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내부 개혁을 추진하며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 대륙의 정세도 큰 변화를 맞았다.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이 황제로 등극하며 한족(漢族) 왕조인 명(明)이 세워졌다. 이해 8월에는 명의 군대가 원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원 혜종은 북쪽으로 도망갔다. 이를 기점으로 원의 세력은 급속하게 위축되었다. 이 사건 이후부터는 북원(北元)이라고 부른다.
이 소식에 접한 고려 측에서는 명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원과의 분쟁에 대처해야 할 입장 때문에 두 나라의 협력은 우호적인 바탕 위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민왕이 원의 동녕부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는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그렇지만 1371년 명이 요동으로 진출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명이 고압적인 태도로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명은 고려에 파견되었던 명 사신의 죽음을 빌미로, 고려가 북원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명에 파견되는 고려의 조공 회수를 줄이겠다고 통보해 왔다. 명에 대한 조공을 통해 국가안보를 보장 받고 막대한 이익을 얻어왔던 고려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그럼에도 고려는 명과 가까이 지내는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명의 태도가 누그러지지 않자, 국내의 친원세력이 반발하고 나서 정국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공민왕이 암살된 것이다.
공민왕이 암살당한 후 고려의 정국은 후계 문제로 혼란을 겪었다.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우(禑)를 추대하려는 이인임(李仁任) 일파와 다른 왕족을 옹립하려는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시중 경복흥(慶復興), 북원에 머물고 있는 왕족을 영입하려는 파 등이 서로 대립한 것이다. 이 갈등은 이인임 일파가 서둘러 10세의 우왕(禑王)을 즉위시켜 일단락 되었다.
이후 조정은 이인임이 최영·경복흥 등 보수적 무장세력의 협력을 얻어 이끌어가는 형태로 운영했다. 이인임은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신돈 집권 시기에 전민변정도감에 참여했던 신진 사류 출신이었다. 그러나 지위가 높아지면서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가깝게 변모해 갔다. 그래서 이인임 집권 시기에는 대체로 권문세족이 요직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신진 사류의 세력도 만만치 않아, 두 세력의 갈등이 심해졌다. 이 갈등은 외교정책에서 먼저 나타났다. 집권한 이인임은 원과 명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추구했다. 우왕이 즉위한 해, 명과 원에 모두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원과 가까운 권문세족의 입장에서는, 친명정책을 추구하던 공민왕의 살해사건 자체가 명의 의심을 살 일이었다. 더욱이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돌아가다가 호송관 김의(金義)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명에서 공민왕 피살사건의 책임을 재상인 자신에게 물어올까 염려한 이인임의 사주로 벌어진 일이었다.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껄끄러웠던 고려와 명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인임 일파는 이를 기화로 북원과의 국교를 재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신진 사류의 반발을 받아, 북원 사신의 입국을 막는 사태로 번졌다. 이러한 갈등과 함께 고려와 명·원 사이의 관계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특히 명과의 관계에 갈등이 많았다. 한동안 호전되는 듯 하던 고려와 명의 관계는, 명 측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구매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했지만, 고려가 공급하기 어려운 숫자의 말을 요구해왔다. 그런가 하면 요동을 폐쇄해서 고려 사신의 명 입국을 막았다.
이러한 조치가 근본적으로는 요동에서 활약하던 원의 장군 나하추[ 納哈出(납합출)] 정벌 때문이기는 했지만, 고려를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다. 명의 태도에 자극받은 고려에서는 명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던 1388년 1월, 이인임 일파가 숙청되었다. 이 숙청은 권문세가 출신이지만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최영(崔瑩)이 우왕과 상의해 집행했고, 신흥세력인 이성계 가 힘을 더했다. 이를 계기로 신흥 사대부들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온적인 정책을 추진하던 최영과 적극적인 개혁을 원하는 이성계 및 신흥 사대부 사이에는 틈이 있었다.
갈등이 심해지던 1388년 3월, 나하추를 평정한 명은 철령 이북이 본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라며 이 지역을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이것이 이른바 ‘철령위(鐵嶺衛)’ 문제다. 명의 통보에 고려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책에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우왕의 부추김을 받은 최영이 요동 정벌을 밀어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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