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국정교과서논쟁의 본질이 '역사가 어떻게 기술되어야 하는가'의 내용문제로만 인식할뿐 '역사를 누가 기술해야 하는가'의 주체의 문제로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즉 국가가 역사를 기술하면 그 역사의 내용이 자의적인 자료취합과 의도된 역사관계를 배치시킬 위험이 있다라고 인지했기 때문인데 이건 문제의 내용을 다르게 치환시켜서 보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내에서 역사기술을 둘러싼 헤게모니싸움에서 이 국가를 놓고 성격정의를 전제한뒤에 본래의 논쟁이 아닌 '역사내용이 오류인가'의 여부로 싸우게 됩니다.
역사를 국가가 아닌 비국가가 쓰는게 당연하다고 하는 그 심리/사회/문화적인 논리기반에는 으레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다루었던 국가의 개입이 어느 정도인게 적정한가를 놓고 싸운 대논쟁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정부에 의한 의도적인 분석과 권력적 배분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소통과 여론시장에서 제어되는 메커니즘의 신봉에 달려 있는데 이론적으로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통화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특징은 '국가의 개입이 늘 옳은 것도 아니고 최적이지도 않다'라는 묘한 혐오감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사회내의 많은 분야에서 국가가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고, 민간이 아닌 국가의 개입이 정당하다고 보는 만큼이나 경제, 사회영역의 국가의존도는 분명히 '개인이 늘 틀릴 수 있으며 자율에 맡겨서는 실패한다' 라는 공론이 형성되어 있는것에 반해서 어째서 '역사는' 국가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는지의 명확한 이론적 근거가 있는건 아닙니다. 그렇게 개인의 우월성을 논할 계제라면 근로, 교육, 복지마저도 국가에 의존하는게 아니라 개개인의 우월성을 그대로 주장할 정도로 진행되어야 맞습니다.
국정교과서논쟁에서 제일 먼저 떠들었어야 하는 질문은
'역사기술은 국가보다 왜 비국가가 정당성이 있는가?'
라는 것이고 이 자체를 짚기보다는 늘 우회해서 떠듭니다. 우회의 통로를 마련해준건 '국가의 성격정의'였고 흔히들 친일과 독재권력이 결합한 복마전정도로 보곤 하죠. 국정교과서가 검인정보다 열등하다고 보는 논리는 이들 권력에 의해서 쓰여진 역사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다라는데에 있는데 이건 국정교과서의 본래 문제와는 상관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반론들도 등장합니다.
1) 국가가 아닌 사회의 자유로운 수준을 옹호한다고 했을 때에, 국정교과서 파시즘적 기획이라고 하는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당신은 다른 식의 역사서술도 인정할 관용을 가질 수 있는가?
예를 들어서 위안부를 놓고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착취한게 아니다' 라고 서술한다면 이 서술의 찬반은 둘쨰치고 일단 이러한 의견도 사회내에서 자유롭게 유통시킬 수 있을 관용이 스스로에게 있는가 입니다. 국가는 늘 파시스트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의 사상,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집단의 진리, 엄격함에서 누구보다 파시스트처럼 굽니다. 대개는 어떻게 한국인이 그런 서술을 할 수 있냐라고 반론을 하겠지만 문제는 그런 반론 자체가 '국정교과서가 파시즘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스스로가 반증하는 겁니다. 그러니 실제 국정교과서논쟁에서 국가냐 아니냐는 핵심이 아니라 미리 성격정의된 국가가 쓰는 서술내용자체에 대한 불만이 지배적이라는 말이지요.
2) 설령 친일독재인사들로 둘러쌓인 국가/정부가 사라졌다고 했을시에, 그리고 이 정부/국회/법원에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졌다고 했을 때에, 이 사람들이 쓰는 국정교과서(정부)에 찬동하시겠습니까?
국정교과서가 옳니 그르니를 떠나서 일단 국가가 역사를 쓰는것이 역사공동체를 올바르게 대위하는가, 혹은 역사공동체는 무엇이고 이것이 개인/민간의 차원과의 연속성이 있는가를 논하는것이 우선일 겁니다. 국정교과서에 반대할 수도 있고 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논의의 시작은 누가 역사를 쓰는게 정당한가를 먼저 따져야 옳은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