왕(指雲王)
서왕(瑞王)
다명왕(多鳴王)
담왕(談王)
체삼왕(體參王)
성진왕(聲振王)
홍왕(鴻王)
처량왕(處良王)
원왕(遠王)
표륜왕(表倫王)
형왕(逈王)
치도왕(致道王)
욱왕(勖王)
천원왕(天元王)
호공왕(好恭王)
소왕(昭王)
경직왕(敬直王)
민왕(岷王)
자견왕(自堅王, 기원후 933년 ~ 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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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시대(星主時代) 성주: 고려복속이후 탐라지역 왕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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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말로(髙末老)
고유(髙維)
고조기(髙兆基)
고정익(髙挺益)
고적(髙適)
고여림(髙汝霖)
고정간(髙貞幹)
고순(髙巡)
고복수(髙福壽)
고인단(髙仁旦)
고수좌(髙秀佐)
고석(髙碩)
고순량(髙順良)
고순원(髙順元)
고명걸(髙明傑)
고신걸(髙臣傑)
고봉례(髙鳳禮) - 1402년 중앙정부의 압력에 의해 태종에게 인부(印符 : 朱記)를 반납함으로서 탐라왕조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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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유구국 왕자의 참변(펌)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된 1609년, 일본 규우슈 사쓰마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는 도쿠카와 막부의 허락을 득하고 규우슈 남단에서 한참 떨어진 유구국을 3,000 병력을 동원해서 기습 정벌했다.
불시의 기습을 당한 유구국은 허망하게 항복하고 유구국왕인 상녕왕[尙寧王, 在位 1589年 - 1620]은 사쓰마로 납치되어갔다. ※상녕왕은 유구 상씨 2대 왕조의 8대 왕이었다.
그는 사쓰마에 억류 생활을 하던중 도오쿄로 끌려가 왕도 아닌 도쿠카와 히데다다[德川 秀忠] 장군을 알현해야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잡혀가고 일 년이 지나자 유구국에 남아 있던 상녕왕의 왕자는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계획하고 뇌물용 재화[財貨]를 배에 가득 싣고 사쓰마를 향하여 유구국을 출발했다. 그 때가 1610년이다 .
이들은 사쓰마에 도착하지를 않았다.유구국[오키나와]역사에도 이들의 이름과 행적은 전혀 남아 있지가 않았다.그렇다고 일본 측에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영원히 양국 역사의 미궁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한 유구국의 효자 왕자는 엉뚱하게도 조선에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줄여서 이야기 하자면 제주판관 이 기빈과 전판관 문 희현이 유구국 왕자가 싣고온 재물을 탐내서 전부 죽여버리고 재물을 탈취해 버렸다.
원래조선과 유구국은 서로 교역관계를 유지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유구에서 수입된 긴 남방산 물소 뿔은 조선의 명산 각궁[角弓]을 만드는데 필수품이었고 공작 꼬리깃털은 무관들의 전립(戰笠)을 장식하는 장식품이었다.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에서 전사했던 어 윤중의전립에도 이 공작 깃이 붙어있었다.
적대할 이유없는 유구국의 왕자를 죽이고 재화를 약탈 했으니 이 기빈과 문 희현 일당은 국가 체면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살인강도들이라고 하겠다.
유구국 효자 왕자는 칼에 맞아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의연하게 앉아있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