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4월 25일
상주 전투
음력 4월 15일 경상도 남부권의 본격적인 방어작전이
동래성의 함락과 함께 붕괴되었다
4월 17일 양산 함락,
음력 4월 18일 밀양 부사 박진의 저항이 속수무책으로 깨지고,
4월 19일 언양이 점령당하고
음력 4월20일에 김해 부사 서예원이 김해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도주하고 만다
음력 4월 21일 경주 판관 박의장의 부대가 전멸하며
경주 역시 점령당한다
이때, 불국사와 분황사가 소실된다
같은날, 창원과 영천은 무저항으로 점령당한다
경상도 남부의 조선군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으며,
왜군이 경상도의 거의 전지역을 점령했다
경상도의 마지막 남은 거점도시는,
상주였다
음력 4월17일,
원인불명의 이유로 경상우수영 가덕봉수대에서 시작된 봉수가
중간에서 끊기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전쟁 발발 소식을 개전 3일 째에 보고를 받게 된다
조정은 당시 북방에서 명성을 쌓았던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상주 전투의 지휘를 맡긴다
이일은 이순신 장군의 첫 패전이자,
유일한 패전인 녹둔도 전투때 이순신의 구원 요청을 거부했었던
당시 함경도 북병사에 제직 중이었으며,
북도 제승방략제를 재정리한 전술, 전략에도 정통한 자였다
하지만 녹둔도 전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잘못을 덮어 씌웠던 과오가 있었다
그 선조마저도 이일의 장계를 받고는
"내 알기론 이순신과 이경록은 유능한 자들인데, 그렇게까지 잘못이 없는것 같다."
는 어투의 장계를 내려 더 큰 벌을 주기보단 백의종군을 통해 공을 쌓게 전교하였다
이후 조선군의 녹둔도 전투의 보복 공격을 가할때
신립과 함께 큰 공을 세워,
이일은 신립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올라선다
이 이일이 상주에 도달한 것은
음력 4월 23일이었다
허나 상주 목사 김해는 물론 이미 집결하였던 병사들도 대다수
이미 도주한 이후였고,
판관 권길과 소수의 병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일은 대동한 군관 60명으로 병력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겨우 수백
기존 병력과 합해봤자 천여명에 남짓하였다
이 기초도 안되있는 병력에게 이일이 급히 시켰던 훈련이 제식훈련이었다
제식조차 안잡혀있던 오합지졸 병력이었다
음력 4월24일 한 백성이 급히 상주 군영으로 들어와
왜군이 접근한다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정식보고도 아닌, 온 사방에 떠들고 다니자 안그래도 오합지졸인 병력의
사기가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였고
이일은 마지못해 제승방략 금령18조에 의거하여 농민을 참수하였다
농민에게는 안되었지만,
이는 지역 최고 지휘관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정당한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