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서지리지 평주
平州〈晉置。治肥如城。〉領郡二 縣五 戶九百七十三 口三千七百四十一
遼西郡〈秦置。〉領縣三 戶五百三十七 口一千九百五
肥如〈二漢、晉屬。有孤竹山祠、碣石、武王祠、令支城、黃山、濡河。〉
陽樂〈二漢、晉屬,真君七年併令支含資屬焉。有武歷山、覆舟山、林榆山、太真山。〉
海陽〈二漢、晉屬。有橫山、新婦山、清水。〉
北平郡〈秦置。〉領縣二 戶四百三十 口一千八百三十六
朝鮮〈二漢、晉屬樂浪,後罷。432延和元年 徙朝鮮民 於肥如,復置,屬焉。〉
昌新〈前漢屬涿,後漢、晉屬遼東,後屬。有盧龍山。〉
여기서
朝鮮〈二漢、晉屬樂浪,後罷。432延和元年 徙朝鮮民 於肥如,復置,屬焉。〉
조선현(朝鮮縣), 두 한(漢)과 진(晉)에서는 낙랑군(樂浪)에 속했으며 후에 폐하였다.
연화(延和) 원년(432년)에 조선현(朝鮮) 사람을 비여(肥如)로 옮겨 다시 설치하여 속하게 하였다.
● 그리고 조선현의 한현도 사망일
경화시보(京華時報) 등에 따르면 베이징시 문물국은 최근 다싱(大興)구 황춘(黃村)진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작업(사진) 중 북조(北朝) 시대의 묘 2기를 발견했다. 이중 한 무덤에서 나온 벽돌모양 묘비에는 무덤에 묻힌 이가 ‘韓顯度’(한현도ㆍ중국어 한셴두)이며, 원적이 ‘낙랑(樂浪)군 조선현’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무덤 주인공은 원상(元象) 2년 사망했다. 원상은 동위(東魏) 효정제 원산견의 2번째 연호로 서기 539년이다. 베이징시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남서쪽으로 20여㎞ 떨어진 이 곳을 재개발하던 중 1,000년 이상 된 무덤 129기가 발견되자 지난해부터 발굴 작업을 해 왔다.
■ 수서 지리지
北平郡. 舊置平州. 統縣一, 戸二千二百六十九. 盧龍. 舊置北平郡, 領 新昌 朝鮮 二縣.
後齊省朝鮮入新昌 북제 550~577
북제 때에 (북평군)조선현을 없애고 신창현에 편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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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우북평~낙랑군의 거리는 2,700리
낙양-우북평 2,300 낙양-요서 3,300 요서-낙랑군 1,700 이다.
낙랑군을 2,700리 서쪽으로 이동시킨 것인데... 이런 경우가 있었나 ? (무궁화 3천리....)
대체 왜, 언제 낙랑군 조선현이 북평군으로 이동한 것일까 ?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의 무덤 발견에 따른 시나리오는 ?
1. 조선현은 원래 진시황이 만든 북평군에 있었다.
2. 조선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교치되었다. 언제 ? 너무 멀리 이동한거 아닌가 ?
3. 북위가 북평군 조선현을 요서군에 옮겨 설치하였으나, 한현도 가족은 이동하지 않았다 ?
4. 요서군 비여현에 조선현이 설치된적이 있는가 ?
5. 북위가 432년 북평군 조선현 사람을 비여로 옮기려다 사단이 나서 옮기지 못하니
한현도가 북평군에 쭈욱 거주했고 ~539... 북제550~ 때에 북평군 조선현이 사라졌다 ?
6. 낙랑군 수성현도 같이 이동했기에 秦築長城之所起 진장성 축성이 시작된 곳이라 하는가 ?
7. 한현도는 왜... 북평군 조선현을 낙랑군 조선현이라 했는가 ?
시대별 지리지를 아무리 보아도 어렵네요.
북경 부근의 북평군에 조선현이 있었다는것은 유물과 문헌이 명백한데...
북평군 조선현은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