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갖고 당최 왜 싸우는지 이해를 못하겠네요.
조선의 1홉은 58ml쯤 됩니다. 일본의 1홉은 180ml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1석은 조선의 2석이랑 비슷합니다.
나중에 구한말에 일제 도량형이 들어와 조선의 도량형이 일본식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1600만 조선석이죠. 일본식으로 치면 800만석입니다.
세종대왕 때쯤 170만결 잡힙니다. 그러면 3천400만석~4천500만석입니다.(조선석기준)..
나중에 오히려 찌그러들었다가 18세기에 다시 치고 올라옵니다.
제가 밀양에 있는 집성촌에서 고모할머니 댁 기왓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는데...
우리 집 밥그릇의 한 2~3배 크기는 되는 밥그릇에 고봉밥이 담겨 나와서...
어릴 때였지만 밥먹다가 GG를 칠뻔 했습니다..
남자는 7~8홉, 여성은 5홉, 아이는 2~3홉을 먹었다고 나옵니다.
성인남성 7~8홉은 406~464mL입니다.
요즘 밥 한공기가 쌀 100~120mL니까.. 요즘 밥공기로 4그릇 분량을 먹엇고..
아이는 116~174mL로 요즘 밥공기 1~1.5 그릇을 먹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인이 세끼를 먹는다고 계산하면..
남녀 부부 한쌍이 1년 먹고 살려면 쌀 4~4.5석.. 아이는 한 4명쯤 키웠다치고. 2~4석..
그런데 보면 알겠지만, 조선의 인구 증가율은 그렇게 폭증한다고 보긴 어렵고..
한 가구당.. 대략 신혼부부는 쌀 5석 자식이 좀 많으면 쌀 10석은 지어야 먹고 삽니다.(일본 석 기준)
물론 개국에 비해 100년 뒤쯤 거의 2배 근처까지 폭발하지만 이게 맞는 자료인지는 알 수 없고..
대폭 줄어든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성이 있죠.
바로 헌종과 숙-영조때이다 1660~1666,1699y~1805y 사이에 호구수가 무려 35만, 72만가량 증가하고 있는데 소빙기 기후의 정점인 이 시기에 자연스런 인구의 매우 급속한 증가라고 볼수는 없으며 그전과는 다른 어떠한 인위적 편제및 구체적인 조정조치가 시행되었기때문이다
헌종때의 구체적 양상은 현재 알기 힘들며 숙종은 초기부터 호적과 오가통제를 결합하여 5호를 1통으로 하는 통수를 두어 통수가 자신의 관할에 있는 5호를 매년말 변동사항을 보고 하는 형식의 정책을 시행하였고 재위43년 1717y부터는 실록에 3년마다 한번씩 호구 등재를 실시한다
경종이 급사하고 1724년부터 재위한 영조는 찬수범례를 통해 숙종대의 인구정책을 이어받는데 군병수 ,중앙과지방의 법제호구수는 해당문서를 참고하여 자세히 실록에 기록하도록 명기하였다 이는 1891년까지 유지되었으며 영조는 역대 왕중에 유독 인구수에 관심을 표명했던바 여러차례에 걸쳐 주례의 헌민수를 언급하면서 호구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하였다.1770년 왕명으로 편찬된 '문헌비고 호구고'로 이어졌으며 그 자신이 직접 책의 서문에서 "나라가 있으면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호가 있으며 호가 있으면 반드시 그 구를 헤아리는데 이것은 하늘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1904y에서와 같이 실제로 정밀한 인구조사는 끝까지 이루어 지지 못했다.
➁1805~1818y 3년 사이에 23만호가 감소한다 잇따른 기근과 역병으로 인해 1809~1810년의 기민의 수만 연인원으로 총8,391,239명 당시 헌구수 7,583,046수를 넘어서고 있었다..➂1891~1900사이에18만호의 감소는 1895년 7월과8월 을 정점으로 당시 대대적으로 유행한 콜레라 전염병으로 인해서이다 ➃근대적 통계조사 이전에 전통적인 호구방법으로 조사한 마지막 해인 1904y의 호수와 구수는 137만/562만으로 18세기 중반 1750y 1,783,044에도 한참 못미치는 호수로 끝난다 .전설한 것처럼 18~19세기에도 지속된 대규모 인구감소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구수의 증가를 곧 인구증가로 파악하는 것은 현실성이 결여된다.
영정조 르네상스 라고 불리우는 조선후기의 양상이 이와같다.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호적을 비롯해 각종 문헌에 대위기들이 보이며 비례하여 호구수의 집계에서도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1750년 178만까지 집계된 호구가 1904년 137만으로 지속해서 감소하는 양상 이었다는 것은 과학적 결과와 일치하는 소빙기적 기후의 지속이며 대한제국 시절 대유행병의 발병으로 인한 타격도 눈에 띈다
기존 식근대론자들은 이에 주된 이유를 마찬가지로 소빙기적 기후가 18세기 중반에 중단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이후 인구증가를 가정하여 맬서스적 덫에 갇힌 왕조의 무능으로 해석하여 18~19세기 위기론을 주창하였지만 소빙기가 종료된후 20년이 경과하여 완연한 현세온난기를 맞은 1910년 일제 병탄직후 조선의 생산량은 당시 인구1800만이 수요하기에는 넘치는 양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보여주는 것은 조선 당시의 역량으로는 감당할수 없을만큼의 기후적 역경이 내내 이어져 온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결론이 정합적 이라 판단된다
http://blog.naver.com/zajo0/220401760441
***************** 이건 이 분 블로그에서 인용 *******************
간단하게 말해서.. 조선의 호구조사는 사실 그다지 신뢰성이 없긴 한데..
농경지와 토지조사로 보면.. 대략 일본식으로 따지면 1500만석~2000 만석 정도의 쌀생산량을 올렸고..
남녀노소 평균 1인당 2석의 쌀은 필요했기에, 인구 1천만명으로 잡으면 대략 무난하게 보는겁니다.
남녀 1쌍 4~4.5석. 자녀 4명 2~4석 합쳐서 대략 6.5~8.5석 정도 필요했고..
실제론 유아사망률도 높고, 낳을수 있는한 최대한 낳아도 8남매를 낳는다해도..
그 사람들이 성년까지 살아남아, 가구 수가 막 늘어나던 것도 아니었고..
결국 식량사정에 맞춰서 인구가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시대였던거죠.
그러면 750만~ 많을 때 1천만 정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때는 식량사정 안좋은데도 인구가 1400만~1800만 돌파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조선이 망하고 난 후 일본이 근대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해서 인구가 1700만을 돌파하기 때문에...
아마도 그걸 설명하기 위해 맞춘거겠죠.
근데.. 이렇게 되면 1인당 쌀1석 정도 밖에 안되니까..
사실상 일본인들처럼 밥을 적게 먹은 셈이 되는 것이고...
반면 일본은
조선인보다 밥 적게 먹는다는 게 사실이기 때문에..
1석이라는 기준 자체가 사람 1인이 1년 먹을 식량이란 소리고..
살생산량과 인구수가 얼추 비슷하게 올라갑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인구수가 급증하고..
보통.. 조선하고 일본하고 인구를 동수로 보진 않고..
조선을 7백만~1천만이라고 보면, 일본은 1.5천만~2천만 정도 잡죠.
더 낮게 잡으면 조선 5~6백만명, 일본은 1천200만명.
조선의 전체 예산은 전체 쌀생산량의 10%~15% 정도에 불과했고,
일본의 전체 예산은.. 세율 50%니까. 쌀생산량의 50%죠.
조선이 1500만석 생산하면.. 예산은 150만석~200만석 정도 되는데.
일본은 1850만석 생산하면.. 예산은 925만석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산이 한 4~6배 정도 차이가 발생..
조선은 병사들이 갑옷, 창, 심지어 말까지 개인이 마련해야되고, 심지어 식량도 준비해야되는데..
이를 지원해주는 보인들이 군포2필을 납부합니다. 2사람의 보인이 군포 4필을 납부하면..
군포 1필 가격은 2냥, 4필이면 8냥..
당시 쌀 1석 가격이 5냥.. 그러니까, 쌀 2석도 안되는 가격이죠.
조선병사는 1인당 1년 예산이 쌀 2석도 안된 것이고.. 이건 사실 밥만 먹고 살기도 벅찬 수준..
그러니, 관에서 식량을 제공해준다쳐도. 이 쌀 2석으로 무기 장만도 힘듬..
반면, 일본은.. 1만석 당 병력 250명 차출..
대략 인구 1만명 당 250명정도 뽑는다는 소리인데..
50% 세율로 따지면 5천석 예산에 병사 250명 유지.. 즉, 병사 1인당 예산이 20석..
물론, 다이묘, 가로, 가신, 사무라이대장, 아시가루 쫄병까지.. 쭉... 등급대로 녹봉이 달라지지만..
대체적으로 조선군보다 1인당 예산이 풍족한 것은 사실임..
나중에 조선군이 왜 죽을 쒔는가??
결국 조선이 세금이 낮고, 양반은 세금, 군역이 면제였기 때문에...
일본에 비해 예산이 딸려서 문제였다는 것..
쌀생산량 차이는 별로 크지 않지만..
일본은 내전으로 인해, 무기, 갑옷, 조총 등의 생산이 많았고,
그로 인해 대장간 등의 산업이 활성화될 수 밖에 없었고,
나름 상공업이 활성화될 수 밖에 없었슴..
반면.. 조선은 무기 생산을 대부분 중앙의 군기시에서 맡아서 제작했고,
일부는 지방 대장간에 하청을 주기도 했었다만.. 장기적인 평화로 인해...
무기 생산량이 많지는 않았고, 상업을 천시.
군대의 훈련도와 사기를 따져봐도.. 내전으로 인한 실전경험이 풍부한 일본군과..
개국이래 장기적인 평화, 게다가 제승방략으로 한번씩 훈련받는 조선 농민군은..
질적인 차이가 많이 발생..
인구 많고, 쌀생산량 많으면 군사대국처럼 이야기하는 분들 많은데..
그러면 인구 100만~150만 정도의 청나라 팔기군 15만~20만정도가... 산해관 입성한 뒤...
이자성의 농민반란군 60만을 어떻게 해치우고, 이후 중국 전토를 어떻게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는지..생각해볼 문제죠..
명나라 당시 인구 1 억 ~ 1.5억으로 보죠. 만주족 100배입니다.
쓸데없는 인구 부심, 쌀생산량 부심 부릴 필요 없어요..
그냥, 조선이 만주족 인구보다 최소 5배~ 많으면 10배 잡는데도...
결국 홍타이지의 팔기군한테 수모를 당했는데요.
나라의 국력이란게 단순 그걸로만 따지는게 아니라..
군사력의 질이나... 지휘관의 역량 같은 유무형의 자원도 중요한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 아래... 일본수군 와장창 박살내고..
제대로 경험도 없던 조선 농민들이 관군, 의병으로..
100년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이랑 맞짱 떠서.. 진주성싸움, 행주대첩, 이치전투, 경주성 탈환 등등
수많은 전투에서 훌륭하게 싸운것만 해도.. 자랑스러운 일인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조선보다 인구가 10% 밖에 안되는 만주족보다..
훨씬 인구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비하는 북방군 병력수가
청나라 팔기군 숫자보다 훨씬 못미쳤던게..인조 시절 조선의 군사대비 수준이었고...
그나마 이 쪽은 상비군이고.. 나중에 예비군 소집해서..
남부에서 근왕병들이 올라오지만, 그 군사력의 질이나 장수의 수준이 썩 좋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고...
그래서 일부 장수 빼곤 대부분 각개격파를 당하죠..
그러니, 이상한 부심 부려봤자 소용없어요..
고려시대 기준으로 치면.. 조선은 100만 대군 뽑을 수 있지만..
막상 조선의 예산, 정치, 군사제도가 엉망이라..
뭐.. 100만 뽑았다쳐도...
남명의 잔당이나 이자성의 순나라 농민군들처럼...
깨져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래도.. 임진왜란은..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병력도 많고, 물자 상황도 좋은..
통일된 일본을 상대로.. 상처 뿐인 승리라도 이겨냈다는 게 자랑할만한 겁니다.
우리가 인구 많고, 쌀생산량 많고, 물자가 풍부해서 물리친거라고 주장하고 싶은 분들이 많은데..
그거 참.. 그게 진실이면 나쁠 것도 없지만, 굳이 진실이 아닌데 억지로 주장해서 얻는게 뭘까요?
독일보다 소련이 인구가 훨씬 많았는데..
독소전 초기 교전비 1 VS 20 나오던게 자랑스러운 일이었을까요?
(독일군 1명 죽을 때, 소련군 20명 죽어나감..)
독일군 800만명 죽고, 소련군 2천만명 이상 죽었는데...
소련이 독일보다 병력 많고, 전사자도 많다고 자랑하진 않죠..(어찌보면 소련의 무능.. 질적 열세..)
전쟁에서 승리한 것 그 자체로 자랑하지..
그러니, 이상하게 우리를 인구, 쌀생산량 대국으로 포장하려고 역사왜곡을 하려고 들 이유가 없습니다.
일본보다 인구많고, 쌀생산량 많다고 우겨봐야..
우리가 인구적고, 물자 적은 청나라한테 밟힌 물렁살 명나라 꼴 밖에 안되요..
게다가, 고만고만한 농사기술로 농사짓던 시대에.. 기후나 경지면적갖고 좌우되는..
쌀생산량과 그에 따른 인구부양력에 의해 결정되는 인구 숫자에.. 딱히 자부심을 가져서 뭐가 좋을까요?
그 시대에 한중일 죄다 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인구많고 쌀생산량 많으면 명나라가 조선이나 일본보다..
10배 이상 우월하고 그런가요? 그냥 땅덩이 크고 인구만 많았지. 물렁살이에요.
정작 중요한건.. 조상들이 배불리 먹고 살았건간에.. 로마처럼 문화유적이나 잘남겨서..
후손들이 관광으로 먹고 살게 해주거나, 그런게 좋은거지.
이걸로 일뽕이니 식민사관이니 뭐니 프레임 뒤집어 씌우는 것도 좀 황당한 일입니다..
다들 너무 대국 프레임에 함몰되신걸로 밖에 안보입니다.
우리 나라는 그래도.. 반만년 중국하고 붙어있으면서,
민족, 국가 정체성 지켜온것만으로도 대단한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