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장단경에 대한 결론: 즉,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밀려, 도읍지를 옮겼지만, 그 도읍지가 대릉하 유역이나 요하 유역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말 해 단군조선의 도읍지는 지금의 요서지역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고, 낙 랑군의 위치도 요서지역에 위치해야 한다든 것이 합당하다.
4)단군왕검의 멸망에 대한 추측: <고기>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장당경에서 다시 아사달로 도읍지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표현을 살펴보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단군조선이 장당경에서 멸망하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인 추측을 해 본다.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그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단군의 추종자들이 옛 본거지로 돌아왔고, 단군의 사당을 지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면 어떨지 추측해 본다, 따라서 단군조선은 장당경에서 멸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5)진개의 침략에 의한 고조선의 수도 이동설: 서울대학교 교수 노태돈은 연나라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의 도읍지가 지금의 요동지역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지 三國志>에서 인용한 <위략 魏略>에는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昭王, 서기전 312-279년) 때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공격하고 땅 이천여 리를 차지하였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는 기술이 있다.
만번한은 행정구역인 요동군에 속해 있는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었다. 요동군은 중국의 동북변경에 있었던 행정구역으로서, 원래는 만리장성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결국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사실상,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진개가 빼앗은 땅은 연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일종의 완충지대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기>에 위만이 망명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鄣)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여기서 패수 동쪽에 진나라의 빈 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한 것은 국경 방어의 편의를 위해 국경 부근에 살고 있던 고조선 주민들을 소개(疏開)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공격으로 고조선의 도읍지가 진개에 의해 침탈되었다거나 위협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도읍지를 옮긴다는 것은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한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진개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도읍지를 옮겼다는 주장은 근거가 박약하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위만조선의 왕험성이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도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고조선(기자조선)의 도읍지는 위만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낙랑군 조선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의 왕성을 빼앗아 한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도읍지를 옮기지 않았다.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는 갈석산이므로 왕험성은 갈석산의 동쪽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지들은 모두 지금의 요서지역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6)결론. 고조선 수도의 대략적인 위치비정: 단군조선은 서기전 24세기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는 홍산문화 유적지 부근에서 나라를 열었다. 첫번째 도읍지인 평양성과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은 모두 홍산문화 유적 즉 요하에 근접해 있었다. 평지에서 나라를 일으켰다가 나라가 커지면서 방어에 편리한 산성으로 옮겼을 것으로 보인다.
백악산 아사달은 기자조선의 도읍지가 되었다가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되었으며, 후에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다. 낙랑군 조선현은 갈석산 동쪽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었다. 서기전 12세기에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단군조선의 근거지를 장악하고 기자조선을 세우자, 단군조선은 장당경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장당경은 지금의 대릉하 또는 요하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s)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의 경쟁: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조선의 적통을 두고 대립한 것으로 보인다. 후한(後漢)의 왕부(王符)가 편찬한 잠부론(潛夫論)에 “옛날 주나라 선왕 때 또한 한후(韓候)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에 가까웠다. 옛 시에서 말하기를 ‘저 커다란 한성(韓城)은 연나라 군사들이 쌓은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그 후 한(韓)나라 서쪽도 역시 성(姓)이 한(韓)이었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해서 바다 가운데로 옮겨 거주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한후(韓候)는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위만에게 정벌당한 서쪽의 한(韓)이라는 성(姓)을 가진 나라는 기자조선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그 뿌리가 같다는 사실과 함께 이들이 상당기간 병존(竝存)하였음을 말해준다.