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고구려를 부족연맹 단계로 규정한 이병도는 고대국가로서의 실질적 건국이 6대 태조대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문제는 고구려의 엄밀한 의미의 건국 즉 부족연맹에서 집권적, 통제적인 정치태세로 옮긴 때가 대개 어느 왕 때에 해당하느냐에 있다.
여러 모로 고찰해 본 결과 제6대 태조대왕 때로부터 비로소 고대식 국가정치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첫째 왕의 호가 대조왕 혹은 국조왕으로 되어 있음을 보아 그렇게 인정치 아니할 수 없고, 다음으로는 패자, 우태 등 고구려의 관직명이 이 왕 때로부터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주의해야 하겠다.”
고대 국가단계의 고구려가 태조대왕 때 건국된 것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로 든 것이 도무지 타당성이 없다. 우선 태조 또는 국조라는 왕의 칭호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서 매우 자의적인 것이다. 그 당시까지 중국의 왕조든 우리 민족의 왕조든 건국시조를 태조라고 부른 일이 없었으며, 후세에 와서 건국시조를 태조로 부르게 되었을 뿐이다.
다음으로 이병도는 패자, 우태 등의 관직명을 거론하였으나 ‘태조대왕’ 20년조의 ‘관나부 패자 달고’, 22년의 ‘환나부 패자 설유’, 80년의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패자와 우태는 관나부, 환나부 등 지방(5부)의 관직명이었다. 그에 비해 왕 71년 조에는 좌보와 우보를 임명한 사실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이 두 관직이 왕의 대신들인 중앙관직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병도는 왜 중앙관직을 제쳐두고 지방관직을 예로 들었을까? 중앙은 물론 지방까지도 관제를 완비했다는 뜻일까? 그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태조왕의 전 3대 ‘대무신왕’ 10년 조에는 좌보와 우보를 임명한 사실이 이미 나와 있으므로 태조왕 때 좌보와 우보를 임명한 것이 최초라고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지적할 것은 대무신왕 전 2대 ‘유리명왕’ 22년 조에는 ‘대보(大輔)’인 협보가 왕에게 간하는 기록이 있는데, 대보는 좌보, 우보와 함께 왕을 보좌하는 최고의 관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삼국사기』의 건국 초기부터 관직명이 나타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감추고 태조대왕 때 와서야 관직명이 보인다니 난감한 일이다.
이병도는 태조대왕을 시조로 보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왕의 대에 비단 안으로 대소 2수 유역의 제부족사회를 완전 통합하였을 뿐아니라, 밖으로 대한(對漢) 공세를 개시하여 요동, 현도 양군을 자주 침공하여······ 또 앞서 동으로 옥저를 복속시키고 남으로 살수에까지 지경을 넓히는 등 정복국가로 서의 태세를 충분히 갖추었던 것이다.····그 이전 5대 간은 부족연맹체에서 집권국 가 체제에 이르는 과도기적 현상에 불과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태조대왕이 정복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나아가 한나라에까지도 공세를 개시했다고 강조하는 한편, 그 이전 다섯 왕의 시대를 과도기로 그 의미를 격하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된 다섯 왕들의 정복 활동과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감추고 태조왕의 업적만 거론하고 있으니 이것이 올바른 문헌고증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 식민사학 계보. 서울대 이병도와 고려대 신석호의 후학이 강단사학계 주류 © | |
태조대왕 이전에 『삼국사기』에 보인 정복에 관한 기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시조 동명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말갈을 물리치고 다음 해에는 비류국을 항복받았으며, 6년에는 행인국을 정벌하고 10년에는 북옥저를 멸하였다.
2대 유리명왕은 11년 선비를 항복시켜 속국으로 삼았고 32년에는 침입한 부여군을 섬멸시켰으며, 33년에는 양맥을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현도군을 습격하였다. 고구려가 건국과 더불어 정복국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다물(고토회복)을 위해 중국에 공세를 개시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3대 대무신왕도 5년에 당시 우리 민족 최대의 강국이던 부여로 진격하여 비록 실패에 그쳤으나 부여 왕족인 갈사왕의 항복을 받았다. 9년에는 개마국을 군현으로 삼으니 구다국은 두려워 항복했다. 11년에는 요동태수의 침입을 회유로 물리치고, 20년에는 낙랑국을 멸했다.
4대 민중왕은 5년만에 돌아가고 5대 모본왕도 즉위 6년만에 시해당하였으나 왕 2년(서기 49)에 한나라 깊숙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 이상 열거한 15건의 정복과 전쟁에 관한 일이 태조왕 이전 90년 동안에 있었는데, 부족국가에 불과한 고구려가 무엇을 믿고 천하의 강대국인 한에까지 도전할 수 있었겠는지 의아할 뿐이다.
고구려의 건국을 실제보다 90년이나 늦춘 이병도는 백제와 신라의 건국은 더욱 많이 늦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그의 논의는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과 같은 맥락으로서 일제 강점기인 1934~37년 사이 『진단학보』에 게재한 「3한문제의 신고찰」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이러한 잘못된 논의를 구체적으로 보기 전에 우선 그가 백제와 신라의 건국을 삼국시대라는 제목 아래에서 다루지 않고 삼한문제의 고찰이라는 시각에서 다룬 것을 지적하겠다.
그는 삼국시대의 시작을 신라가 건국되었다고 보는 내물왕(서기 356~402년)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으며, 내물왕 이전 수백 년을 삼한시대로 다루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3국 중 백제의 흥기는 고구려보다 2세기를 뒤지고 신라의 그것은 백제보다도 1세기를 뒤졌으며······ 그러므로 3국 중 최후진인 신라의 흥기 이전이라든지 여제(麗濟) 멸망 이후 신라통일시대는 모두 삼국시대의 범주에서 제외 되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엄밀한 의미의 3국시대는 신라의 흥기(즉 내물왕 시 대;356~402년)로부터 여제 2국의 멸망(660~668)에 이르기까지의 약 3세기 동안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한국의 역사를 일본보다 빠르지 않게 하려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정하는 길이 최선이라고 본 일본 | |
이제 백제의 건국에 관한 이병도의 논의를 비판키로 하겠다. 이병도는 온조대왕의 건국사화를 고구려의 경우처럼 전설로 간주하고 백제의 시조가 8대 고이왕이라고 이렇게 주장했다.
“백제국명이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기는 동진(東晋)시대의 기록으로부터였고 또 백제 에 관한 기전(記傳)이 중국 사서에 비로소 실리기는 유송(劉宋)시대의 기사인 『송서』 로부터이거니와, 그렇다고 백제의 발흥이 동진대나 유송대에 시작되었다고는 물론 볼 수 없고 늦어도 3국말, 서진(西晉)초에는 일국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라고 인식된다.
3국말, 서진초는 이를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로부터 제 8대인 고이왕 조에 당하거니와 이 고이왕이야말로 이 나라의 국가적 체계를 이룬 건국의 태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리하여 나는 백제의 확실한 건국연대를 이 고이왕 27.8년 경(서기 260~261)으로 잡거니와 ····· 그런즉 『주서(周書)』의 소위 (백제 시조) 구태는 바로 이 고이에 당하는 인물로 간주함이 온당할 것이다.
고이와 구태는 자음상으로도 서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으니 ‘구(ku)’와 ‘고(ko, ku)’는 물론이요 ‘이’와 ‘태’도 전혀 동음인 까닭이다.
백제에 관한 기록이 중국 문헌에 동진 또는 유송시대부터 나타난다고 하면서도 이병도는 백제의 건국시기는 늦어도 그 이전인 3국말이나 서진초로 인식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고이왕 27,8년(서기 260~26을 백제의 건국 시기로 보아 고이왕을 건국의 태조라고 했다. 그 근거로는 관제와 복색(服色) 및 법금(法禁)을 정비한 기록을 말하였으나 이는 자의적인 것일 뿐 객관성이 없다.
고이왕이 태조라면 그 즉위년부터 건국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특정한 사안을 가지고 건국여부를 논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고이왕을 시조로 만든 이병도는 그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이(왕) 이전의 제왕 기사는 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나로서 고찰하면 그들은 대개 부락국가시대의 세습적 거수로 개국 후에 추존된 임금들이거나 혹은 진 위반잡(眞僞半雜)의 세계를 후세의 사가가 개국 이래의 왕통과 같이 윤색한 것이거나 할 것이며, 따라 그들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재에는 신용을 둘 수 없는 것이 많 다.
고이왕 이전의 기록은 후세에 윤색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누가 왜 그렇게 하였는지 근거를 대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쓰다 소키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 식민사가들은 8대 고이왕이 아니라 13대 근초고왕에 와서야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들의 주장이 틀렸고 이병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면 그 이유와 근거를 명확하게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입장보다 백제의 건국을 백 년이나 늦춰 본 일본인들의 입장을 모른 체하고 일체 비판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 역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신봉하고 있는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