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수왕 23년(서기 435)
23년(서기 435) 여름 6월, 임금이 [북위]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의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임금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임금이 사신을 [북위]위나라에 보내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위나라의 사람들이 [북연]연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말하였다.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에 잠시 의존하며, 미래를 위한 대책과 방법을 세우겠다.”
비밀리에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우리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8. 장수왕 24년(서기 436)
24년(서기 436), [북연]연나라왕이 [북위]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사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침입하기 직전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임금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에 가서 연나라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나라의 성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고에 있는 정교한 의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나라왕이 용성(龍城)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안쪽에 서게 하고,
양이 등은 병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끝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나라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보내
연나라왕을 위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에게 편지를 바치면서,
연나라왕 풍홍과 함께 위나라왕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나라왕은 임금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隴右)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혈(劉絜)ㆍ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반대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수왕 [長壽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요사 지리지 중경도
興中府。本霸州彰武軍,節度。古孤竹國。漢 柳城縣地。
慕容皝以柳城之北,龍山之南,福德之地,乃築龍城,構宮廟,改柳城為龍城縣,遂遷都,號曰和龍宮。
慕容垂復居焉,後為北跋所滅。元魏取為遼西郡
흥중부는 본래 패주장무군이다. 옛 고죽국 과 한의 유성현 자리이다.
궁실과 조정을 구성하고, 유성현을 용성현이라 개명했다. 도성을 이전하여 화룡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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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치하의 일본인 학자는 근거없이 화룡성의 위치를 "조양(차오양시)"이라고 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