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이 1월에 시작되어 3월 초에 조선-후금간의 형제지맹을 내용으로 하는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위의 조선군 전과는 강화조약 이후에 발생한 전과들이군요....!!!
후금군이 강화조약 이후 곱게 철수하지 않고... 포로들과 전리품을 챙기고자 철수하는 노정의
황해도~평안도상의 여러 고을을 분탕질 치면서 천천히 철수했고, 더구나 청천강 이북에서부터는
가도의 모문룡과, 용골산성 같은 후금군이 접수하지 못한 지역들을 제압하려 하기도 했고...
또한 국경에 이르러서도 조선에 침입했던 후금군 전 병력이 압록강 너머 철수한 것도 아니고...
몽고계 병력들이 상당수 포함된 수천에 달하는 병력을 의주,창성 일대에 그해 하반기까지 잔류시켜...
조선의 조약이행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철수하던 시기의 청천강 이북 일대에서는
아비규환의 양상이 벌어지지요!
후금군의 약탈에 맞서는 조선군-의병들의 모습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의 모병들까지 육지에 상륙해서 설쳐대는 통에...
모병들이 후금군과 교전을 벌이기보다는 무정부상태에 처했던 제압하기 손쉬운
조선백성들을 약탈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많은 백성들을 살해하여 수급을 취하여
이를 후금군의 수급으로 위장하는데 몰두했으니(모병들에게 희생된 조선백성들도
드러난 것만 최소 만 단위를 훌쩍 넘겼으니...)
기본적으로 조선군-의병과 모병들이 연합하여 후금군과 맞서는 모습도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병들에게 시달리고 가족을 잃은 조선백성들이 후금군과 협력하여
모병들과 맞서는 형국도 벌어졌으니....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모를 상황도 여러차례 연출되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모문룡에게 가도에 대한 조선의 막대한 지원과 협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묘호란에서 조선의 어려움을 외면했던 모문룡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으며...
적반하장격으로 이에 발끈하여 모문룡은 전란 중에 조선인들이 후금과 협력하여
모병들을 공격했던 사례들를 들어 조선조정을 힐책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훗날 병자호란 이후 청에게 굴복한 조선이 청과 협력하여 가도의 명나라세력을
일소하는 과정에서... 청군보다 오히려 조선군들이 가도의 명나라인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데 앞장섰던 배경에는 가도의 명나라세력에 의해 조선인들에게 자행된 만행들이
분노로 축적되었던 요인 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50만명이나 끌려갔다고 하는데 국정정세를 살피지못한 조정이 책임이 큽니다.임진왜란때 그리 당하고도 준비도 없이 그냥 밀려버립니다.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끌려간 사람들 사오지도 못했다고합니다. 이리 많은 백성이 당했는데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군주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역사는 반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