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을 동원 심혈을 기우린 30년, 생전 마감도 못한 체 세상을 등지고 단종 2년에 나온 고려사, 당시 단종실록 기록을 보자.<단종12권 2년(1454 갑술 /명 경태5년 (10월13일)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이 당상(堂上)의 의논을 아뢰기를
“고려전사(高麗全史)는 사람들의 시비·득실이 역력히 다 갖춰 기재되었으므로, 황보인과 김종서가 고려전사가 출간(出刊)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를 알까 두려워하여 다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印刊,인쇄하여 발행)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에만 간직하였습니다.”
고려사는 개수 개찬을 거듭, 조선 개국 62년 만인 1454년 단종 2년에 간행되었다.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60여 년을 반복적 개찬, 개수 작업을 한 것으로 보아 끊임없는 갈등과 문제 제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록이 전하는 것처럼 ‘시비를 알까 두려워’라고 했다. 내부 비치용으로 일부만 간행하여 간직했다고 했다. 숱한 의미가 담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서울대 국사학과 노명호교수(1990~2017)는 최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지식산업사)을 출간해 고려사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고자 했다. 조선 초기 고려사는 주자학 이념에 치우친 나머지 상당 부분 왜곡되었다.
지금의 후손들은 그 ‘왜곡된 역사’를 사실로 알고 있다. "한국 사학계는 아직 고려사의 역사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 건국 후 처음 편찬된 ‘고려사’(1395)는 주자학 이념의 사대명분론에 따라 고려의 황제제도를 모두 제후(왕)로 고쳐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특히 제후제도로 고칠 경우 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다수 발생하면서, 내용은 빈약해졌다. 이를 깨달은 왕은 세종이었다.
최승로나 김부식 등은 유교적 사대이념에 기반한 당,송 같은 나라가 온 천하의 유일한 황제국인 중화이며, 고려 등 다른 나라들은 이(夷)로서 제후국이라는 세계관, ‘화이론’을 주도적 사상으로 부각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소장은 여진족이 세운 금(金·1115~1234)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 ‘지리지’는 “봉집현은 본래 발해의 옛 현이다. 혼하(渾河)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혼하는 심양과 본계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중국 사료들은 주원장이 1388년 설치했던 ①철령위는 심양 남쪽 진상둔진이고, 1393년 이전한 ②철령위는 심양 북쪽 철령시 은주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케우치 히로시는 1918년 ‘조선 우왕 때의 철령 문제’에서 함경남도 안변을 철령이라고 우겼다. 안변 남쪽에 철령(鐵嶺)이라는 고개가 있는 것에 착안한 대사기극인데, 이를 조선총독부의 이나바 이와기치, 조선사편수회 간사이자 경성제대 교수인 쓰에마쓰 야스카즈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일본인 스승님들 말씀은 영원히 오류가 없다”라는 한국 역사학자들이 100년째 추종 중이다.
나아가 이 사기극을 국정·검인정 교과서에 실어서 미래 세대들의 정신세계까지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선조들의 피 서린 강토와 역사를 팔아먹고, 나라의 미래까지 팔아먹고 있건만 이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 있는 당국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인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