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1탄부터 봐주시길 바라며,
저번 [양양성 전투] 시작점부터 다시 쓰겠습니다.
----------------------------------------------------
여기서 돌아보는 당시 동아시아의 상황은?
북중국은 몽골이 점령 하었고, 서하도 멸망했고, 서요도 병합 당했고, 호라즘도 망했고, 대리도 점령 당했고, 이란-페르시아까지 손아귀에 닿았고, 러시아가 지배하에 떨어졌고, 동유럽도 공격 당했고, 고려도 항복한 상황.
양양 공성전은 무려 1267년부터 1273년까지 6년동안 이어졌습니다.
원나라 측에서도, 가지고 있는 모든 전력을 다 때려붙는 방식으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 하였습니다.
1268년, 무려 10만 명의 몽골 병력이 양양성을 포위 했습니다.
참고로 여몽전쟁 당시, 살리타이가 이끌고 온,
고려라는 나라 하나를 공격하기 위해 온 몽골군의 숫자가 3만입니다.
+쿠빌라이는 500척이 넘는 함선을 새로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양양 주변의 하천, 수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야말로 가지고 있는 북중국의 재력을 아낌없이 쏟아붙는 수준이었습니다.
원군들은 해자를 파고 성채를 쌓고, 양양과 그 근처의 번성까지 한꺼번에 두르는 환성(環城)이라는 이름의 토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중 성벽으로 쌓아 즉, 말려죽이려는 셈입니다.
그러나!!!!
송나라군은 이 철통같은 포위를 뚫고, 성 밖에서 안으로 물자를 제공하는데 성공합니다.
1269년 봄, 강물의 물이 불어나는 틈을 타 하귀(夏貴)가 포위망을 돌파해 물자를 성에 투입한 겁니다
대노한 쿠빌라이는 "이런식이면 포위 의미가 없다. 더 확실하게 조여버리자"며 더 촘촘히 방어를 지시하죠.
그리고, 본래 남송의 장군이었다가 몽골에 항복한 유정 등에 의해
'몽골 수군' 을 육성합니다
송나라 역시 외부의 양양성 지원 및 내부에서의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 온갖 작전은 다 짜냈습니다.
수영 잘하는 병사를 모아, 구원 요청을 청하는 병사들을
풀더미 속에 숨겨 강에 둥둥 떠가게 했습니다.
설마? '강 위에 떠가는 풀더미' 따위까지 뒤져보겠느냐?며 말이죠.
그러나 그런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강물 위에 떠가는 풀더미를 본 몽골 병사들이
"야, 저 강에 풀떼기가 막 내려오네. 말려가지고 떌감이나 쓰자." 딱 걸려버리고 만 겁니다.
이처럼, 송나라는 원의 포위를 뚫기 위해
1269년 7월에는 하귀가 재차 전선 3,000척과 군대 5만명을 이끌고 몽고와 전투를 벌여 대패했습니다.
1270년 9월에는 범문호가 전선 2,000척을 이끌고 나섰다가 패배하였으며,
이듬해인 1271년 6월에는 다시 범문호가 10만에 달하는 수군을 이끌었으나 실패했습니다
외부의 송나라군들도 양양성을 지원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특별히 용감한 3,000명의 병사가 선발되었고,
용맹하고 지혜로워 존경받던 장귀와 장순이라는 두 장군을 특별히 뽑아 이들을 맡겼습니다.
투항병을 통해 정보를 얻어들은 몽골군은 미리 약속 장소를 장악하고 있다가
온갖 고생을 하고 도착한 결사대를 습격했습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와, 그런 그들을 반겨주는 아군인줄 알았던 함선들이
사실은 적의 함선들이라는것을 안 장병들은 싸울 의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장귀 역시 사로잡혀서 투항을 거절한 끝에 결국 처형 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장귀의 시체를 본 양양성 내의 송나라 병사들은 모두 통곡을 했고,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맙니다.
최후의 결사대 마저도 결국 적의 조리돌림 신세로 전락한 이후,
양양성을 향한 모든 지원은 끊겼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고고히 양양성은 버티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