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우로(昔于老, ? ~ 249년 또는 253년)는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자, 흘해 이사금의 아버지이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석우로는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 아니라 각간 수로(水老)의 아들일 수도 있다.
230년 내해 이사금이 죽고, 석우로의 삼촌인 조분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이찬, 대장군이 되어 현재 김천시 개령군에 해당하는 감문국(甘文國)을 병합하였다.
233년 7월에는 왜인이 쳐들어오자, 사도(沙道)로 나아가 화공으로 이를 물리쳤다.
242년 정월에는 서불한에 올라, 군정을 담당하였다. 이듬해에 고구려가 북방을 쳐들어와 이를 상대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두책(馬頭柵)을 방어하였다. 당시 우로가 일일이 병사들을 찾아 격려하니, 모두가 우로를 우러러 보았다.
조분 이사금이 죽고, 조분 이사금의 동생 첨해 이사금이 등극했을 때, 현재의 상주시에 해당하는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백제로 배반하였다. 이에 우로는 군사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첨해 이사금 7년인 253년에 왜국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찾아왔다. 사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우로는 갈나고를 희롱하며, "조만간 너희 왕[1] 을 소금장이로 삼겠다"고 하였다. 이에 왜왕이 노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우로는 "지금 일은 내가 말을 잘못한 탓이다."라며 왜군을 찾아갔다.
우로가 왜인들에게 당시 일이 농담이었다고 해명하였으나, 왜인들은 우로를 붙잡아 불에 태워 죽였다.
이후 첨해 이사금이 죽고 미추 이사금 때, 왜국이 사신을 파견했다. 석우로의 아내가 이사금에게 청하여 스스로 사신을 대접하였다. 사신이 취하자 그녀는 사신을 불에 태워 죽여 우로의 원한을 갚았다. 이에 왜인들이 금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한편, 삼국사기 첨해 이사금조에는 백제와의 전쟁 기록이 없고, 왜인이 침입하여 석우로를 죽인 일은 재위 3년인 249년 여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훗날 석우로의 아들이 흘해 이사금이 되었는데, 우로가 죽을 당시에는 갓난 아기였다고 한다.
박제상(朴堤上)
생몰년 미상. 신라의 충신.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김제상(金堤上)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박제상은 신라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으로 되어 있으나, 이러한 그의 세계(世系)는 거의 신빙성이 없다.
신라는 백제세력을 견제할 필요에 의하여 402년(실성왕 1)에 왜에 내물왕의 셋째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한 뒤 그의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하여 군신을 불러 협의한 결과,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내14),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등 세 사람이 모두 박제상이 그러한 역할을 맡을 역량이 있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梁山)지방의 토호세력으로서 삽량주간(#삽06良州干)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418년(눌지왕 2)왕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들어가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하여 복호를 구출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귀국한 즉시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다.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에 반하여 도망해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하여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참언하므로 이에 왜가 병을 파견하여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하여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왕의 앞에 끌려갔다.
왜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하여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가 없다고 하여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둘째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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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를 쓰는 미개인들에게 삼국중 하나인 신라는 왜 이렇게 저자세로 벌벌 기었나요? 신라 전쟁영웅 석우로화형 사건은 신라 초창기라서 미약한 세력이었다쳐도 내물왕때에는 고대국가의 기틀이 잡힐즈음인데도 왕의 동생을 볼모로 보내면서 그당시 동북아시아 최강국 고구려와 동등한 외교적 공을 들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