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근거를 확대해 대형 토목공사의 결과물인 풍납토성 축조 연대는 3세기 전반·중반까지 올라갔다. 학계·언론은 ‘한국판 폼페이’라며 흥분했다. 고대 왕국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가서야 성립된다는 일본 식민주의 실증사학자들의 학설을 뒤집는 근거를 마침내 찾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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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통설로 굳어져온 국내 학계의 이런 견해를 뒤집는 중국 학자의 논문이 발표돼 파장이 일고 있다. 중국 남조·백제 유물 교류사를 연구해온 왕즈가오 난징사범대 교수. 그는 지난 21일 ‘동북아시아 속의 풍납토성’이란 주제로 열린 서울 한성백제박물관 국제학술회의에서 논고를 통해 풍납토성 출토 시유도기 등으로 판단해볼 때 축조 연대는 3세기로 올려잡을 수 없고, 중국 동진 중·후기에서 남조 초기인 4세기 후반~5세기 중·후기에 쌓은 것이란 파격적 주장을 내놓았다.
‘풍납토성의 세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이란 이 논고에서 그는 최근 중국 난징의 남조시대 도읍터 건강성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현지 시유도기 유물을 풍납토성을 비롯한 여러 백제 유적의 시유도기 출토품과 비교·분석했다. 풍납토성을 비롯해 인근 몽촌토성,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 전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터 등의 출토 시유도기와 모양·태토·유약 등이 유사한 남조 유적의 시유도기 표본을 찾아내 맞춰본 것이다.
그 결과 국내 학계가 주장해온 3세기 동오와 서진시대의 도기 특징은 보이지 않았다. 옹 같은 대형 그릇의 모양이나 유약을 바른 형태 등에서 4~5세기 동진과 남조 초기의 유송시대 도기의 특징만 확인됐다고 한다.
왕즈가오는 “시유도기 등 풍납토성에서 보이는 중국 도자기 가운데 4세기 동진 중·후기보다 이른 것이 없다”며 “중국 도자기를 근거로 삼아 풍납토성이 3세기 중·후기 축조되기 시작했다는 결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백제 유적의 중국 도자기는 백제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 27년(372년)에 동진·남조와 외교관계를 맺은 중국 사서의 기록 뒤에 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발표는 고대 왕국 백제가 4~5세기께야 등장한다는 기존 실증사학자들의 주장을 되레 뒷받침하는 내용이어서 국내 학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근데 풍납토성 목탄의 방사소 연대 측정검사로 드러난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3세기에 축조되었다는데... 중국교수가 방사소 연대 고려하지않고 성급하게 주장함. 보고서>는 <삼국사기> 고이왕 27년조의 이 기사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3세기 후반에 백제의 왕성인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축조되었다”라고 서술했다. 국립문화재 연구소는 2000년에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13점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을 해 그 중심 연대가 빠른 것은 서기전 199년에서 늦은 것은 서기 231년이라고 발표했다. 풍납토성이 이미 서기전 2세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000년에 이미 이런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으나 2005년에 국민의 세금으로 발간된 <보고서>는 ‘3세기 후반에 축조되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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